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아이>와 <로봇 드림>을 중심으로
영화는 기술의 발전과 연관이 깊다. 사실 영화 자체가 기술의 산물이다.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세상은 기술적 재현으로서의 예술이자 현실이다. 그 기원은 벨기에의 물리학자 조셉 플라토가 1832년에 발명한 페나키스티스코프(phenakistiscope)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판을 회전해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만드는 광학 기구다. 잔상효과를 극대화해 정지된 이미지에 운동성을 부여한다. 이후 개선된 페나키스티코프가 나오는데, 바로 영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머이브리지의 주프락시스코프(zoopraxiscope)다.
머이브리지는 말이 달리는 트랙 위에 수십 대의 카메라를 설치했다. 카메라에 실을 연결한 후 달리는 말이 트랙 위의 실을 끊을 때마다 카메라 셔터가 열리도록 했다. 쉽게 말해 주프락시스코프는 사진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촬영 장치다. 머이브리지는 이를 통해 달리는 말의 모습을 정적인 사진이 아닌 동적인 영상으로 만들었다. 이후 토머스 에디슨은 1889년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기계를 세상에 내놓는다. 한 번에 한 명의 관객만이 관람 가능했던 이 장치는 확대경 뒤로 피사체의 단조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기계다.
키네토스코프의 대중화 버전이 바로 시네마토그라프(cinématographe)다. 1894년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이 기계는 초당 16 프레임의 정지화면을 빛을 통해 투사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미지를 재현했다. 한 명의 관객만이 관람 가능했던 키네토스코프에 비해 많은 사람이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됐다. 시네마토그라프는 본격적인 영화의 탄생을 알리는 기계였다. 1895년 파리의 그랑카페에 앉은 사람들은 정지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눈을 크게 뜨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앙마뉘엘 툴레의 책 『영화의 탄생』에는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당시 영화를 봤던 한 신문기자의 소회가 담겨 있다. 그 기자는 “언젠가 모든 대중이 카메라를 소유한다면, 그래서 자신들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면, 죽음이 가진 완결성 또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카메라는 죽음을 비의적으로 연장하는 도구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술적으로 인간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지만 재현된 양상은 매우 신비스럽다. 죽은 배우가 영화 속에서는 영원한 삶을 사는 것처럼.
동화 속 이야기를 믿었던 <에이 아이>의 데이빗
스티븐 스필버그의 <에이 아이>(2001)에서 로봇 회사에 근무하는 허비 교수는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개발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섹스 로봇이 아니다. 그가 개발하려는 로봇은 순수한 마음으로 부모를 사랑하는 아동 로봇이다. 다시 말해 자식 잃은 부모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는 반려로봇이다. 허비 교수는 이 반려로봇을 ‘꿈꾸는 로봇’으로 정의한다. 꿈꾸는 로봇이란 동화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존재다. 현재를 초월해 미래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을 체득한 로봇 데이빗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데이빗은 허비 교수와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헨리와 모니카의 집에 입양된다. 부부의 아들 마틴이 병으로 5년 동안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 모니카는 처음에 데이빗을 거부하지만,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고 그를 아들로 받아들인다. 엄마를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데이빗은 시종일관 모니카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모니카는 마틴이 가지고 놀던 슈퍼 장난감 테디를 데이빗에게 보여준다. (아마도 같은 로봇이니까) “서로 잘 통할 거야”라는 모니카의 말에 테디가 대답한다. “난 장난감이 아니에요.”
데이빗과 테디의 차이는 무엇일까. 테디는 “난 장난감이 아니에요”라는 말 정도로 자신을 규명한다. 이에 반해 데이빗은 로봇이 아니라는 부정을 넘어 인간이길 지향한다. 인간이 되어 엄마를 사랑하고 싶다는 지향. 다시 말해 데이빗의 의식이 인간이라는 대상을 향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지향적 태도는 심적 현상의 본질이기도 하다. 꿈을 꾸고, 동화를 믿으며, 희망을 품는 행위.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이 같은 행위가 테디와 데이빗을 분리하면서 <에이 아이>의 드라마를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든다.
