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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Dec 06. 2020

나의 속도

다시 제주



2주간의 서울 일정을 끝내고 12월 첫날 내려왔다. 마음에 큰 쇳덩어리를 끌어안은 채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주머니가 터질 것 같은 상태로 왔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집에만 가면 이 상태로 자동 전환된다. (F 코드 환자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해. 의식적으로 감사를 해봐. 신나는 음악을 들어봐. 그냥 무시해버려. 다들 그렇게 살아.' 따위의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쓸모없는 조언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 안다. 내가 생각과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상태라면 '병'으로 진단받을 일도 없겠지)


상담을 1년 넘게 받고 있고 두 달 전 제주에 온 뒤로 느리지만 그래도 점차 괜찮아지고 있어서 이번엔 다를 줄 알았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저 상태로 가기까지 며칠 걸렸다는 것. 사실 저렇게 되지 않으려고 나도 모르는 새 혼자 엄청 애를 썼던 건 지도 모른다.



서울에서의 마지막 주말 아침, 데굴데굴 구르며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오열할 것 같은 느낌이라 후다닥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음식점은 되고 카페는 안 되는 납득 안 가는 정책 때문에 교보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오픈 시간부터 붐볐다.


숨은 턱까지 차 있고 아무나 붙잡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때 그나마 도움되는 책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고스란히 글로 정리해 둔 에세이들. '너만 그런 것 아니야,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 하는 에세이들.


구석에 앉아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울컥했다. 엉엉 울 수는 없으니 입을 앙다물고 조용히 울다가 두통을 얻었다. 정해둔 일정이 있어 아직 두 밤을 더 자야 내 집으로 갈 수 있는데 다 취소하고 지금 당장 가버릴까 싶어 티켓을 검색했다. 책 몇 장 넘기다 티켓 확인하고 다시 몇 장 넘기다 티켓 보는 일을 반복하다가 집에 돌아가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는데 잠이 쏟아졌다. 어차피 맘대로 울지도 못할 거 기를 쓰고 눈물 참지 말고 잠이나 자자 싶어 몇 시간을 쭉 잤다.



제주로 돌아온 뒤 며칠을 무기력하게 바닥에 누워있었다. 두 달 전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상태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풍경에 기분이 훨씬 나아졌지만 이미 잔뜩 들어간 힘을 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무 처지는 것 같아 부러 멀리 있는 물영아리오름도 오르고 큰엉해안경승지도 한참을 걷고 돌아왔다. 없는 에너지를 쥐어 짜냈던 건지 몸살이 왔다. 이틀을 꼬박 먹고 자고 멍하니 넷플릭스 보는 생활을 반복했더니 이제야 힘이 생긴다.



굳어진 표정과 힘 잔뜩 들어간 눈이 다시 풀리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제는 내가 내 상태를 알아차린다. 그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남들보다 오래 걸리고는 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먹먹하고 여전히 숨이 가쁘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자다 깨서 멍하니 창 밖을 보다가 일출봉 위에 머물고 있는 고래 모양 구름 녀석들 덕분에 위로를 얻고 새벽에 창문을 열자마자 날아오는 향기에 한 시간의 행복을 얻는다. 이런 시간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어떤 도움이나 가이드 없이 온전히 내 삶을 살아갈 수 있겠지. 세상이 어떤 속도로 돌아가든 나의 속도로 내 안에서 답을 찾아가며 그렇게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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