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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telmen Aug 22. 2019

어느덧 5주기

나의 할머니, 손순련

2013년 8월, 강원도 영월. 페이스북이 6년 전이라며 알려줬다. 어여쁜 나의 멋쟁이 할머니.

2009/04/13


오빠를 데리고 집에 갔다.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손녀의 '귀한' 남자친구와 함께 식사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둘이 잘 의지하고 만날 수 있게 축복해달라는 요지의 기도를 했다. 예수 안 믿는 오빠와 덜 믿는 내게도 '은혜로운' 기도였다. 오늘 그가 점심에 밥을 먹으면서 할머니의 기도가 생각났다고 했다. 고난의 일주일이 끝나고 예수가 부활했다는 오늘의 의미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2014/04/22


할머니가 자꾸 구부정해진다. 꼿꼿한 허리 하면 울 할머니였는데. 작년에 선물했던 옷이 올봄엔 커서 나풀나풀 댄다. 계속 앙상해진다.


2014/07/14


지지난 주말, 이모네 식구들까지 모여 식사를 했다. 루하, 도하 꼬마들까지 딸린 사촌언니네도 오랜만에 왔는데 남들에게 '꼴'을 보이기 싫다며 외출 안 한다고 어린애처럼 고집부리다 나한테 끌려 나오다시피 한 할머니는 이날 아가들을 보곤 연신 싱긋 방긋 웃었다. 그리곤 갑자기 울었다. 그 울음을 바로 이해한 건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진 엄마와 나뿐이었다. 할머니는 아마도 이제 다신 아이들을, 또 이렇게 다 같이는 보기 힘들 것 같단 생각을 한 것 같다.


2014/08/25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다신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입원병원에선 요양병원으로의 이동을 권했다.


2014/08/26


흐느껴 울었다. 할머니를 보고 나와 엄마에게 가는 길이었다. 유민이 아빠의 팔다리 사진을 보면서 슬프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의 몸뚱이를 보니 슬프다는 것은 이것이겠구나 생각했다. 관념적 슬픔과 실체적 슬픔은 가슴을 치는 무게가 달랐다. 의사는 수술한 엉덩이 뼈는 잘 붙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 제 힘으로 일어나 걸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계속 지켜봐야 한다는 말 뿐이다. 누워서 옴짝달싹 못하고 병실 천장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코에는 호흡기를 꽂고 배 밑으론 요도관을 꽂은 팔순의 여자는 어떤 생각이 들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 울음이 터졌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의 어머니'


2014/09/12


연휴 동안 할머니 몸에 남은 물이란 물은 다 빠진 듯, 아예 뼈밖에 안 남았다는 엄마 말을, 어제 보고 이해했다. 할머니 다리가, 무릎과 발목이 모두 내 작은 손아귀 안에 잡혔다. 산송장이라는 말이 번뜩였다. 누워있는 것도 힘겨운 듯 숨을 쌕쌕 쉬었다. 그리곤 어린애처럼 나를 보며 울어대기 시작했다. 울음은 갈라진 목소리 틈으로 숨소리와 섞여 간신히 내뱉어졌다. "할머니 힘들어" "짜증 나" "다 귀찮아" "너도 귀찮아" "가" ... "천국에서 부른다" 한 달 전, 영정사진을 준비하자던 아빠 말을 들을 때 "그래, 준비만"했던 것이 이제 오롯이 받아들여졌다. 운전하고 돌아오는 길, 눈앞이 흐릿해져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2014/09/25


#임종

빠르게 몰아쉬던 숨을 천천히 나누더니 입을 벌린 채 멈췄다. 더 이상 자가 호흡이 없는데 할머니 인공 심장 박동기가 보내는 전기 신호 때문에 심장 박동 측정기의 그래프가 일직선이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렸다. 속 썩이던 심장이 할머니를 몇 분 더 살렸다. 9월 22일 오후 1시 28분. 의사의 사망신고.


#장례

교회를 떠나 할머니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이틀 내 나눠서, 또 같이 할머니에게 인사를 왔다. 할머니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다 모였으니, 좋았겠다 할머니. 상을 치르며 할머니의 배 다른 남동생을 처음 보게 됐다. 나와 할머니 사이엔 누구도 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할머니의 혈육도 모른다. 나는 할머니를 할머니로 알아서 할머니가 할머니이기 전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할머니는 나의 스물아홉 해 인생을 모두 아는데, 나는 할머니 팔십셋 인생에서 고작 1/3도 안 되는 시간을 알 뿐이고, 그마저도 군데군데 모르는 것 투성이다.


#입관

할머니의 식은 몸을 내려봤다. 곱게 화장을 했는데, 눈물 콧물 닦다가 더러워진 손으로 차마 그 고운 얼굴을 훔칠 수 없어서 이마만 쓰다듬고 말았다. 그게 너무 후회돼.. 차게 얼어붙은 눈코입 따뜻하게 만져줄걸.


