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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Dec 29. 2020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삶


지난 주말, 시내에서 열리는 원데이클래스에 갔다. 시내를 중심으로 슬슬 역병이 번지고 있어서 잠깐 망설이긴 했지만 화실에서 인원을 최소로 제한했고 그림 그리는 동안 마스크를 벗을 일은 없을 테니 괜찮겠다 싶어 취소하지 않았다.


사실 역병보다는 거리가 더 마음에 걸렸다. 한 시간을 꼬박 운전해서 가야 하는 거리라 굳이 그림을 그리러 그렇게까지 '멀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중문에서 아침 먹고 애월에서 커피 마시고 세화 바다를 구경 가던 관광객일 때 와는 전혀 다른 심리적인 거리감이 생겼다. 


서울에서야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운전을 하든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것이 그렇게까지 부담스럽지 않지만 제주에 오니 정말 큰 맘먹고 행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는 시내에 살다가 30분 거리에 있는 동네로 이주하는 것도 '귀촌' 했다고 표현하고, 옆 옆 동네 오일장 가는 것도 신기해하는 지역 정서를 점점 이해하고 있다.


꽤나 높아진 심리적 장벽을 넘어서 시내까지 가는 김에 '리'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꼭 하고 오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은 던킨, 클래스 끝난 뒤에는 써브웨이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용으로 하나 포장해서 가져오기로 정하고는 길을 나섰다. 며칠 흐리다가 갑자기 짠 하고 맑아진 날씨에 우리 동네에서도 한라산이 환하게 보였다. 따뜻한 날씨에 창문도 열고 오랜만에 책읽아웃도 들으며 한껏 업 되어서는 '이런 길이라면 왕복 두 시간이라도 운전할 수 있지!' 하며 달렸다. 



클래스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여기가 대전 봉명동인지 경기도 동탄인지 제주인지 전혀 구분 안 되는, 상가주택과 꼬마빌딩이 즐비하고 주차 대란이 벌어지고 있는 골목에 주차를 해두고는 무려 버스 중앙차로가 있는 대로를 따라 던킨에 갔다. 골목에서 벗어나 대로변으로 나서자마자 내게 없는 것이 떠올랐다.



에어팟


눈이 갈 곳이 없고 귀가 도시 소음에 노출되자마자 에어팟이 간절해졌다. 제주에 오고 난 뒤 에어팟이 생각난 건 처음이었다. 가끔 스벅에서 책 읽을 때나 챙겼지, 평소에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이 곳에서는 동네 산책을 하든 오름을 오르든 숲을 걷든 늘 자연이 나의 모든 감각을 충만하게 채워준다.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뱃고동 소리가 청각을, 바람 따라 움직이는 구름과 나무, 너른 땅에 부드러움을 더해주고 있는 오름 능선, 그 위에 드리운 구름 그림자가 시각을, 숲 내음과 바다향기가 후각을, 그리고 인적 드문 숲에서 행하는 나만의 의식 '나무 보듬어 안기'를 할 때의 그 따뜻함이 촉각을 채워준다. 굳이 음악으로, 다른 이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로 내 감각을 채울 필요가 없는 거다.



클래스를 마친 후 써브웨이에 앉아 에그마요를 먹으며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도시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휘릭 나가서 볼 수 있던 조조영화와 좋아하는 백화점 향기와 책이 가득한 대형서점 같은 취향의 문제는 물론, 나의 커리어와 따박 따박 들어오는 월급 같은 먹고사는 문제도 생각했다. 


이 곳에 오기 전에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하나도 당연한 것이 아닌 지금,

다시 당연한 삶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웅장해지고, 마음이 벅차올라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이런 삶이 있는 것을 알아버렸으니 아마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충만한 삶을 누리기 위해 당연했던 삶을,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놓치고 싶다. 에어팟이 필요 없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삶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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