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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Feb 05. 2024

설교시간에 남편을 잠들지 않게 하는 방법

노동의 권태와 무기력을 넘어 선

노동의 권태와 무기력을 넘어 선


설교시간에 깨어 있는 남편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정도냐 하면, 보통 '예배 시간에 잔다'라고 하면 설교 초반 20여 분까지는 스르르 감기는 눈을 반쯤 떴다 감았다 나름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는 시간이 있다. 제아무리 고래라도 한쪽 뇌 정도는 깨워둔 채 잠에 빠진단 말이다. 천적이 나타나거나 숨이 차오르면 순간 각성할 자세쯤은 장착한 채 조금 불편하게 잠들기 마련이라는 건데... 이놈의 남편은 얼마나 위풍도 당당하게 잠드는지, 설교가 시작하자마자 곯아떨어진다. 치 코끼리 물범처럼.


신문에서 코끼리물범의 수면 메커니즘을 연구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물범은 고래와 달리 잠을 잘 때 인간처럼 완전히 숙면을 취한다고 한다. 과학자들이란 늘 이상한 거 알아내기 좋아하는 족속들이다 보니 이 미스터리 한 수면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물범 8마리의 몸에 뇌파와 센서를 달고 관찰을 했다. 실험 결과, 물범은 물에 잠기면서 서서히 숙면 상태에 접어들었다가 수심 300미터쯤 이르면 꿈까지 꾸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완전 무방비 상태로 물의 흐름 자신을 맡긴 채 마치 나뭇잎이 떨어지듯 나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추락한다고 한다. 그러니 밑바닥이를 때에는 완전 숙면 상태로 곯아떨지는데 인간이라면 코까지 곯았을지도 모른다는 게 과학자들의 변. 놀라운 건 그 모든 시간이 불과 20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마치 내 남편처럼 말이다.


사실 남편의 숙면에 대해 내가 몰랐다면 거짓말이다. 결혼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남편은 연애할 때도 설교만 시작되면 코끼리 물범처럼 잠이 들었다. 아니다. 그때는 고래처럼 이구나. 뇌를 반쯤은 열어놓고 잠들었다. 팔꿈치로 찌르면 살짝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졸음을 깨우려 애쓰는 노력은 보여줄 정도로. 결혼하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편은 점점 더 대범하게 잠들기 시작했다는 것. 아내인 내가 깨워도 자신의 졸음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나 또한 그를 깨우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만 해도 예배시간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남자를 계속 만나야 하는지 그때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지만 말이다. 이미 서로에게 푹 빠진 남녀를 떼어낼 방법도 없거니와(로미오와 줄리엣 법칙에 의하면 남녀는 떼어낼수록 더 강렬해짐), 사랑하는 남자가 설교시간에 존다고 헤어져야 할지 말지를 신에게 묻는다면 하나님도 너무 유치해서 실소를 날리지 않으셨을까. 신이시여. 저는 당신도 사랑하지만 이 남자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설교시간에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남자와 결혼한다면 제가 신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입니까? 저는 이 남자와 헤어져야 할까요? 다시 생각해도 넘 우낀 기도. 


남편이 설교시간에 존다고 남편의 신앙이 나보다 수냐? 묻는다면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진심이다. 예배 시간을 지금도 목숨처럼 생각하는 건 내가 맞지만, 만약 순교를 한다면 그건 분명 남편일 거라고 늘 생각한다. 이 이론에 대해선 조금 더 깊은 신학적 논의와 내공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아래와 같은 부연설명으로 만족하자. 가령, 내가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 주일성수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남편 덕분이라는 법칙(?) 따위로.  


