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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훈 Feb 27. 2021

"선생님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 거짓 증언으로 궁지에 몰린 학생 

겨울밤 새벽이니까, 옛날 일이 생각이 난다. 오래 전, 오래 전 일이다. 내가 교사가 되어 3년째 일이니까 스무 해나 더 전에 있던 일이다. 내가 들어가던 2학년 교실, 학생들이 하도 재잘거려서 화를 낼까 화를 낼까 하다가 일년 내내 화를 가까스로 내지 않았는데, 연말에 그 반 아이들이 "국어 샘은 화를 내지 않아요."라고 학급문집에 그림을 그렸다고 그 반 담임인 이 샘이 나에게 웃으며 말해주어서 아 그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기를 잘했구나 생각한 그 반 친구들이 떠오른다.


어느날 학생부인 박 샘에게 불려온 아이가 내 건너편 자리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안 그랬어요." 선생님은 말한다. "다른 아이들이 다 네가 그랬다고 말을 해. 네가 3학년 교실에서 사물함을 발로 차서 부수는 걸 봤다는 아이들이 여러 명이야." 그 남학생이 다시 말한다. "선생님 저는 그런 일이 없어요." 말을 길게 하지 못하는 그 학생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 학생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개성적인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이었다. 게임을 좋아했던가 만화를 좋아했던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하지만, 혼자 있어도 외로워 보이지가 않고 자기 세계에 빠져서 일상을 지루해하지 않는 아이였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는 덕질을 한다고나 할까. 나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하는 사람이어서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금방 알아보았다. 세련되지 않고 눈치가 빠르지 않고 말이 화려하지 않고 그대신에 우직하고 말은 적지만 약간 바보 같이 웃기도 하는, 남에게 피해 주는 일과는 거리가 먼 온순한 학생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3학년들이 단축수업을 하고 일찍 집에 간 어느날, 2학년 학생들이 3학년 교실에 가서 남아 있는 문제집을 챙겨오면서 괜히 흥분을 해서 사물함을 내던지고 물건을 팽개치고 부순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학교에 온 3학년 학생들은 화가 단단히 났다. 자기들이 수능이 끝나 거들떠보지도 않은 문제집과 사물함이었지만, 교실이 난장판이 됐으니까. 학생부 샘들이 사건을 살폈고, 그날 목격자들을 수소문하니 금방 여러 명 아이들이 밝혀져서 붙잡혀 왔다. 여기까지는 보통,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그 남학생만 닭똥 같은 눈물을 혼자 홀리고 있었다.


붙잡혀온 아이들 중 몇몇이 그 개성적인 남학생이 발로 차서 사물함을 부쉈다고 증언을 했다. 다같이 입을 모아서 말이다. 학생부 박 선생님은 온화한 목소리로 울고 있는 남학생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네가 그랬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여러 명 있어. 안 했다는 너는 혼자고, 네가 그랬다는 아이들은 여럿이야. 그러면 선생님은 여럿을 믿어야 하지 않을까?"


그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다 번뜩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그 아이를 다른 학생들이 독특하게 여겨서 약간 저만치 밀어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용히 박 샘에게 가서 가까이서 말했다. "선생님 저 학생은 다른 친구들이 왕따를 시키는 아이예요." 베테랑 학생부 교사인 박 샘은 그 한마디로 상황을 한순간에 다 파악했다. 나는 박 샘의 눈이 크게 떠지는 걸 보고 물러서서 내 자리로 왔다.


그 학생에 대한 징계와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 샘이 상황을 파악한 것이다. 재조사가 이루어졌고, 여러 명이 입을 맞춘 증언이 거짓임이 밝혀졌다. 며칠 뒤에 학교에서 그 순한 남학생이 자기와 비슷한 친구들과 다시 사람좋게 웃는 모습을 수업시간에 보고, 내 마음이 놓였다.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수업시간에 그 아이가 쓰던 글, 나와 이야기 나누던 하얀 얼굴, 조금 큼지막하던 덩치가 떠오른다.


그날 3학년 교실에서 물건을 부순 아이들이 학생부의 조사를 받자, 그 책임을 벗어나려고 사회적 관계가 약한 그 아이에게 누군가가 책임을 미루었을 것이다. 어느 한 아이가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들도 탈출구를 만난 듯이 그 거짓말에 동참했다. 거짓말도 함께하면 진짜처럼 느껴진다. 묘한 쾌감도 있었을 것이다. 직접 봤다는 거짓 증언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그 아이가 그때 할 수 있던 일은 눈물을 흘리며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일뿐이었다. 그때 내가 그 장면을 우연히 보지 못했다면, 그래서 박 샘이 그 학생이 누명을 썼음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그 학생은 얼마나 더 큰 상처를 그때 입었을까.


사람이 거미줄에 걸릴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죄가 있는지를 판단할 때, 큰 목소리들이 들려와도 나는 쉽게 그 목소리에 동참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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