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소녀>와 <기쿠지로의 여름>을 중심으로
최근 김원영의 신간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을 읽었다. 이 책은 춤에 관한 저자의 경험과 춤의 역사를 통해 차별과 평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장애인의 신체로 살아가는 저자가 춤과 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차별과 평등의 관계성을 탐문한 책이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자유롭고 활동적이며 거리낌 없는 몸짓이 주는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했다. 특히나 인상적인 부분은 ‘행동의 원천’을 서술하는 대목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인간의 몸은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되는’ 편에 가깝다. 저자는 이것을 ‘내가 행동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신을 차리면 두세 시간이 이미 지나있고, 온몸이 쑤시고 피로가 몰려온다. 그럼에도 머리를 흔들어 털며 그 순간을 돌아볼 때 어느 때보다 선명한 ‘나’가 존재했다는 기분이 든다. 내가 내 행동의 원천이 아니라고 생각된 그 시간 동안, 나는 가장 나로서 존재했다는 느낌. 그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 대목을 읽고 콤 바이레드의 <말없는 소녀>(2023)에서 코오트가 숀에게 달려갔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친부모보다 자신을 환대하며 애정을 준 숀과 헤어지기 싫었던 어린 소녀 코오트는 그에게 달려간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졌다. 달리는 순간에 코오트는 누구보다 코오트로 존재했다.
<말없는 소녀>, 코오트의 달리기
내가 인식하는 아이들의 이미지는 활력으로 가득하다. 살아 움직이는 힘이 유독 아이들에게 몰려 있는 것 같다. 가감도, 거침도 없이 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거짓을 말해도 언어가 투명해서 마음이 훤히 보인다. 그래서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를 보면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간다. 내가 <말없는 소녀>에 마음이 쓰인 이유는 코오트가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이 많지 않다. 다만 해야 할 말은 하는 아이다. 성숙한 어른도 하기 힘든 적절한 경청과 말하기를 어린 소녀는 수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 수행은 기특하기보다 쓸쓸한 분위기를 풍긴다. 코오트의 가난한 환경 때문이다. 가난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코오트의 부모를 보면 가난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가난에 억눌린 인간의 표정에는 여유와 윤기가 없다. 딱딱하고 메말랐다. 태어난 이후 건조한 표정과 메마른 언어들만 접한 코오트. 그의 얼굴을 카메라가 가까이에서 포착할 때마다 마음에는 비애감이 차올랐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노인의 흐릿한 눈빛이나 퇴근길 중년의 축 처진 어깨가 아닌 말없는 아이의 얼굴을 통해 삶의 비애감을 드러낸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풀숲에 몸을 숨긴 코오트를 보여준다. 그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킬 때,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몸을 이끌고 코오트는 집으로 간다.
영화에서 코오트가 처음 입을 여는 순간은 학교에서다. 그는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읽으며 “슬픔이 엄습했다”라고 말한다. 코오트에게 가난이 그럴 것이다. 그는 뜻하지 않게 가난으로부터 습격당했다. 수업이 끝난 다음 장면에서 코오트는 교실에서 뛰노는 친구들에게 부딪혀 옷에 우유를 쏟는다. 영화는 가여운 소녀가 마음 편히 우유를 먹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 코오트가 여름방학 동안 출산을 앞둔 어머니의 부담을 덜기 위해 친척 집에 맡겨진다. 그들은 넉넉한 중산층 집안의 숀과 에이블린이다. 두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었다. 그들은 코오트를 여름방학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아이를 뜻하는 동(童)이라는 한자는 마을(里) 위에 서다(立)의 뜻이 결합한 단어다. 아이들은 마을에 서 있는 존재다. 아이를 뜻하는 또 다른 한자인 동(重)에 힘(力)을 붙이면, 움직임(動)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이 같은 뜻을 어지럽게 정리하면, 아이는 마을에 서서 움직이는 존재, 즉 뛰노는 존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코오트가 달리는 장면에 있다. 달리기를 잘하는지 묻는 숀의 질문에 코오트는 우체통까지 거침없이 질주한다. 카메라는 그런 코오트를 슬로 모션으로 포착한다. 길게 늘어난 시간 속에서 코오트의 미소 역시 오래 지속한다. 풀숲에 숨어 있던 코오트는 먼 친척 집에 와서야 비로소 뛰노는 아이가 된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코오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숀과 에이블린에게 생전 받아본 적 없는 환대를 받은 코오트는 그들과 헤어지기 싫다. 그래서 다시 달린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자신의 진짜 집을 향해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숀의 요청에 따라 우체통으로 달려갔던 코오트가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숀에게 달려간다. 차이를 두고 반복하면, 코오트는 숀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숀에게 달려가진 것이다. 코오트가 숀에게 달려간 이유는 그가 단순히 잘해줘서가 아니다. 자신을 ‘겉도는 애’로 취급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존중해 줬기 때문이다.
