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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석주 영화평론가 Apr 12. 2024

흐르는 삶, 흐르는 영화

<화양연화>와 <패스트 라이브즈>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위 구절을 볼 때마다 기형도의 언어가 무엇을 찾아 헤매는 운동성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기는 했지만, 어디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상태. 갈팡질팡하는 과정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며 자꾸만 흔들리는 것. 흔들리고, 흔들리다가 결국 어딘가로 흐르고야 마는 것. 어쩌면 시인의 일이란 작문에 있다기보다는 그 정처 없는 흐름을 침묵하며 관찰하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형도의 시는 자꾸만 어딘가로 흐른다. 떠돌고 흩날리며 나부낀다. 그 흐름은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등의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같은 예는 무궁무진하다.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다는 시 속 화자의 말처럼, 사랑으로 인한 쓸쓸함과 안타까움을 한숨 쉬듯 뱉어버리는 모양새가 그의 시에 있다.


어떤 시가 흐르는 것처럼, 어떤 영화도 흐른다. 영화의 기본 속성이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Pictures)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장면과 장면이 만나 일련의 흐름을 형성한다. 어떤 카메라는 인물과 인물 사이를 파도치듯 유영한다. 어떤 인물은 프레임 내부와 외부를 자유롭게 오간다. 이 같은 운동성은 결국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이라는 오래된 수사를 영화적으로 증명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움직임을 형상화한 장면이 바로 패닝 숏(panning shot)이다. 패닝 숏은 수평으로 움직이면서 피사체를 포착하는 장면을 말한다. 패닝의 효과를 적절히 살린 영화는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삶을 철학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나에게는 <화양연화>와 <패스트 라이브즈>가 그런 영화다. 두 영화에서 카메라는 인물과 인물 사이를 물결처럼 움직이며 잇는다. 여기에 내가 있고, 저기에 당신이 있다는 것을 한 흐름으로 포획한다.


흘러간 사랑 <화양연화>



이웃으로 살게 된 주모운(양조위)과 소려진(장만옥)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묘한 끌림을 느낀다. 각자 결혼한 상태라 그 끌림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는 없다. 그러던 와중에 주모운의 아내와 소려진의 남편이 불륜 관계임이 드러나면서 두 사람은 묘한 혼란에 빠진다. 그 혼란스러움이 두 사람의 가슴을 뒤흔들지만, 가슴 한구석에 자리한 사랑의 영토는 점차 비옥해진다. 주모운과 소려진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가슴에 사랑을 쌓아 올린다.


주모운과 소려진의 첫 번째 식사 장면에서 카메라는 두 사람의 접시를 패닝 숏으로 포착한다. 그들이 무언가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처음으로 교감하는 순간에 패닝 숏을 사용한 것이다. 두 사람의 접시를 오가던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식사 장면으로 전환되는데, 이 장면 역시 패닝 숏으로 시작한다. 왕가위는 장면을 나누지 않고, 한 호흡의 패닝 숏으로 두 사람을 이어 붙이듯이 포착한다.


소려진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무협소설을 쓰게 된 주모운은 집을 떠나 따로 호텔방을 얻어 작업에 매진한다. 주모운은 소려진에게 소설 작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두 사람은 호텔방에서 밀회를 즐긴다. 이 장면은 그들이 주변의 시선을 피해 처음으로 한 공간에 있는 순간인데, 첫 식사 장면과 마찬가지로 패닝 숏으로 촬영됐다. 카메라는 방에서 두 사람이 소설을 쓰고, 밥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구슬 꿰듯이 좌우를 오가며 바라본다.


영화 후반부, ‘화양연화’라는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다. 이때 카메라는 각자의 방에 있는 주모운과 소려진의 모습을 패닝 숏으로 포착한다. 소려진을 비추던 카메라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며 주모운을 비추고, 주모운을 비추던 카메라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소려진을 비춘다. 앞선 장면들과 달리 이 장면에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있다. 이 패닝 숏 이후 주모운은 싱가포르로 떠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르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 온 주모운은 벽에 있는 구멍에다가 무언가 속삭인다. 이후 구멍이 풀잎으로 막혀 있는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영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는 주모운이 소려진과의 사랑을 그 구멍에 영원히 묻어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카메라는 흘러간 옛사랑의 움직임을 체현하듯 주모운이 떠난 앙코르와트의 모습을 패닝 숏으로 포착하며 엔딩 크레디트를 올린다.


어쩌면 화양연화라는 것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던 그 시절, 그대와 내가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시간성이지 물리적인 대상 그 자체는 아닐지도 모른다. 물리적인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사랑했던 건 그때의 당신이지 현재의 당신이 아니다. 요컨대 사랑이 꼭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소중하게 생각했던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도 사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흘러간 인연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 헤어졌던 해성(유태오)과 나영(그레타 리)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한 시간을 담은 영화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화양연화>와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움직인다. 12년 만에 우연히 연락이 닿게 된 해성과 나영은 컴퓨터와 휴대폰을 통해 일상을 공유한다. 영화 초반부에 카메라는 서울에 있는 해성의 공간과 뉴욕에 있는 나영의 공간을 패닝 숏으로 이어 붙인다.

