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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온 May 30. 2024

우리가 아이를 낳으며 살 수 있을까?

어느 평범한 젊은이들의 고민


 "나는 요즘 어케 살아야 할지 고민이야."


 적막한 어느 화요일 오후, 대뜸 막내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리 삼남매 중에서 제일 점잖고 어른스러운 여동생이 이런 카톡을 보내는 것은 꽤 대수로운 일이었다. 


 연년생 급의 터울인 우리 삼남매들은 90년대생으로 태어나 모두 장성하여 각자의 직장인 위치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한껏 우려 나눠 마시며 근황 공유 시간을 갖곤 한다. 근황에 맞물려 뜬구름 잡는 가치관/철학 파트에서 장황한 토론을 늘여놓는 쪽은 보통 나와 내 바로 밑의 남동생이었고, 여동생은 묵묵히 듣다가 현실적인 말들만 던지는 편이었다. 그녀는 '머리 아프게 뭔 인생에 의미부여를 그렇게 크게하냐-, 그냥 사는거지-'고 우리를 타박하는 아이였는데, 갑자기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니. 흥미로웠다.


"어떻게 살고 싶은뎅?"

"글쎄..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오, 마음이 바뀐건가. 나는 결혼을 한 뒤 2개월만에 아이가 생겨 벌써 30주차 임산부로 접어들고 있다. 자연스럽게 결혼 및 임신 홍보대사가 되더라. 아무래도 내 주변에 결혼한 친구들이 없으니(나는 윤석열 나이로 28에 결혼했고, 내 친구들 중 첫번째 기혼자가 되었다.) 기혼 메이트들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결혼 정말 좋아', '돈은 결혼하고 모으는 게 훨씬 더 잘 모여', '요즘은 아기가 혼수래.' 와 같은 이야기들은 내 동생들에게도 은연중에 이어졌을테다. 그 전까지는 결혼에 별 생각 없던 동생들이었는데 그렇게 마음에 동요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 


 "야, 그럼 빨리 결혼하면 되겠네."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가정은 딩크보다는 아이와 함께 오손도손인데, 아이의 행복을 생각하면 맞벌이는 좋은 선택지가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내가 그만두게 되면 그동안 공부해왔던 것들이 너무 아까울 것 같아."


 여동생이 스물 중반인만큼 결혼시장에서의 우위가 상당할테니 긍정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갓 사회에 발들인 1년차 사회초년생의 시선에서는 많은 생각들이 겹쳐지나보다. 실은 나도 그랬다. 이 일을 하면서 10년 이상 경력을 그대로 가지고 가는 여자 선배를 본 적이 없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다들 아이가 생기니 그만두고,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는단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남녀를 가르지 않고 동등한 교육을 받으며 훌륭한 노동자(혹은 경영자, 예술가 기타 전문가 등등..)가 되기 위해 성장해왔다. 대학까지만 해도 윗세대가 받았던 성차별들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차별없는 교육 덕분에, 그 안에서 실력을 발휘하며 공부하고 인정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가보면 눈앞에 펼쳐진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의 갈래에서 여자들은 혼란스러워진다. 내가 노동시장 안에서 커리어를 확보하려고 하면 결혼시장에서의 양질의 출산과 양육 환경에서 멀어지고, 내가 결혼시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면 노동시장에서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 모순된 갈래길에서 우리들은 균형을 맞추기 위하여 최대한 경제적으로 준비해놓고, 최대한 젊을 때에 결혼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가 우리나라의 평균 초혼 연령일 것이다. 


2022년 기준 우리나라 평균초혼연령은 남자 33.7세, 여자 31.3세로 남자는 0.4세 상승, 여자는 0.2세 상승함. - 통계청


 여자로 태어나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면 참 속 편할 것이다. 전문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쭉 밀고 나가서 원하는 커리어 우먼으로 인정받거나, 엄마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내거나. 하지만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변수를 경험하고 또 변화의 계기들이 사고처럼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달려가다가도 노산을 훌쩍 넘긴 나이에 현타가 올 수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아이에게 올인하다가 나를 잃어버린 듯한 우울한 감정이 지속될 수도 있다.


