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telmen Jun 19. 2019

공동육아 100일

어린이집에서 신입조합원 100일 잔치를 열어줬다. 대단한 잔치는 아니고 그냥 놀이터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얘기도 하고, 짝손(멘토 같은 가족) 조합원과 김밥도 먹고 아이들 노는 것도 구경하고 뭐 그런.


부모 출자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공동육아어린이집은 부모(아빠 엄마의 줄임말, '아마'라고 부른다)가 하는 일이 많다. 일 년에 세네 번가량 (아마 중 돌아가며) 일일 교사 활동도 해야 하고 (교사의 연차 휴가 보장을 위함), 격달에 한번 소청소, 반기에 한번 대청소와 조합원 교육, 각 분과 모임(재정, 홍보, 운영, 교육, 조직, 시설 등 여러 소위가 있고 모든 아마가 각각 참여함)과 방 모임(‘반’이 아닌 생활의 공간으로의 ‘방’이라 칭한다)도 달에 한 번씩 있다. 그밖에 모꼬지, 개원잔치, 마을축제 등의 행사는 물론 이날 자리처럼 틈틈이 있는 날을 꼽으면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모임이다.


그런 아마들의 분주했던 100일간 노고를 치하하며 선배 조합원들과 케이크를 잘랐다. 아이의 생후 100일은 정말 놀라운 날의 연속이었는데, 나는 부모로서 최근 100일 동안 얼마나 자랐는지 짧게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한줄평 : 정신없고 피곤했다.

추가 한줄평 : 그래서 좋았다.


전에 보내던 일반 어린이집은 그냥 현관에서 아이를 들여보내고 다시 현관에서 아이를 찾아가는 그야말로 위탁의 장소였는데, 공동육아어린이집(생활터전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끼린 '터전'이라 부름)은 아마의 드나듦이 일상이다. 그러니 아이 또한 어린이집이 아마와 무턱대고 격리되는 장소가 아니라 언제든 함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듯하다. "엄마 아빠와 헤어짐은 아쉬워도 어린이집이 가기 싫은 곳은 아니"라는 것이 매일 밤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더군다나 다른 또래의 아마들이나 교사들도 별칭으로 부르고 평어 사용을 하는 공동육아를 통해 아이는 낯선 어른에 대한 경계를 낮추고 더 넓은 세계를 품게 된 것 같다.


단지 맡겼다가 내 아이 이름을 '호출'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생활하는 공간에 내가 함께 하고, 마주치는 아이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부르고 눈 맞추면서 나 역시 공감의 지평이 더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는 '마실(다른 친구 집에서 놀거나 자는 활동)'도 먼저 시도했다. 시터 등 다른 도움 없이 퇴근 후 직접 하원 시키다 보니 어린이집에 가면 저녁 6시가 꼬박 넘는데, 남아 있는 아이는 이현이를 포함해 꼭 둘 아님 셋 뿐. 이 중 우리 아이가 두 번째로 가게 되는 날이면 매번 마지막으로 남는 아이가 늘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아이 엄마에게 연락한 뒤, 아이 둘과 내 가방 셋을 어깨에 둘러메고 양 손에 애들 손을 꼭 잡고 집에 왔다. 아이들이 방에서 노는 동안 뻘뻘 거리며 밥도 차렸다. "웬걸! 내가 이걸 즐기고 있다니!"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진아, 우리 집에 같이 갈래? 가서 밥 먹고 있음 엄마가 오신대" 하니 평소 뚱한 표정에 말수가 적어 보이던 아이가 "좋아!” 하며 빙그레 웃던 얼굴, 같이 걸어오면서 “하늘 좀 봐! 구름빵이야!” 조잘거리던 것이 훤하다. 이현이도 아직은 또래의 친구와 같이 역할놀이를 제대로 하기보다 따로 어울렸지만 집에 터전 친구가 놀러 왔다는 사실만으로 설레는 표정이 가득했다.


지난달에는 같이 공동체주택을 짓는 멤버들과 교외에 1박으로 모꼬지도 다녀왔다. 3살부터 10살까지 7명 아이들이 한데 모여 놀면서 서로의 돌봄이 가능한 것을 보면서 ‘함께 살기’를 선택한 것에 다시 확신을 가졌다. 사실 나는 내가 자라면서 부모에게 공동체적 삶을 강요당했다는(?) 약간의 피해의식을 오래 갖고 있었는 데다 생각보다 훨씬 개인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공동육아를 비롯한 커뮤니티의 한 복판에 나를 내던질 줄은 정말 몰랐다. 타인 안 믿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남편은 말해 뭐해.


우리가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은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안전망으로써의 거주 환경, (연결돼 있는) 집과 동네다. 아이의 일상적인 삶은 집에서, 동네 친구 집에서, 자주 가는 시장에서, 종일 있는 어린이집에서 분절돼 있는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니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유리되지 않는 삶. 이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는 잘 안다. 마을 1세대 아이들이 어른들이 열어준 성인식에서 “마을 어디에나 CCTV가 있었다”고 웃으며 토로했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닐 거다.


“아이가 따뜻한 가족 '품' 이외에도 또래의 친구들과 좋은 어른들 '틈'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기” 바라는 마음 하나로 애쓰고 사는데, 아이가 나중에 우리를 원망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든다. 결국 우리가 똑바로 잘 살아야 하는 것이겠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공동체에 우리 먼저 제 몫을 하면서 살자. 다함께 살면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엄마 아빠는 네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짝손에게 받은 100일 축하 카드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집 이름은 오르막이에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