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한옥살이
이사를 했다.
서울 파견이 확정된 뒤 어디에 살고 싶은지 생각했다. 직주근접을 생각하면 당연히 강남이어야 하지만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건물 뷰 도로 뷰를 보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사용 가능한 병가를 탈탈 털어 써가며 치료 중인 공황과 우울이 다시 세차게 몰려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원하는 것을 추려봤다.
젊은(나이 말고 마인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동네.
아파트/오피스텔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시야를 완벽히 망치는 동네 안됨.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곳.
공중에 둥둥 떠서 사는 아파트/오피스텔 안됨.
서울에서 이 조건은 어려울 테니 빌라는 허용, 광화문 라인 내 공중 집 정도는 괜찮음.
다 충족하는 곳은 연희동 연남동 망원/상수 광화문 서촌/북촌 부암동 한남/이태원 정도.
부암동은 본가 옆 동네라 차라리 본가를 들어가지? 하는 생각에 가장 먼저 제외했다.
다른 곳은 괜찮은 매물이 많았지만 매일 버스+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는 건 내 체력으로 무리였다.
남는 곳은 서촌과 광화문
뷰가 기가 막힌 레지던스와 땅을 밟고 살 수 있는 한옥을 찜해두고 급히 올라와 집을 보았다.
그리고 만났다.
마당에 햇빛이 가득한 집을.
땅을 밟고 서서 하늘을 볼 수 있는 집을.
현실적인 문제들(보증금, 옵션, 주차, 계약 기간 등)을 생각하면 당연히 레지던스가 딱 맞았다.
하루를 꼬박 고민했다.
머리와 마음의 결정 사이에서 휘둘리다가 글로 정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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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스에서는 인왕산을 보며 침대에서 일어나고 매일 여행 온 기분으로 살겠지.
창밖으로 날씨와 계절이 바뀌는 걸 보며 나 혼자 마냥 행복해하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한옥에서는 옆집에서 어떤 음식을 해서 저녁을 먹는지도 알 수 있을 테고, 방문만 빼꼼히 열어도 날씨를 직접 느낄 수 있겠지.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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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함께.라는 말이 내게서 나오다니.
한동안 사람들 마주하는 것 자체가 힘이 들었다. 한동안이라고 썼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쭉 그랬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싫어했고 짜인 틀 대로 무언가를 해야 하는 단체생활은 정말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학교생활 자체가 내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였는지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 매일매일이 끔찍했다. 물론 그런 기분을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혼자 끙끙 앓으며 책으로 도피하는 아이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 혼자 여행을 가면 며칠 넋 놓고 사람들만 관찰할 정도로 사람 자체는 좋아했지만 정작 누군가가 내 바운더리에 들어오는 건 극도로 경계했다. 오랜 기간 상담을 하고 나를 들여다보며 이유를 찾았다. 어떻게든 틀에 맞춰 살기 위해 나도 모르게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몇 년을 쉬지 않고 울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눈물을 다 쏟아내고 텅 비운 상태로 제주에 내려갔다. 제주에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에너지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았다. 덕분에 이제는 사람들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 '사람들과 함께'라는 말이 나오는 집이라니.
이곳에서 살게 될 기간이 정말 짧지만 그동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싶다.
고양이들이 지붕 위를 쉬지 않고 뛰어다니고, 까치들이 마당 돌바닥으로 내리꽂을 듯이 하강하며 싸우고 지나가고,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모를 벚꽃잎이 살랑살랑 우아하게 내려오는 이 집을 사람이 주는 에너지로 가득 채우며 내 인생의 다음 스텝을 고민해 보려고 한다.
잘 왔다,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