마틴이 극적으로 생환하면서 영화는 변곡점을 맞는다. 마틴은 데이빗에게 ‘너는 로봇’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혼란스러운 데이빗은 모니카가 마틴에게 읽어주는 동화 『피노키오』를 듣고 꿈을 품는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더 이상 나무인형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진짜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모니카의 음성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서서히 다가가면서 희망 섞인 데이빗의 표정을 포착한다. 이 순간 데이빗에게 가까워지는 것은 카메라뿐만 아니라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희망 그 자체이기도 할 것이다.
의도치 않게 데이빗이 몇 차례 실수를 저지르자 모니카는 그를 숲 속에 버린다. 이후 영화는 인간이 되길 희망하는 데이빗의 로드무비로 전환한다. 뉴욕 맨해튼의 어느 바닷속에서 푸른 요정을 만난 데이빗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빈다. 카메라는 그런 데이빗의 모습을 다시 한번 서서히 다가가는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데이빗이 재차 읍소하자 반대로 카메라는 그로부터 서서히 멀어진다. 데이빗은 바닷속에서 기도하다가 그대로 얼어버린다. 그리고 2000년이 흐른다. 데이빗은 인간이 되지 못한 피노키오일까.
영화는 2000년 뒤 빙하기가 도래한 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류는 멸망하고, 전보다 진화한 로봇들만 남았다. 로봇들은 데이빗을 구조하고, 그가 행복했던 기억을 추출해 가상 세계를 만든다. 데이빗을 통해 죽은 인간을 재창조하는 연구를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재생한 인간이 하루밖에 살지 못하면서 연구는 실패로 돌아간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모니카를 대면할 것인지 묻는 로봇의 질문에 데이빗은 “엄마는 다를지도 몰라요”라고 말한다. 이때도 카메라는 데이빗을 서서히 다가가는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에이 아이>에는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영화의 마지막, 모니카와 함께 잠든 데이빗의 모습을 카메라는 서서히 멀어지는 움직임으로 포착한다. 이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꿈의 본질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인간은 꿈을 완전히 움켜쥘 수 없다. 꿈은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며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어린아이로 만들어져 꿈과 희망 그리고 동화적 이야기의 가능성을 믿었던 데이빗을 카메라는 그렇게 담아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로봇 드림>이 꿈과 현실을 다루는 방식
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2024)은 도그와 로봇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세계에 인간은 없다. 하지만 뉴욕 맨해튼이 배경이다(공교롭게도 <에이 아이>에서 데이빗이 푸른 요정을 찾아가는 장소도 맨해튼이다). 맨해튼에는 갖가지의 동물들이 인간처럼 살고 있다. 모두 짝이 있고, 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도그 옆에는 아무도 없다. 그는 2인용 게임을 혼자 하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외로운 독거 강아지다. 그러다가 우연히 반려로봇 광고를 보고, 로봇을 식구로 맞는다.
