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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온 Jun 21. 2023

요즘 세대의 결혼 준비

결혼 해치워버리기 프로젝트


역시 여유로운 결혼 준비는 나랑 안 맞아

 4월의 어느 날, 언젠가 진행할 결혼식을 위해 리스트업 해두었던 두 번째 성당에 다녀온 후 조금 실망한 우리는 근처 백화점에 들러서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계단에 걸터앉아 갈증을 축이는데, 카페인을 충전하는데도 둘 다 넋이 나갔다.


 "아직 2번밖에 안 봤어. 간바레 해야해. 근데 왜 이렇게 힘들지?"

 "그러니까 말야. 나는 이번 성당은 확실히 별로야. 성전도 너무 화려하고, 주차장도 그렇고."

 "솔직히 첫번째 성당이 제일 낫지?"

 "웅. ... 그냥 거기로 해버릴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하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문득 웃음이 비집고 올라왔다. 추진력은 있었지만 체력이 부족했던 우리는 결혼 준비의 여정, 그 출발선부터 싫증이 났던 모양이었다. 사실 올해 안에 한다면 딱 9월에 하고 싶었는데, 첫번째 성당은 우리가 원하는 여러 기준에 부합했다. 대성전의 차분한 분위기라던가, 주차장, 엘리베이터, 날짜 등 모든 부분에서 평균 이상이었으니까. 날짜도 선착순이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결정해서 찜콩 해놔야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즉흥적으로, 첫번째 성당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인스턴트로 결혼식 준비하기 

 몇 달 동안 준비한 결혼식이라 하더라도 최대 1~2시간 안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물론 성당 예식이라 다른 결혼식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러니 결혼식 준비도 발품 팔지 말고 인스턴트로 준비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나는 결혼식 장소를 확정짓고, 어디서 주워들은 어플을 다운 받았다. "웨딩북" (광고 아님)이었는데, 정보를 기입하니 매니저가 배정되고 스드메나 예복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에 큰 로망 없기도 했고 (외려 오빠가 더 로망이 많았다는게 함정이다.) 비효율과 겉치레보다는 합리적인 결혼을 원했던 가치관이 맞아서 가능했다. 더불어 양가 부모님의 간섭은 일절 없었어서 너무 다행이었지. 우리들이 오롯이 채워나갔던 시간이었다. 가끔씩 "이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하면서 꼬시는 웨딩 업자들과 주변 지인들이 은근 많았지만 잘 극복했다. 이 때 아니어도 할 수 있는 기회들은 많으니까. 정 아쉬우면 내가 만들면 되지 뭐. 


 그렇게 2달 동안 우리는 황금같은 주말과 연차들을 반납하고 성당과 드레스샵, 예복, 메이크업샵, 세미 스튜디오 촬영, 허니문 예약, 상견례, 천주교 혼인강좌를 순탄하게 해냈다. 의 서포트(라고 쓰고 묵묵히 따라가주기라고 읽는다)가 없었으면 못해냈을 일이다. 청첩장과 모임들, 그리고 결혼식, 허니문이 남았지만 지금 잘 해왔던 것처럼 잘 해올 예정. 커리어에서도 기획하면서 내 인생 2막 기획까지 같이 가져가려니 입안에서 폭죽 두어개가 연거푸 터지고 있지만, 그런대로 만족한다.



어쩌다 이렇게 빨리 결혼 준비해?

 왜 이렇게 빨리 결혼 결심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들을 종종 듣는다. 시대가 바뀌긴 했는지, 29살인데도 빠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긴 그도 그럴것이 친한 중고등학교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결혼이라는 궤도에 오르는 '첫 유부'이긴 하다. 친구들은 내가 결혼 일찍 할거라는 소리를 줄곧 들어왔었으면서도 제일 늦게할 거라고 생각했단다. 톡톡 튀는 연애를 즐기는 그 모습 그대로 마흔까지 유지될 줄 알았다나. 조용히 다가와서 속도위반 했냐고 물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애기 좋아하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런 질문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냥, '할 때 되었으니까'라고 일축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제야 상대방을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서 그렇다'고 말이다. 나는 그의 '내어주는 마음'을 배우고 있다. 나를 기꺼이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마음(Self-giving)이랄까.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날을 되짚어보면, 나는 조금 덜 주고, 조금 더 받고 싶었다. 쉽게 말해 관계에 이기적이었던 것같다. 내가 사랑을 받은 것보다 더 주면 상처 받을까봐 두려웠던 겁쟁이였을 지도 모른다. 갈망하는 것을 얻으려 부단히 애써왔던 지난 날에는 초반부터 나를 갈망하는, 조금은 위험한 사람에게 끌려했다. 그리고 그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채기 난 마음을 오롯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나에게 '해 주며' 행복해하는 그를 보며 나도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주면서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그 행위 자체에 효능감을 얻는다. 가령, 그가 좋아하는 디아블로4를 그의 용돈으로 결제해서 내 계정에 선물한다던가.. (아, 이건 아닌가) 늦게 퇴근해서 힘들어하는 나를 위해 저녁 밥과 설거지까지 다 해준다던가. 내가 불편하지 않게 일상 속 남몰래 배려해주는 것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그 허울 없는 마음들은 가끔 뜨끈하고 근사한 감정으로 다가온다. 그는 삶에 치여 잊고있었던 묵은 감정들을 한번씩 꺼내온다. 그럴 때마다 고맙다며 토닥이면 쉽게 감동받는 그의 얼굴에 나도 덩달아 밝아진다. 나도 그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어차피 이 사람과 계속 같이 있을건데, 공수 많이 들고 힘들기만 한 1회성의 결혼식은 그냥 빨리 끝내고 싶었다. 나는 그야말로 시행착오 많았던 1막을 후련한 마음으로 정리하고 2막으로 넘어가는 기로의 한 가운데에 서있다. 가끔 솔로의 자유가 그리워 뒤 돌아볼 때도 있겠지만, 괜찮다. 하나보다 둘이어서 더 좋은건 명확하니까. 잘 정리해서 다음 막으로 잘 넘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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