#발인

35여 년 전 남편을 잃은 여자가 이제 그 옆에 묻히고 그때 아빠를 잃었던 딸들은 그 여자의 나이가 되어서 어미를 마저 보냈다. 장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생리혈이 시작됐다. 월요일부터 몸이 이상했는데, 늘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일이 끝나자마자 피가 도는 것이다. 그것도 상복을 벗자마자 터져 나왔다. 몸이 다 안다.


#일상

할머니를 보내고 원효로 할머니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 침대에서 엄마와 누워 잤다. 저녁이 다 돼 깼다. 집으로 가서 옷가지를 챙기고 맡겼던 병원서 하루를 찾아 다시 원효로로 돌아왔다. 엄마는 여전히 자고 있다. 하성이와 하루를 산책시키러 나갔다. 들어와 하루를 씻기고 나도 씻고 누웠다. 엄마는 계속 잔다.

2019/08/22


페이스북이 6년 전 할머니와의 마지막 여행 사진을 보여줘 알았다. 할머니를 떠나보낸지 어느덧 5주기라는 사실을. 애석한 일이다. 할머니는 죽어서 묻히면 더 외로울 것 같다고 참 많이 슬퍼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참 호기롭게도 말했지. 자주자주 보러 가겠다고. 걱정 말라고. 아이 낳고 일하고 아이 키우며 일하고. 뭐가 그리 바쁘고 힘들다고 이토록 오래 못 갔을까. 할머니를 보낼 때 아빠가 썼던 사모곡이 실린 책이 최근 출간됐다. 한 권 가지고 울 할머니 보러 가야겠다. 고매하게 살아오신 길,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작별

나 이제 갈란다
가망 없는 목숨 억지로 연명하는 것
다 부질없는 일이니
묶여 있는 굴레 모두 풀어다오
몸 안의 온기 다 풀어지기 전에
사랑하는 자식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더 쓰다듬고
이제 돌아갈란다
가도 가도 끝없던 충청도 영동
황점 열두 고개
걸어 시집가던 날
사는 것이 이리 굽이굽이
열두 고개 같은지 어찌 알았겠냐
그렇다고 힘들다고 사는 게 별거더냐
조금씩 더 참고 모진 말은 하지 말고
서로 위해가며 살거라

어머니
평생 이고 진 무거운 짐 내려놓고
이제 밝은 하늘에서 편히 사세요
살아오신 굽이굽이 험한 길
그 수고 덕분에
저희들 사람 노릇하고 삽니다
어젯밤 꿈에서 환하게 손 흔드시더니
오늘 우리 모두 모여
가시는 길에 능소화 한 송이 바치오니
고매하게 살아오신 길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 세상에 두신 미련과 염려
이제 내려놓으시고
하늘 가는 길 힘들다지만 샬롬
평안히 가세요

<전종호|가벼운 풀씨가 되어도 좋겠습니다>


할머니의 일기. 알알이 내 가슴에 박혀 있는 활자들.


가끔씩 나는 아파트 창밖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안드레아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한다. 늘씬한 청년이 회색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처럼 저 아이의 마음속에도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가 있겠지만, 상상에 그칠 뿐 그 안에 들어가 수는 없다. 버스가 도착한다. 아이의 뒷모습이 버스 안으로 사라진다. 버스가 떠나자 텅 빈 길가에는 우체통만 덩그러니 남는다. 나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깨닫고 있다. 나의 외로움은 어쩌면 또 다른 뒷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박사학위를 받고 타이완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강의 첫날, 아버지는 사료를 나를 때 쓰던 낡고 작은 트럭을 몰고 학교까지 나를 데려가 주셨다.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학교 정문으로 가지 않고 옆문이 있는 좁은 골목에 차를 세웠다. 아버지는 손수 짐을 내려주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고 창문을 내리고는 얼굴을 내밀고 말씀하셨다. "이 차는 대학교수가 탈 만한 차가 아닌데, 너한테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초라한 트럭이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려 털털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만 남긴 채 골목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트럭이 안 보일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옆에 짐을 부려둔 채로.

주말마다 병원으로 아버지를 찾아뵌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산책을 하다 보면, 아버지는 어느 틈엔가 잠이 들어 고개를 가슴께로 떨어뜨리곤 했다. 가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가 배설물로 흠뻑 젖을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손수건으로 바지를 닦아냈다. 그런 날에는 치마에 배설물을 묻힌 채 타이베이로 출근해야 했다.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넘긴 후 나는 핸드백을 들고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휠체어가 자동 유리문 앞에 잠시 멈춰 서더니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나무관이 마치 크고 무거운 서랍처럼 천천히 화장장 아궁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아궁이에서 채 오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는 줄은 몰랐다. 가랑비가 바람에 날려 회랑 안으로 들이쳤다. 비에 젖어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도 나는 눈을 떼지 않고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이 순간을 영원토록 눈 속에 담으려는 듯.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해해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부모와 자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점차 멀어지는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 우리는 골목길 이쪽 끝에 서서, 골목길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 뒷모습이 당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따라올 필요 없다고. <룽잉타이|눈으로 하는 작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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