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언젠가부터 "저이는 애가 없으니까 잘 모를 거야"라는 편협한 시선이 내 안에 자라고 있었나 보다. '무루'라는 필명과 그림책 안내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비혼 여성의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의 끝장을 덮고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좋았던 구절구절마다 줄을 쳤다. 그의 간명한 목소리가 뻗어 나온 그림책들도 모두 메모해두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목들은 베껴 써두었다. 그중 아이의 태생과 성장에 대한 아래 글이 정말 좋았다.
태어나지 않은 세계에 성장은 없다. 안락하고 평온하지만 그곳에서는 몸도 마음도 자라지 않는다. 고통도 슬픔도 없기에 기쁨도 행복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두 아이는 모두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온 용감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그 용기는 부모를 응원하고 위로한다. 아이의 탄생에 오직 부모의 의지만 개입했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모든 행불행은 부모의 책임이 된다. 부모의 미숙함과 세상의 불완전함은 아이를 돌보는 마음에 자주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좋은 부모가 아니라서, 부족한 게 많아서, 내 아이가 덜 행복하거나 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 나에게 와준 것이라면 부모는 씩씩해질 수 있다. 함께 힘을 내볼 수 있다. 아이도 용기를 내줬으니까. (중략) 아이들은 태어나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의 삶은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이들의 인생에 어떤 위험과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랄 것이다. 먹고 뛰고 구르고 다치기도 하면서 몸이 자라날 것이다. 그렇게 몸이 다 자란 뒤에는 몸이 아닌 것들도 자라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수없이 넘나들며 어떤 것은 허물거나 새로 짓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지도를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가능성'들을 발견하며 조금씩 자신을 완성해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태어나는 마음을 반복하며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경험은 오직 태어난 아이들의 삶에만 놓여 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나기로 결심한 아이들이다. 용감하게 알을 깨고 나온 모든 아이들의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무루|<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대학 때 한 진흥원에서 인턴으로 일한 적이 있다. 학과 조교수님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역할로 추천이 된 것이었는데, 게임 리터러시(game literacy)가 프로젝트 내용이었다. 당시만 해도 게임 셧다운제 시행 이전으로, 중독과 과몰입의 용어 정립 이슈부터 일방적 규제보다는 리터러시 교육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게임 자체에 전혀 흥미 없었기 때문에(이후 기자가 돼 게임업계를 2년 넘게 취재하게 된다...) 나로선 게임을 놀이와 나아가 미디어로 바라보고, 당사자뿐 아니라 양육자를 대상으로 이용 문화에 대한 사회 제도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담론이 매우 신선했다.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학교나 일선 현장에서 가이드로 활용할 수 있는 리터러시 교육 책자를 만드는 것이었고, 내용을 구성하기 위해 학자와 산업계 인사들의 토론을 여러 번 해야 했다. 이걸 기획(행사장 예약부터 토론집 인쇄, 다과 준비까지 잡다한 일)하고 기록(이라 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회의 일지 작성)하는 게 내 몫의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토론장에서 일이 발생했다. 패널들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 좌석에 한 무더기로 앉아있던 '엄마 군단'은 기다렸다는 듯, 나를 이 프로젝트에 추천한 조교수를 지목했다. 이내 질문을 빙자한 힐난. "당신은 애가 없잖아요. 우리 심정 모르잖아요." 그는 비혼 여성이었던 것이다. 그때 좌중에 흐르던 침묵. 냉소. 당혹감의 기운 같은 것은 잊을 수가 없다.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것 같은데 그 장면의 끝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그냥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당황스러울 뿐이다. 생각한다. 어느새 다섯 살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십 년 전 그날 연단 위와 아래 사이 그 어디쯤 서있을까. 나도 간혹 누군가를 결혼이나 자녀 유무의 '상태'에 따라 지레 판단하거나 존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부모가 되어봐야 진짜 어른이 된다는 말을 쉽게들 한다. 나도 그 말에 당연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던 것은 아닐까. "여전히 아내와 엄마라는 여자의 역할에 다른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세상에서(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나는 '정상가족’이라고 치부되는 사회 규범 내에 속해있다는 것에 어쩌면 안정감 이상으로 어쭙잖은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았나. 부끄럽게도 "결혼은 업적이 절대 아니고 열망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말이다.
정작 나는 매일 아이를 마주하면서도 어른이 좀처럼 되기 어렵다. 오히려 '내면아이'*를 계속 맞닥뜨릴 뿐이다. 물론 그 경험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내면아이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꼭 아이가 없더라도 다른 계기로 다른 순간에 마주칠 수 있는 것 아닌가. 설령 아이로 인해 내면아이를 발견하는 빈도가 높다고 해서 내가 성숙한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지 않은가.
*한 개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자리하는 아이의 모습
아이가 터전(어린이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다. 역시 비혼 여성이다. 나는 그가 나보다 내 아이를 모른다고 여기지 않는다. 아이가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향은 나로 비롯된 것이겠지만, 지금의 세계관은 그에게서 싹텄을지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아이에게 일상의 규칙과 노랫말을 가르쳐주고, 놀이와 관계를 확장해준 어른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선생님이 올 초에 병가와 안식월 사용으로 3개월을 쉬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개인적인 문자를 보냈다. "내 아이가 세상에 나와 부모와 가족 이외에 만난 첫 어른이 당신이어서 너무나 감사하고 복된 한 해였다"라고. 그는 내게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작년이 삶의 질문이 가장 많았던 해였다. 늘 복닥이고 긴장 속에서 살았는데 그 일 년을 잘 살았다고 격려해준 것 같아 위로받았다. 다정하게 곁에 있었던 아이에게 제가 더 감사하다"라고. 그 덕분에 내가 조금 어른이 된 것 같았다.
타인의 삶을 예단하고 충고하는 일이란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가. 나도 그들과 같은 시대를 통과했다. 기혼자들의 세상에서 성장해 어른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들 속에 섞여 살아가야 한다. 내가 아는 어른 중에는 비혼으로 사는 어른이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결혼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사는 방법 같은 것은 알려주지 않았다. 방법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이 선택에 대해 나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를 통과하는 동안 내 결정은 어디서도 제대로 존중받지 못했다. 나는 책으로 도망쳤다. (중략)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은 내가 태어나던 해에 출간되었다. 처음 읽은 것은 열 살 무렵이었는데 이가 빠져 슬픈 동그라미가 우여곡절 끝에 조각을 만나 둘이 행복하게 굴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생의 의미를 완성해 나가는 모험의 여정을 읽으며 어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런 그림은 나도 그리겠네. 스무 살이 되어 다시 꺼내 읽었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목이 다른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같은 책이었다. 다시 읽어본 진짜 이야기는 이랬다. 이가 빠져 슬프지만 혼자 행복하게 잘 사는 동그라미가 있었다. 꽃 향기도 맡고 나비를 만나면 목말도 태우고 노래를 부르며 혼자 데굴데굴 굴러다니던 이 동그라미는 조각을 찾기로 결심하고 긴 여정을 떠났다. 실패가 반복되었고 떠나던 날의 기대가 거의 바닥날 즈음 동그라미는 마침내 꼭 맞는 조각을 만났다. 기쁨에 차서 함께 굴러가게 된 완벽한 동그라미. 그러나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구르게 된 것이다. 빨리 구르니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동그라미는 애써 찾은 조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가 빠진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 다시 꽃향기를 맡고 나비를 목말 태우고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굴러갔다. 무루|<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ps. 책에 등장하는 귀인 S씨, 제게도 귀인이십니다. ㅋㅋ 이 책 읽게 해주어서 정말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