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우익 논란'을 보면, 일본이 안고 있는 죄책이 문화적으로도 얼마나 무겁게 작용하는지 숙고하게 된다. 전범 국가인 일본은 독일에 비해 과거사에 대한 성찰이 미온적이다. 사과를 해도 억지로 하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 애니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은 쉽게 전쟁 미화나 불온한 역사 인식 문제로 의심받는다. '진격의 거인'이 그랬고, '귀멸의 칼날'도 비슷한 논란을 겪었다. 지브리 작품 중에서는 '바람이 분다'가 그 사례로 언급된다.
일본은 이웃 나라를 침략한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미국의 원자 폭탄 투하로 희생된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위치가 일본 문화의 서사 구조에서 은근하게 발현하곤 한다. 전쟁의 가해자성을 개인의 상처로 치환하면서 역사적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는 식이다. 또 극단적인 폭력이 정당한 응징처럼 포장되는 방향으로 변주된다. 작품 속 잔혹한 행동이 '어쩔 수 없는 일', '피할 수 없는 운명', '정당한 보복'처럼 그려진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비판받아야 할 폭력이 서사 안에서는 용인되고, 관객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도록 꾸며지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적 책임이나 가해의 맥락이 무화되고, 폭력 자체가 하나의 영웅 서사로 소비되기 때문에 적잖은 논란이 생긴다.
이번 무한성편에서는 '아카자'라는 혈귀가 그렇게 묘사된다. 그는 인간을 죽이는 잔혹한 괴물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아픈 과거가 있다는 식으로 형상화된다. 그리고 세련된 외모 덕분에(?) 관객이 그의 '가해자 서사'에 더 쉽게 몰입하게 된다. 기유와 탄지로 등 귀살대와 싸우는 아카자는 종국에 자살하는데, 이는 명예를 위해 할복하는 일본 사무라이 이미지와 겹친다. 말하자면 '체면을 지키는 죽음'으로 아카자의 최후를 비장하고, 애달프며,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그리는 것이다.
대학원 시절에 교수님이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은 왜 항상 날아다닐까?"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의 뜻은 그러한 비행 이미지가 군국주의의 기호로 읽힐 수 있다는 말이었다. 누구는 이 같은 논리가 과장이고 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토론할 여지가 있는 주제라고 본다. 텍스트 비평이란 결국 시대가 남긴 무의식과 관객이 읽어내는 맥락이 겹겹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건 예전에 썼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