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반짝이는 식탁에서 대한 선망이 있었네
몇 해 전 고인이 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다윈의 세계관에 처음 눈 뜨던 순간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정원에 핀 꽃들은 대부분 향기가 좋고 색깔이 아름다웠지만 예외가 하나 있었다. 목련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커다랗지만 색깔이 하얗기만 하고 향기도 없는 꽃을 피웠다. 그런데 목련꽃이 만개하면, 조그만 딱정벌레들이 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어머니는 이렇게 설명했다.
"목련나무는 아주 오래된 꽃식물이란다. 거의 1억 년 전에 나타났는데, 그때는 벌 같은 곤충이 아직 진화하지 않았던 거야. 벌이 없으니 색깔과 향기도 필요 없었고, 그냥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딱정벌레에게 꽃가루 배달을 맡겼단다. 벌과 나비와 (색깔과 향기가 있는) 꽃들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들은 수백만 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진화할 예정이었거든."
'벌과 나비가 없고, 꽃의 향기와 색깔이 없었던 세상'이라는 아이디어는 내게 경외감을 심어줬다.
<의식의 강> '다윈에게 꽃의 의미는?' 중에서. 35p
진화론이라는 어마어마한 이론 덕분에 조금은 감춰진 '식물학자'로서의 다윈의 면모와, 그가 왜 그렇게 딱정벌레에 심취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매해 피고 지는 목련꽃을 보고, 비염에 좋다는 목련봉오리도 달여 먹어봤지만... 왜 나는 한번도 목련꽃에 향이 없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수분을 도와줄 벌과 나비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굳이 그들을 유혹할 색과 향이 필요 없었던 거구나.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초대형 육식공룡과 물고기들로 가득하던 그 시절. 목이 긴 초식 공룡들이 은행나무를 우적우적 먹고 있는 어느 숲 한쪽 귀퉁이에서 그렇게 너 목련은 소리 없이 흰 꽃을 피우고 지웠구나. 올리버 색스의 어린 시절 기억을 함께 따라가며 나 또한 까마득히 먼 과거 무채색 세상에 대해 상상하고 진화의 경이로움에 새롭게 눈떴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정작 이 장면이 내게 남긴 인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였다.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더 가져와야 한다.
나는 가끔 어머니에게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보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빨아들이는 빛보다 내뿜는 빛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쉽게 유리에 상처를 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는 입술에 갖다 대보라고 했다. 다이아몬드는 섬뜩하다 싶을 만큼 차가웠다. 다른 금속들도 만지면 차갑지만 다이아몬드는 얼음 같은 느낌이었다. 어머니는 다이아몬드가 그 어떤 금속보다도 열전도율이 좋아서 입술에 대면 체온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이아몬드의 그 차가움은 결코 잊지 못할 느낌이었다. 또 언젠가 어머니는 다이아몬드를 얼음에 대고 있으면 체온이 다이아몬드를 통해 전해져서 얼음이 버터처럼 녹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는 우리가 겨울마다 쓰는 석탄과 같이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나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시커멓고 푸석푸석한 석탄과 투명하고 단단한 보석이 똑같다니?
<엉클 텅스텐 올리버 색스의 과학탐험기> '텅스텐 삼촌' 중에서. 11p
자신의 다이아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어 유리창에 긁어 보는 어머니. 아이의 입술에 대주며 그 서늘함을 열전도율 때문이라고 말해주는 어머니. 겉으로 보이는 차이와 달리 다이아몬드와 석탄은 모두 똑같은 탄소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해줄 수 있는 어머니. 자신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아이에게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갈 만큼,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어머니. 그게 나를 매혹했다.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올리버 색스의 어머니 쪽 형제와 자매들은 모두 수학, 물리, 화학, 지질학 등의 자연과학과 생물, 교육, 사회학 계열에서 자신만의 입지를 다진 학자들이었다. 삼촌은 평생 '밀도가 높고 열에 강하며 화학적으로 대단히 안정한 텅스턴'과 사랑에 빠진 화학자였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삼촌의 연구실과 공장을 오가며 꼬마 조교 역할을 하며 살았다. 이모네 집에 놀러 가면 이모는 그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가 해바라기씨의 나선 배열을 보여주며 피보나치 수의 아름다움과 규칙성, 황금분할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런 풍요로운 학문적 수혜 덕분에 그는 일찌감치 금속, 식물, 숫자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갈 수 있었는데, 훗날 그는 그 기억들이 2차 대전이라는 참혹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아이들과 함께 '피보나치수열'에 관한 동영상을 보며 함께 수업하던 어느 날. 나는 내가 어쩌면 오래도록 꿈꿔온 어린 시절이 이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문 대대로 땅과 건물을 물려받고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친구가 부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애정을 가진 어른들이 한 식탁에 모여 왁자지껄 자기 이론을 펼쳐내고, 그들 옆에서 귀동냥하며 세상과 학문적 호기심에 자연스럽게 눈떠가는 어린 시절. 그 지성이 반짝이는 식탁에 대해서는 내가 질투에 가까운 선망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아는 주제에 헌신하고, 그 주제에 대해 눈빛을 빛내며 말할 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도.
이제 전문성과는 너무 멀어졌고 그 사실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또 누가 알겠나. 내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못한 그 식탁을 혹, 손주들에게는 물려줄 수 있을지. 그때엔 할머니 집에 놀러 온 손주를 데리고 숲 속을 걸으며 들려주리라. 벌과 곤충이 없던 시절 목련 꽃이 홀로 피고 지며 겪었을 외로움과 솔방울 비늘에 늘어선 피보나치수열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연 속의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수의 세계에 신비에 대해. 세상은 여전히 경이로운 것들로 넘쳐나며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법칙과 비밀 또한 여전히 우리의 발견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렇게 계속 꿈꾸겠다고 다짐해 본다.
<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저, 양병찬 역, 알마
<엉클 텅스텐 올리버 색스의 과학 탐험기>, 올리버 색스 저, 이은선 역, 바다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