    

두 사람이 뉴욕에서 만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카메라는 태오의 모습을 비추다가 왼쪽으로 수평 이동하며 나영의 모습을 비춘다. 이 같은 움직임은 몇 차례 반복된다. 이뿐만 아니라 카메라는 끊임없이 인물 근처를 유영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두 사람이 만나서 지하철을 타고, 산책하며, 데이트를 즐기는 순간이 모두 이러한 흐름에 귀속돼 있다. 카메라가 흐르지 않을 땐 주변 배경(회전목마, 강물, 바람, 배 등)이 흐른다.


<패스트 라이브즈>에서 패닝 숏이 가장 두드러지는 순간은 엔딩 시퀀스에 있다.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택시를 잡은 해성과 그를 마중하기 위한 나영을 카메라는 건너편에서 패닝 숏으로 따라간다. 이때 그들은 집에서 나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걷는데, 이 같은 방향성은 과거로의 여정을 상징한다. 해성이 택시에 타기 직전 나영을 향해 “야”라고 돌아보는 순간, 장면이 과거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은 24년 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후 장면은 다시 현재로 전환되고, 해성이 묻는다.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는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그때 우린 누굴까?”라고. 나영은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해성은 “나도. 그때 보자”라고 말하며 택시에 몸을 싣는다. 해성이 사라지자 나영은 다시 집으로 걸어간다. 이때의 방향성은 왼쪽에서 오른쪽, 즉 미래로의 여정이다. 과거와 이별하고 현재로 흘러들어 가는 나영을 카메라는 패닝 숏으로 포착한다.


여기서 잠깐 영화의 첫 장면을 떠올려 보자. 프레임 밖에서 해성과 나영 그리고 나영의 남편인 아서의 관계를 추측하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화의 끝에서 여자는 “정말 모르겠어(I have no idea)”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나영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나영의 마지막 대사가 “모르겠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모른다’라는 상태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패닝 숏이 처음 사용된 순간은 어린 시절 해성과 나영이 데이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있다. 나영이 해성의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 잠든 모습이 잠깐 등장하고, 카메라는 밖으로 나와 차창 밖을 바라보는 해성을 패닝 숏으로 포착한다. 이때 자동차의 속도와 패닝의 속도는 같다. 이와 반대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해성이 탄 택시는 패닝의 속도를 뛰어넘어 오른쪽 외화면으로 사라진다.


두 장면의 차이는 명료하다. 어린 해성의 곁에는 나영이 있지만, 지금은 없다는 것. 무엇보다 극명한 차이는 해성이 탄 현재의 택시가 패닝의 속도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24년 만에 확인한 해성이, 그가 탄 택시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영화의 마지막, 그렇게 해성과 나영은 똑같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며 생의 한 순간을 넘어선다.


흘러간 사랑과 흘러간 인연


<화양연화>와 <패스트 라이브즈> 모두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다. 그렇다고 그 사랑을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인연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때의 우리는 지금 없지만, 그때의 우리는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두 영화가 우리의 마음을 이토록 애잔하게 만드는 이유는 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찬란하게 빛났던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두 영화 아래에 흐르는 ‘모른다’라는 감정은 사랑의 불가해성을 전면화한다. 가령 주모운과 소려진은 각자의 배우자로 빙의해 거짓 연기를 하면서 논다. 이별 연습도 감행한다. 그러다가 진짜 감정이 밀려와 울기도 한다. 언뜻 이해가지 않는 놀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봉착한다. ‘모른다’라는 감정이 수미상관의 구조로 이어지는 <패스트 라이브즈> 역시 그렇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라며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때의 당신을,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당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것을 해성과 나영은 24년 만에 깨달은 것이고, 조금 더 원숙한 주모운과 소려진은 각자의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바르트의 말처럼, 두 영화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하기 위해 흐른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라는 <화양연화> 속 대사와 “20년 전에 나는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라는 <패스트 라이브즈> 속 대사가 묘하게 조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짓과 진실, 있음과 없음, 모름과 앎, 흘러간 시간과 현재의 시간 앞에서 카메라는 자꾸만 흐르고, 흐른다.


흘러간 사랑과 흘러간 인연. 그리고 그때의 너와 나. 모르고 알 수 없어서 어딘가로 끊임없이 흐르는 기형도의 시처럼, <화양연화>와 <패스트 라이브즈>도 끊임없이 흐른다. 사랑을 찾아 헤매고, 두리번거린다. 마침내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한 시절을 뛰어넘는다. 두 영화 모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패닝 숏으로 끝난다. 이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 영화의 저변에 떠도는 공기이며 영화 그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획회의> 통권 605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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