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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듬 Oct 29. 2021

사람이 궁금해지는 동네



사인필드 보며 낄낄거리던 일요일 저녁,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건네 받은 종이쪽지에 마음이 착 납작해졌다.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재개발사업 청원'

'경복궁과 한국식 전통이 어우러지는 멋진 아파트'

'자산 가치의 상승과 좋은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내가 좋아하는 이 동네도 사직터널 지나 삐죽 솟아 있는 아파트 단지처럼 그렇고 그런 동네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슬프다. 사유재산이니까 나는 발언권 없는 것 아는데. 그래도 좀, 슬프다.



외할머니네 동네도 숨 턱턱 막히는 아파트 숲으로 변하고 있다.


초록 대문 집에는 누가 사는지, 길 건너에는 어떤 집들이 있는지 절로 궁금해지던 골목들인데. 

옥상 텃밭과 대문 안팎 화단을 열심히 가꾸던 손길들, 여기저기 고양이 밥을 챙기던 따뜻한 흔적들이 가득하던 곳인데. 

할머니 집 1층에서 구멍가게 운영하시던 사장 할아버지, 1층과 3층 이 방 저 방에 살던 한양대생 언니 오빠들, 할머니 곗돈 타는 날 쫄래쫄래 따라가면 짜장면 그릇에 탕수육이랑 단무지 끊임없이 올려주시던 동네 할머니들 얼굴을 선명히 기억할 만큼 내게는 소중한 장면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동네인데. 


다 밀어버리고 반듯반듯한 아파트가 쑥쑥 올라가고 있다. 



대전에서 8년이나 지냈으면서도 정을 붙이기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반듯해서 보기만 해도 숨 막힘' 이었다. 그런데 다들 서울도 그렇게 만들고 싶나 보다. 도시가 콘크리트 더미가 되든 말든, 아파트 단지 문 걸어 잠그고 '외부인들' 지나다니지 못하게 막아두든 말든 재산가치만 올라가면 다 상관 없나 보다.



어느 동네 얼마 올랐더라, 어느 지역 사업시행인가 받았더라 같은 소리를 몇 십 년째 듣고만 있는 이 동네 투자자들은 속이 바싹바싹 타겠지만 난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 혼자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 되는 사람이라 그럴 수도. 그렇지만 혹시나 내가 자식이 있다면 문 걸어 닫고는 '우리'끼리 안락함을 느끼고 인공적인 조형물과 조경으로 공간을 채운 그런 동네 대신, 골목에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궁금해지고, 땅 밟고 서서 하늘을 누리며 재밌는 상상들로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그런 동네에 살게 하고 싶다. 


지키고 싶은 동네에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라 저 할 수 있는 건 나 같은 사람들이 지금 보다 더 많아져서 서울 구석구석 많은 곳들이 계속 살아있는 동네로 남아있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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