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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Feb 01. 2024

화장실 쓰고 환풍기 좀 켜줄래?

함께 늙어간다는 건 20년 만에 너의 당부를 떠올리는 일 같은



남편이 마침 화장실을 쓰고 나오는 길.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내가 말한다.

"당신, 화장실 쓰면 환풍기 좀 켜고 나와. 이제 하숙생도 있고. 애들 방이 바로 화장실 앞이라서 냄새가 바로 들어오거든. 아님 화장실 문이라도 좀 닫고 다니던가."

20년을 함께 살아도 생리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최대한 조심스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나를 쳐다보던 남편의 얼굴이 잠시 내 말을 새긴다. 그리고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은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환풍기 켜고 나왔어."

"아, 정말?"

"응, 문.닫.고.환.풍.기.도.켜.고."

"아... 알았어."

몇 주 전 내가 지나가는 말로 했던 잔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나. 웬일이래. 그리고 다시 돌아서 설거지를 하려는 찰나.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정말일까? 설마~ 아니야, 그럴 리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작은 의심의 싹이 고개를 쳐들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어렵게 한 그 말을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받는 남편의 태도가 제일 의뭉스러웠다.


닦던 그릇을 잠시 내려놓고 고무장갑을 벗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러. 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를 그 상자를 향해. 초에 불을 켜고 화장실로 향한다. 잠든 남편의 얼굴을 확인하러. 기어이.


긴 복도 끝. 화장실 문은 검은 입을 쩌억 벌린 채 반쯤 열려 있었고, 환풍기는 죽음처럼 고요하다.


. 닫.고. 환. 풍. 기. 도. 켜. 고. 한 글자씩 입에 꼭꼭 담아 나를 향해 발화하던 남편의 목소리가 귀에 메아리친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저 인간이 미친 걸까.


마침 그 일이 있던 주말. 서울 친구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 꼰대와 똥멍청이 사이를 오가는 남편이라는 인간에 대한 성토부터, 인간은 얼마나 미스터리 하고 불가해 한 존재인지에 대한 성찰까지. 나 같으니 이런 인간이랑 같이 살지, 너니까 살지 나는 못 산다, 너는 어디까지 참아봤니, 블라블라블라. 성토하고 공감하며 우리 안의 불안이 옅어지고, 나만 이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안도로 또 얼마간 살아진다.


하지만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이 미스터리 한 인간에 대한 의문이 사라지질 않았다. 남편과 살면서 계란으로 벽치던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매번 '기어이' 그 맨 얼굴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개인적 치부 보다 가부장 제도 하에서 같은 피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이해되었다. 대개는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본질적인 한계로 어느 정도 설명되었다. 아니면 내 흐릿한 기억의 부정확함으로 치부하며 며칠을 살았다. 그런데, 이번 일은 너무나 실존적으로 명확한 사건이라 도저히 머리에서 떨쳐지지가 않았다.


화장실 생각으로 잠을 좀 설쳤던가.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 누군가 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들이 샤워하고 후다닥 뛰어나오는 소리. 발가벗은 아들 뒤로 후끈한 샤워실의 온기가 따라 나왔다. 순간, 20년 전 남편이 나를 향해 당부했던 그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거짓말처럼, 너무나 선명하게!


"화장실 쓰면 제발 환풍기 좀 틀고 나와 줄래? 너 쓰고 나오면 너무 후덥찌근해서 화장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


신혼 초. 몸에 열이 많은 데다가 캐나다에서 오래 생활한 남편은 늘 나와 함께 사는 집을 더워했다. 그중에서도 샤워할 때 뜨거운 물을 펑펑 틀어 화장실 전체를 찜통으로 만들고 샤워하는 나를 제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늘 용무만 끝나면 그다음 일로 바빴던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냥 듣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정확히 저 남자와 살면서 나는 단 한 번도 샤워 후 환풍기를 틀고 나온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이 20년 만에 이제야 떠올랐다. 맙소사!


부부가 함께 늙어간다는 건, 이렇게,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의 당부를 20년 만에 떠올리고, 뒤늦은 참회록을 쓰는 오늘과 같은 나날이 점점 더 많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좀더 서로에게 친절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건 어쩌면 회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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