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소희 May 30. 2020

밥 한 끼의 자존심

식욕은 밑바닥에 숨겨진 인간의 본능이고 자존심이다.

 “내가 배가 고픈데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해도 돈이 없다고 했다.”


  지난 25일에 기자들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윤미향을 향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회견을 마치자 최민희 전 의원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밥 한 끼라도 재단 돈은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음성을 들으니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추운 겨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가 먹으라며 신문지에 둘둘 싼 절편을 내밀었다. 말랑말랑했을 떡은 신문 조각이 여기저기 달라붙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종이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쑥절편은 지저분하게 보여 먹을 수가 없었지만 차마 버릴 수도 없었다.


  학교가 끝난 후에 여느 때처럼 나는 외갓집으로 갔다. 외할머니는 외출하셨는지 외할아버지가 나를 반겼다. 나는 가방에서 얼음처럼 굳은 절편을 꺼내 마루에 놓인 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난로 위에 올려놓은 떡은 이내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외할머니에게 엄청나게 야단을 맞고 말았다. 외할아버지에게 떡 한 조각 주지 않고 혼자 다 먹었다고.


  할아버지는 손녀딸이 혼자 오물거리며 떡을 먹었던 게 못내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 날 할머니는 시장에서 하얀 인절미를 사왔다. 석쇠에 구운 인절미를 보면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단 한 입도 얻어먹지 못했다. 어른께 먼저 권하지 않았던 건 내 실수였기에 나도 떡 한 조각만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그깟 밥 한 끼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밥 한 끼에 사람은 절망하기도 하고 행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 아니라 콜라가 귀했던 시절 이야기다.

당시만 해도 남녀가 만나면 무작정 걸으며 데이트를 즐겼다. 그날은 날이 몹시 더워 여자는 시원한 콜라 생각이 간절했단다. 남자는 센스가 없었던지 아니면 돈이 없었던지 여자의 갈증을 눈치 채지 못했고 결국 여자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말았다.

  콜라 한 잔 사주지 않던 쫀쫀한 남자가 서운해서 헤어지자고 했는데 세월이 흘러 여자는 TV에서 그 남자를 보게 되었노라고 나에게 흘러가듯 고백했다. 콜라 한 잔으로 남자와 헤어지게 된 걸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명한 여가수가 TV에서 이혼하게 된 지난 일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남편은 평소에도 불쑥불쑥 집으로 친구들을 데려오는 걸로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괴짜 개그맨이었다.

  손맛이 좋았던 여 가수는 요리책까지 정도로 음식실력이 좋아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남편 친구들에게 싫다는 기색 한 번 내지 않고 대접을 했단다.

  그런데 냉면을 좋아하던 그녀는 모처럼 남편과 만나 냉면을 먹고 있는데 먼저 다 먹고 휙 일어나 나가버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이혼을 결심했단다. 냉면 한 그릇에 그 부부는 남남이 되고 말았다.


  사실 나도 밥 한 끼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평소에는 돈이 많은 것처럼 과시하던 K는 나이로 보나 성별로 보나 속내를 터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추켜세우기도 했는데 예전의 기억 때문에 그의 떠벌임이 나는 달갑지 않았다.


  한 번은 그와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심부름을 해준 내게 밥을 사주겠다고 식당을 갔는데 그는 자신이 먼저 메뉴를 고른 후에 내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보통은 빈 말이라도 상대방에게 ‘먹고 싶은 것을  먼저 고르라’는 게 예의 아닌가?

  

  그의 일방적인 태도는 순간적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가 고른 음식은 그 식당에서 제일 가격이 쌌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밥을 사겠다는 사람이 그 음식을 택했으니 나도 그와 똑같은 메뉴를 선택할 수밖에는 없었다.


  메뉴판을 먼저 보고 음식을 선택하는 그의 태도는 그 정도 가격의 음식만 시키라는 암시로 받아들였기에 나는식사를 하는 내내 불쾌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설사 비싼 것을 주문하라고 해도 나는 분에 넘치는 음식을 시킬 정로로 비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의 태도는 나로 하여금 무거운 책을 들고 시간을 냈던 것을 후회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도 그는 몇 번 내게 전화로 도움을 청했는데 최소한의 정보만 알려주고는 선을 그었다. K는 밥 한 끼에 사람을 잃고 말았다.


 식욕은 밑바닥에 숨겨진 인간의 본능이고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이 상처를 입으면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보니 굳은 떡 한 조각에도 서운함을 느꼈던 외할아버지의 속마음이 그림책처럼 떠오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