<기쿠지로의 여름>, 마사오의 달리기
<말없는 소녀>를 보고 여름 어느 날에 아이가 말없이 뛰어가는 영화가 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랐던 건 기타노 다케시의 <기쿠지로의 여름>(2002)이었다. 이 영화는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마사오와 그를 옆에서 도와주는 기쿠지로의 동행을 담은 로드무비다. 사실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영화는 아니다. 더 어른처럼 보이는 건 오히려 기쿠지로가 아니라 마사오다. 동행 길에서 기쿠지로는 경륜으로 돈을 다 날리는 등 여러 가지 기괴한 행동으로 마사오를 곤경에 빠뜨린다.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마사오의 엄마를 찾지만, 그는 이미 행복한 가정을 꾸린 채 살고 있다.
<키쿠지로의 여름>의 운동성은 ‘찾다’가 아니다 ‘돌아오다’에 있다. 영화 초반부, 마사오는 친구 유지와 함께 하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량스러운 형들을 만난다. 두 사람은 돈을 빼앗길까 봐 지름길을 포기하고, 먼 길을 돌아서 간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돌아간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처럼 보인다. 돌아오다는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오거나 다시 그 상태가 되다’를 의미한다. 어떤 장소를 끼고 원을 그리듯이 방향을 바꿔 움직이는 게 바로 돌아오다의 본질이다. 마사오가 불량스러운 형들 때문에 길을 돌아가지 않았다면, 돌아오는 길에 서 있던 기쿠지로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사오의 모습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시작과 끝 장면 모두 엄마를 찾았지만, 사실상 재회에 실패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사오의 모습이다.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가 카메라의 위치와 각도만 다르지 주인공의 상태가 똑같다는 얘기다. 오프닝은 돌아오는 마사오의 앞모습을 환대하듯 포착하고, 엔딩은 돌아오는 마사오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듯 포착한다. 돌봄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애정을 담아 앞에서 보살피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뒤에서 멀리 지켜보는 게 돌봄의 원칙이다. 처음과 시작에서 보이는 이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돌봄의 움직임과 같다.
겨우 엄마를 찾았지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돌아온 아이의 달리는 표정이 이토록 밝고 힘찬 이유는 무엇일까. 엄마 없이도 살아가야 한다는 비정한 삶의 이치를 어린 소년이 깨달아서가 아니다. 마사오는 돌아오는 길에 호텔 아저씨, 여행하는 커플, 소설가 지망생, 오토바이 폭주족 등을 만난다. 돌아오는 행위가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들을 통해 그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영화에 드러나진 않지만, 아마 그들은 다음 만남을 약속했을 것이다. 그건 기쿠지로 역시 마찬가지다. 그 또한 마사오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양원에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몰래 보고 나온다. 언제라도 함께 돌아갈 친구를 얻었기에 그들은 밝게 웃는다.
“내가 행동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뛰는 모습이 담긴 숏에는 언어가 없다. 무엇을 간절히 열망하는 강렬한 몸짓만 있다. 코오트가 숀에게 돌아가는 장면과 마사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는 언어로 산출할 수 없는 인간의 몸짓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언어를 배제하고 뛰어가는 아이들의 몸짓만을 담아낸다. 그 몸짓에는 단독자로서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달리기에는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인간의 몸짓이 있다. 생동감 있고 활기차고 적극적이어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있고, 있던 자리로부터 몸이 높이 솟구쳐 오르는 상승감이 있으며, 심장이 벌떡벌떡 움직이는 듯한 박진감이 있다.
이 같은 아이들의 몸짓이 담긴 영화는 무궁무진하다. 학교와 가정에서 핍박받은 앙트완이 ‘나 자신의 삶을 살겠다’며 다짐한 채 해변을 가로질러 카메라를 향해 달려오고(<400번의 구타>), 시간을 마음대로 조작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마코토가 화면을 벗어나 달리며(<시간을 달리는 소녀>), 무궁무진한 사랑의 가능성을 경험하고 탐색하려는 미나토와 요리 역시 영화 너머 어떤 곳으로 달린다(<괴물>). 부모가 부재한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밖으로 내달리며 “안 멈춰진다”라고 말한 시게루(<아무도 모른다>)의 말에서 나는 아이를 달리게 하는 힘의 원천을 생각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대학원 문화 중 가장 특이했던 건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를 ‘선생’이라고 부른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모종의 ‘선’이라는 게 지켜졌다. 선생은 단순히 먼저 태어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이유라면 나이 지긋한 분이 내게 선생님이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선생(先生)을 달리 해석하면 ‘먼저 태어나다’가 아니라 ‘처음 살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처음 산다. 남의 인생은 모른다. 내가 모르는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충분히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처음 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라고. 이글거리는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생을 처음 살아내는 사람의 숭고함과 처연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들의 움직임은 떠다니는 구름도, 흘러가는 강물도 아니다. 삶의 이치를 깨닫고 한가롭게 너울거리는 선비도 아니다. 하루키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그저 달린다.
무척이나 수런거렸던 학창 시절.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무언가를 간절히 찾고 싶어서 뛰었던 그 순간들이 우리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내 몸에 새겨진다. 달리는 아이의 몸짓을 담아낸 영화들은 모두 그 새겨짐을 이야기한다. 아니, 보여준다. 나에게 있어 여름방학은 이 같은 새겨짐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교실에 들어설 때, 뭔가 모르게 달라진 친구들의 모습에서 나는 생경함을 느꼈다. 그들의 눈에 나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없는 곳에서도 친구들은 땀을 흘리며 달렸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달리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로 오롯이 존재하며 불현듯 성장한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기획회의 613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