나는 싱글일 때, 오늘은 날이 좋아서 혹은 날이 좋지 않아서, 또는 날이 적당하다는 이유로 자주 예배에 빠지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핑계 댈 일은 더 많아졌다. 남편이 너무 좋아서 혹은 남편과 싸워서, 또는 예민한 아기 때문에 밤새 시달려서 신 앞에 나아가기 싫은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해야할일은해야한다주의자'인 남편에게 이런 이유로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갔다. 놀라운 건 그렇게 투덜거리며 남편을 따라나섰다가도 예배 말미에 눈물 콧물을 쏟으며 은혜를 받고 있는 건 늘 나였다. 남편은? 당연히 물범처럼 자고 있지. 지상에서 가장 감정 기복이 심하고 가여운 영혼 하나를 신 앞에 데려다 놓은 채.


식은 내용만큼 중요하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다. 해야 하는 일뿐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 한다. 늘 최선을 다하고 핑계란 없는 사람.


몇 달 전 24시 무인 카페에 알바 자리가 나서 잠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딱 2분 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 집에 늘어져 있고 싶을 때마다 내가 노트북을 챙겨 매일 출퇴근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루 30분 아침저녁으로 들여다 보고 원두를 채워주거나 테이블과 바닥만 정리해 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알바였다. 책임이 주어지면 매일 성실하게 나가 앉아 글을 끄적일 수 있을 테니 이래저래 내겐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일이 이렇게 쉽다 보니 당연히 페이는 적었다. 특별한 날 스테이크 한번 넉넉히 썰어먹을 정도의 하찮은. 그때부터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고작 한 달에 몇십만 원을 벌려고 아침저녁을 매어 있야 한다고? 차라리 밥을 몇 번 덜 사 먹고 말지. 그래도 친정엄마 보내드리는 용돈 정도는 벌 수 있잖아. 걸핏하면 드러누울 곳을 찾는 나한테 이보다 거저인 알바도 없는데... 그래도 매일매일 책임져야 할 일에 몇 십만 원은 너무 적어....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내 어깨에 위에 탁, 하고 내리 꽂히는 죽비소리. 바로 남편의 목소리다. "야, 할 수 있고 하면 되는 일을 왜 안 해?" 이래서 내가 아예 말을 꺼내질 않는다.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계획이 다 서 있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도 짓고 싶고, 매물로 나온 시골 국민학교를 사들여 캠핑장도 차리고 싶다. 자동차와 자전거에 꽂혀 있을 때는 정비소나 자전거샵을 기웃거리더니, 요즘은 교회 은퇴한 집사님들 사이에 붐이라는 조경사 자격증을 따고 싶어 한다.   


가부장 남편 때문에 맞벌이를 접고 집안에 들어올 때만 해도 나는 남편에 대한 원망이 많았다. 남편이 일중독만 아니었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이렇게 빠르게 바뀌는데, 남편은 '남자는 바깥에서 성공하고 여자는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근대적 기획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웃 남편처럼 아이들과 몸놀이 해주는 남편이 아니어서, 아내의 내밀한 갈망이나 욕구 같은 것엔 무심해서, 내 삶은 불행 언저리에서 오래도록 맴돌았다. 그는 밥벌이에 매몰되어 인생의 의미랄지 가치의 경중과 균형 따위 모르는 인간이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을 대신 짊어주는 사람이다. '루틴 한 일상'과 '경쟁과 스트레스'. 내게 가장 취약한 이것을 온몸으로 버텨주는 사람이다.  덕분에 나는 지금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 수 있다.


일을 사랑는 남편. 그는 노동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가져다주니 권태와 무기력을 넘어선 사람이다. 오늘도 이 무용한 나를 먹여 살리기 위해 노동의 무게를 감당하러 나가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유용한 일을 하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무용한 일을 할지어다.


P.S.

그래서, 남편을 설교시간에 잠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정답! 남편에게 일을 주면 된다. 남편은 몇 년 전부터 예배시간에 설교 방송 송출하는 일을 맡은 이후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고맙다, 남편아. 진심이다. 은퇴 이후도 잘 부탁한다!



기사참고 : [사이언스카페] 코끼리물범은 300m 바다 밑에서 잠든다(조선비즈)

https://biz.chosun.com/science-chosun/science/2023/04/24/AOUNMWSM2NEYTBNVBKF262IR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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