도그와 함께 산책을 나온 로봇은 신기한 듯 세상을 바라본다. 로봇의 얼굴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도그는 그런 로봇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둘은 함께 나룻배를 타고, 핫도그를 먹으며, 스티커 사진을 찍는다. 도그는 혼자 했던 2인용 게임을 로봇과 같이 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다가 영화는 도그와 로봇이 해변에서 불의의 사고로 헤어지며 변곡점을 맞는다. 작동 오류로 인해 움직이지 못하는 로봇은 해변에 누워 도그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도그는 로봇을 구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로봇은 도그와 떨어져 있으면서 세 번의 꿈을 꾼다. 모두 도그를 만나러 가는 꿈이다. 첫 번째 꿈에서 로봇은 도그의 현관문을 두드리지만, 도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두 번째 꿈에서 로봇은 도그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로봇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슬퍼한다. 세 번째 꿈에서 로봇은 도그의 집이 붕괴해 자신을 덮치는 꿈을 꾼다. 로봇은 꿈에서 한 번도 도그를 대면하지 못한다. 꿈이라는 희망의 세계를 탐험하면서 종국에 로봇이 깨닫는 게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헤어져 있는 동안 도그와 로봇은 각기 다른 존재들을 만나며 성장한다. 어느 날 로봇 곁에 어미 새가 둥지를 튼다. 세 마리의 새끼를 낳는데, 혼자 주황색 얼굴로 태어난 새끼가 있다. 주황색 새끼만 제대로 날지 못한다. 로봇은 입 모양(⌃→⌄)을 통해 날갯짓을 가르친다. 비행을 배운 새들이 떠나자 로봇은 만남과 헤어짐의 순리를 깨닫는다. 그것은 도그 역시 마찬가지다. 로봇과 헤어진 뒤 도그는 오리 친구를 사귀지만, 오리 역시 다른 곳으로 떠난다. 이후 도그는 다른 로봇을, 로봇은 다른 동물을 만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로봇은 도그가 다른 로봇과 길거리를 걷는 장면을 목격한다. 카메라는 그런 로봇의 표정을 서서히 다가가며 포착한다. 이후 도그와 로봇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장면들이 나열되고, 다시 한번 카메라는 도그를 바라보는 로봇의 얼굴을 서서히 다가가는 방식의 줌 인(zoom in)으로 포착한다. 다음 장면에서 로봇은 도그에게 달려가는데, 이는 현실이 아닌 로봇의 상상 속 장면이다. 상상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장면 분할을 통해 각기 다른 장소에 있는 도그와 로봇의 춤을 재기 발랄한 편집을 통해 이어 붙인다.
영화와 현실, 로봇과 인간
미래사회를 움직이는 첨단기술이 사회, 경제, 문화 등 전 분야에 확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봇과 인공지능을 재현하는 영화 역시 많아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영화는 예술이면서 기술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로봇들도 그렇다. 그들은 가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관객들은 그들을 진짜라고 여긴다. 관객들은 가짜(혹은 진짜)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보이는 등 감정적 변화를 경험한다. 원래 극장이란 그런 것이다. 예술과 기술, 진짜와 가짜가 혼합된 공간. 거기에서 영화는 현실이 되고, 로봇은 인간이 된다.
인간에게 삶은 그저 주어져 있지만, 로봇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태어난다. 이를 명료하게 설명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장 폴 사르트르의 논의가 유용할 것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선택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진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선택이라는 행위를 한다. 이에 반해 로봇의 삶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다. 로봇은 ‘인간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해 태어남을 당한다. 그러나 <에이 아이>와 <로봇 드림>의 로봇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선택하는 존재들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로봇들이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에서 장난감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세계관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인간의 세계가 있고, 장난감의 세계가 있다. 하지만 나는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보면서 조금 이상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장난감인 우디가 인간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인간인 앤디가 그를 친구처럼 대했기 때문이라는 생각.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 역시 마찬가지다. 배구공에 지나지 않는 윌슨에게 인격을 부여한 것은 무인도에 떨어져 외로움에 허덕이던 인간이었다.
영화는 허구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는 동안 스크린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현실로 착각한다. 영화라는 기술이 현실의 잠재태로 기능하는 것이다. <에이 아이>와 <로봇 드림>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기술에 의해 창조됐지만, 인간처럼 행동한다. 인간처럼 꿈을 꾸고, 희망을 믿는다. 영화가 또 다른 현실이라면, 로봇은 또 다른 인간이다. 관객들을 또 다른 현실로 인도하는 카메라는 또 다른 인간에게 천천히 다가서기도 하고, 물러서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비의적으로 영화는 현실이, 로봇은 인간이 된다.
기획회의 609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