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여겨보던 텐트가 일본에 있었다. 관세를 물어가며 수입한 텐트를 구입하기보다는, 부가세까지도 환급받을 수 있으니 현지에 가서 사는 편이 낫지 싶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써왔던 백패킹용 텐트가 아닌 면혼방 소재의 TP텐트를 구입한다면 현지에서 피칭을 해보고 싶어졌다. 15Kg이 넘는 무게의 텐트를 들고 다시 일본으로 가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일본의 캠핑장이라면 나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있던 후모톳파라 FUMOTO PPARA로 가야만 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여행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동반자들을 모집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캠핑장을 예약하고 렌터카를 빌렸다. 코로나 이후의 첫 해외여행 준비는 남은 두 주의 시간으로 충분했다.
오랜만의 국제선 탑승은 약간의 긴장감 마저 들었다. 나리타 공항에 내려 나리타 익스프레스에 올라타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오랜만에 찾은 도쿄의 밤은 여전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 최대의 아웃도어 용품점 WILD-1에서 예약 구매한 텐트를 렌터카에 실었다. 우리와는 반대로 오른쪽에 앉아 운전하는 일이 어색했지만 도쿄 시내를 벗어날 즈음 어느 정도 적응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고속도로 너머 거대한 산이 내게 달려들었다. 그 산은 가깝고 먼 곳에 산개한 일대의 모든 산들을 압도했다. 서풍에 실려온 구름이 산중턱에 걸려 넘지 못한 채 그곳에 오래 쌓인 눈과 부딪혔다. 일본 최대 최고의 후지산. 수많은 신들이 살아 그보다 더 많은 전설과 신화를 낳은 산. 높고 흰 눈을 거칠게 덮은 채 언제 터질지 모를 활화산.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호흡이 가파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후모톳파라 캠핑장은 후지산의 자태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게나시산毛無山 기슭에 자리했다.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목초가 깔린 평야 그대로가 캠핑장이다. 캠퍼들은 구획이 나뉘지 않은 드넓은 초원 여기저기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텐트를 세웠다. 캠핑장 내에 도로가 나 있지만 자동차로 목초지 내로 운전해 들어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피칭했다. 좁은 땅에 파쇄석을 깔고 흰 끈으로 칸막이처럼 선을 그어놓은 우리 캠핑장들과는 사뭇 달랐다. 캠핑장 내 어디에 텐트를 피칭하든 시야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후지산을 느끼고 조망할 수 있었다. 아니 이곳이 바로 후지산이었다.
운이 나쁘면 이곳에서 며칠을 지내도 궂은 날씨 탓에 후지산을 못 보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행히 내가 도착한 날엔 날씨가 청명했다. 낮에는 산의 주름 같은 계곡을 읽을 수 있었고 밤엔 산의 실루엣이 선연했다. 다양한 텐트들 사이로 이번에 내가 구입한 것과 같은 텐트마크디자인의 서커스 TC 류의 텐트가 많이 보였다. 현대의 유목민들은 걷거나 모터바이크나 승용차를 이용해서 후지산 아래에 둥글고 뾰족한 집을 지었다. 산을 숭배하는 성지의 순례자들을 후지산은 엄격하거나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높은 산 아래는 기온이 뚝 떨어졌고 수백 동의 텐트들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사이트의 구분 없이 유목민들 사이로 깔렸고 숲으로 흩어졌다. 캠핑장에서는 인근의 숲에서 벌목한 나무를 거칠게 쪼개어 판매했다. 편백나무를 화로대에 얹어 불을 붙이자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몸을 감쌌다. 시나가와의 마트에서 준비해 온 와규를 굽고 사케를 따끈하게 데워 먹고 마셨다. 시간을 투자해 자유를 얻은 후모톳파라는 도시인들의 도피처이자 해방구였다. 밤이 깊자 적당한 취기로 몸과 마음의 온도를 높인 이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함부로 서로의 텐트를넘나들었다.
우모복 바지와 경량패딩을 겹쳐 입고 비니를 눌러쓴 채 텐트 밖을 나섰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본다. 북알프스에서 시작된 빼곡한 별들이 은하수를 이뤄 후모톳파라 하늘을 채우고 외롭고 높은 후지산 너머 먼 태평양으로 향했다. 밤하늘에 박힌 별들은 스스로를 밝혀 웅장한 후지산을 조명했고, 산아래 사람들은 랜턴과 스토브로 각자의 텐트를 밝혀 불야성을 이뤘다. 나는 흥분했다가 이내 평온해졌으며 자유를 느꼈다. 여기 성지에 온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으리라 믿는다.
후모톳파라 인근에 캠핑용품 대여점이 있어서 텐트와 조리도구 난로 등을 빌릴 수 있었지만 우리가 머무는 기간에 대여점은 휴가였다. 작은 스토브 하나만 켜둔 채로 침낭 깊숙이 몸을 파묻고 밤을 보냈다. 아침엔 날이 흐렸고 텐트 위로 빗물이 떨어졌다. 구름이 낮게 깔렸고 캠핑장 뒤편 높은 숲에는 상고대가 하얗게 피었다. 후지산은 우리에게서 모습을 감췄고 비는 눈으로 바뀌었다. 짧은 하루에 맑은 하늘과 더불어 눈 비를 경험했으니 삼계절을 보냈다고 과장해 본다.
캠핑장 화장실에는 변기마다 비데가 설치돼 있어서 쾌적했다. 사슴고기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에는 후지산만한 유리창이 시원하게 뚫렸다. 점심은 그곳에서 먹었다. 사슴고기는 부드럽고 고소했다. 이곳에서 며칠밤을 더 머물렀다면 캠핑장 내 심야식당에서 사케를 한잔 곁들였으리라. 일본에서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후지산이 잘 보이는 근방의 어느 호숫가에서 또 텐트를 쳤으리라. 아쉬움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부르는 유혹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