 나는 결혼을 일찍 하고 싶었고 아이도 낳고 싶었는데, 난 여동생과 달리 외벌이보다는 맞벌이를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금쪽이들이나 아들TV, 기타 출산 육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결국 아이에게는 부양자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심플하게 얘기하면 아이가 애정결핍이나 불안장애 등 정신적 병에 걸리는 이유는 (유전적 영향을 배제하면) 부모 탓인 것이다. 아이의 성향에 맞춰 신체적, 정신적 발달에 100% 만족시킬 수 있는 부모는 없겠지만, 뱃속에 아가를 품고 있는 나는 이것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남편은 외벌이도 괜찮을 것이라 얘기하지만, 글쎄. 이 환경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생활을 하려면, 아이가 원하는 만큼의 교육을 제공하려면 내가 그만 두는게 정말 맞는걸까? 늘 내적갈등에 놓여진다. 






 언젠가 엄마에게 이런 푸념을 한 적이 있다. "노동시장은 아직도 확실히 남자들이 메인 주인공인 것 같다"고 말이다. 원시시대부터 중세와 근대, 현대에 오기까지 여자가 노동시장에 진출한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긴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린시절부터 사회에서 인정받고자 해왔던 노력들이 흐지부지 되는 것은 아닌지 괴로워졌다. 


 그러자 엄마는 너무 패배감에 매몰되지 말고, 이 시류 속에서 개인인 내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영리하게 생각해야한다고 했다. 현재 열정적으로 사회생활 하고 있는 우리 엄마는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사회생활을 3년 하다가 아빠와 결혼하게 되었다. 본인 스스로가 임신과 출산 체질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건강했으며, 연년생 삼남매를 아빠가 가져오는 보통의 월급에 쪼개어 키워도 힘들지 않고 즐거웠단다. 그런데 우리가 어느정도 크자 아빠가 슬슬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그렇게 일을 시작했다.


 엄마는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글쓰기 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공부방을 운영하고, 중고등학생때에는 논술 지도사로서 내 또래까지 지도했다. 우리가 성인이 되고 나니 숲 생태에 관심이 생겨 숲 해설사를 공부하고 숲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취업할 무렵에는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공부였다며 심리학과 석사를 마쳤다. 엄마의 과거 행적을 살펴보면 마치 시대의 물살에 몸을 맡기는 '서퍼'와 같았다. 유연하며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공부들로 밥벌이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배경에는 묵묵히 같은 직장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아빠의 노력과 함께 시대적인 순풍들이 뒷받침 되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캐' 살아야할까. 어제 뉴스를 보는데 출산율이 더 낮아졌단다. 사상 처음으로 1분기 0.7명대를 기록하는 아이 없는 대한민국. "아직도 아이 낳는 사람이 있냐", "대한민국은 망했다" 라며 자조적인 댓글을 읽는데, 막 30주를 넘겨 빵빵해진 뱃속의 구슬동자가 한 번 꿀렁거린다. 우울한 기분으로 배를 토닥이며 변화하는 시류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 판단을 하고 살아가야할지 고민만 하게 된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도 이렇게 골몰하고 있으리라. 


 개인이 그저 하루하루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고, 가끔 뒤돌아보는 길에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은 최선의 선택지가 될 것이다. 다만, 국가적 차원에서도 아이의 생애주기에 따른 "UX적 정책"이 뒷받침되어야할 것 같다. 엄마아빠가 일을 관두면서까지 육아를 해야하는 환경에 무조건적으로 노출되는 것은 어쨌든, 이 출산율이 바닥을 기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기도 하니까. 이것이 내가 그렇게 고민하고 답을 내린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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