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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양 Oct 14. 2021

에릭 로메르의 '소설'도 읽어 봅시다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 에릭 로메르

에릭 로메르는 1950년대를 풍미한 영화 사조인 프랑스 누벨바그(french new wave)의 대표적 기수 중 하나다. 그의 스타일을 가장 쉽게 연상하려면 홍상수와 연결 지으면 된다. 정적인 앵글과 방대하고 의미심장한 대화, 그리고 찌질한 남자들. 두 감독의 차이점을 본격적으로 짚기엔 이 공간이 부족하기에 로메르가 홍상수와 구별되는 특징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유려함과 문학성이 두드러진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여섯 개의 도덕 이야기>는 동명의 연작 영화 제작을 위해 쓰인 여섯 편의 소설을 엮은 책이다. 각본을 바로 쓰지 않고 먼저 소설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만든 거다. 로메르는 이 책 서문에서 “이 텍스트들은 내 영화에서 ‘끌어낸’ 것이 아니”라며 “초안부터 완전히 문학의 모양새를 취했다”고 말한다. 굿즈 문화의 성장과 함께 유행 중인 각본집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각본이 영화에 종속된 부품이라면 로메르의 소설은 개별적 작품이라는 것.


말이야 멋지지만 굳이 소설로 써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영화로 만들 건데 트리트먼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은 소설로서 독자적 가치를 갖는 데 그치지 않고 탁월하다는 인상까지 줬다. 사건 자체보다 그걸 겪는 주인공의 내면의 흐름에 초점을 둔 작품들이라 그런 거 같다. 로메르도 “이 이야기들이 도덕(moral) 이야기들로 통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물리적 행위가 거의 드러나지 않아서다. 모든 것이 화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난다. 화자가 다른 사람이면 스토리가 달라지든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영화도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다양한 도구—배우의 연기, 미장센, 몽타주 등등—를 갖지만 상세한 서술을 제약 없이 활용할 수 있는 소설에 비해 복잡미묘한 내면의 변화를 명확히 표현하는 게 어려운 편이다. 보이스오버로 독백을 넣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사의 한계를 보완하는 수준에서 보조할 뿐이다. 다만 아무리 영화와 분리된 작품이라 해도 한계도 명확하다. 로메르의 영화는 배경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나 세련된 프랑스 거리의 풍경이 자칫 밋밋하게 느끼기 쉬운 인물들의 추상적 대화를 예술적 독특함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클레르의 무릎>은 예전에 영화로 본 경험이 있기에 소설만 읽은 다른 작품보다 생생하게 느껴진 게 사실이다.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의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단락에 언급했으나 반복하면 도덕(moral)은 물리적인 것과 반대되는 정신적인, 추상적인 이라는 의미도 갖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여섯 개의 이야기는 파트너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매력을 느꼈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는, 도덕과는 거리가 먼 소재를 다룬다. 하지만 주로 외도나 불륜의 감정을 다루는 이 작품들이 역설적으로 도덕적 사유를 촉발하는 매개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도 재밌는 시도가 될 거 같다.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우스꽝스럽게도 그런 자기 변명을 들키지 않는 상황은 두 가지 통찰을 준다. 하나는 기존의 도덕이 얼마나 허위로 가득 차 유명무실한지, 또한 이런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게 산다는 건 어떤 기준과 태도를 필요로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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