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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May 23. 2020

슬기로운 쀼의세계

요즘 다들 본다는 '쀼의세계'와 ‘슬의생'. 나도 봤다. 쀼의세계는 첫 화부터 충격적 몰입도에 정신 못 차렸으나 중간에는 시청 하차도 살짝 고민했었다. 너무 극단적 감정선들이 난무하는 게 힘들어서. 비현실적인데 또 현실적이어서 짜증 나고 슬프고. 물론 내용을 떠나 세상 침잠을 모두 품은 듯한 김희애의 얼굴과 그 신경질적 연기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는 충분히 볼 만했다고 생각하지만. 암튼 계속 보면서도 얼른 끝이 났으면 했다.


반면 슬의생은 한 회 한 회 지나는 것이, 끝나는 것이 그리 아쉬웠다. 실은 첫 화를 봤을 때만 해도 "뭐 이리 밋밋해" 했다. 전작 슬감빵을 워낙 재밌게 봤던 터라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다만 요즘 코로나19 최전선에 선 의료진에 대한 사회적 위상이 워낙 더 대단해지기도 했고, 최근 알게 된 남궁인이라는 응급의학과 의사의 글재주에 반한지라 의학드라마라는 자체에 흥미가 동해 그냥 계속 봤다. 보다가 빠지고 말았다. "와 인생 드라마다!"는 아니지만 "이건 무조건 시즌제야!" 하는. 그러니까 계속 보고 싶어지는 사람들, 이야기였단 얘기다.


두 드라마는 전개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쀼의세계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다들 유례없는 재난 상황에서의 지금 당장 내 일 아닌 남의 파국을 즐긴 것일까 싶을 정도로 갈등의 연속이다. 슬의생은 너무나 반대다. 갈등은커녕 긴장감이라고는 수술실 바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극을 이끌고 해결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당연히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보며 슬픔이나 분노보다 따뜻함을 더 많이 느끼고.


슬의생은 매 회 병원 내 다층적인 관계들, 의사-환자 관계뿐 아니라 의사-의사, 환자-가족 등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다. 하지만 이 모든 걸 관통하는 줄기는 하나다. “의대 동기생 다섯 명의 변함없는 찐우정!” 때론 가족보다도 살뜰하고 굳건한. 나는 그래서 슬의생이 더 현실에 있음 직한 에피소드를 다룸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직장 여성인 나에게 슬의생 같은 우정의 세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우선 치기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함께 추억할 수 있으면서 일에 대한 직업적 사명감까지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없고 - 직업이 워낙 천차만별로 다른 데다 비슷한 진로를 선택한 친구들도 경력이 댕강댕강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  무엇보다 거의 내내 붙어 있으면서 일상을 같이 할 수 있는 친구도 당연히 없다.


슬의생의 친구들은 현재 모두 싱글, 즉 비혼(미혼) 혹은 이혼 상태로 살고 있다. 이들의 우정은 이 때문에 지속 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싱글대디가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 매달리고 밴드 연습이라는 취미 생활을 유지하면서 큰 문제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물론 그건 약간 희망 같은 거니까 봐주고 넘어간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아름답기만 한 슬의생이 아닌 가끔 처절하기도 한 쀼의세계에 살고 있는 거다. 뭐 문제라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이따금 그립다. 남부러울 것 없던 우리들의 젊음이. 현실의 무기력함이나 박탈감과는 무관하던 꿈들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언제든 연락하면 나와주던 친구들이. 아무때고 전화해 푸념을 들어주고 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내던 내가.


그래서 그 많던 내 친구들은 다 어디 갔나 생각하고, 이내 또 깨닫는다. 어디 간 게 아니고 사실 다들 잘 살고 있겠지 하고. 나도 그러니까. 동시에 매일 새벽 6시면 어김없이 나를 먼저 깨우고 다시 눈을 붙이는 남편과 저녁 6시면 부랴부랴 저를 데리러 온 내게 엄마라고 밝은 미소로 달려와주는 딸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해서 특별함을 상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나 끊임없이 서로를 돌봐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사이. 친구끼리면 유난스러워도 가족끼린 남다를 것 없는 일이 되고 마니까.


이미 잘 알고 있다. 오랜 친구들과는 몇 년 만에 만나더라도 커피 한잔 하면서 묵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세 아무렇지 않아질 거라는 것. 그리고 집에 오면 내 가족이 그 자리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러니 일상에 늘 그렇듯 함께 있어주는 가족에게 뜬금없이 감사할 것. 가끔 그리운 친구들에게 뜬금없이 기별해볼 것. 오늘도 슬기로운 쀼의세계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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