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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un 25. 2024

곽근이 그토록 그럴싸하다는 사실에 속이 뒤틀렸다

방치되며 자라난 우울, 응석받이로 자라난 악 - <호수의 일> 이현

- 유튜브 [쏭마담의 북쌀롱] 책소개를 위한 스크립트용 글모음.

- 특성상 책 속 인용문의 비중이 높은 대신 작가 본연의 글맛에 흠뻑 취할 수 있음.

- 주요 사건이 소개되어 있진 않지만, 등장인물에 대해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으니 아직 책을 읽지 않으신 분은 일독 후 시청해 주세요.


https://youtu.be/2_fH-UQjOCE?si=Q2c_7RqPsSgUB22N



#어느새 주위에 만연해져 버린 우울

_우울증은 슬픈 것이 아니라, 감정이 없는 감정의 상태.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 (9p)

내 마음=얼어붙은 호수. 마음이 얼어붙어 안전하다니. 이 문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는지 우울증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울은 슬프다거나, 기쁨이 없는 부정적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그 어떤 감정에도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 상태. 즉 감정이 없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한 감정은 모든 이에게 있다. 살다 보면 슬픈 일이 있다가도 다시 기쁜 일이 생기고, 그에 따라 우리의 감정도 늘 오르락내리락한다. 부정적인 감정도, 긍정적인 감정도 따로 있지 않다. 모든 감정은 중립적이며, 그 자체로 소중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경우, 그 감정이 표현되지 못하고 꽁꽁 얼어붙은 채 어느 한 시기를 지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오래되면 ‘감정이 없는 감정의 상태’로 진행된다. 우울감은 슬픈 일이 지나가고 기쁜 일이 오면 슬픔에서 기쁨으로 감정이 전환된다. 하지만 우울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하면 그땐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반응하지 않게 된다. 어떤 일에도 반응하지 않는 무감각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우울이 아직 어린아이 일 때 내 마음은 이 정도쯤에서 오간다.

‘지금 슬픈 일이 있어, 좀 우울하네. 하지만 괜찮아. 이러다 보면 곧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조금만 참아 보자.’

하지만 연거푸 슬픈 일이 반복되면서 우울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왜 기쁜 일이 이리 더디 오는 거지?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왜 맨날 이렇게 불행한 걸까? 내 인생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아닐까? 이러다 영영 내게 나쁜 일만 생기면 어쩌지?’

기쁨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울은 점점 지쳐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기쁨이 찾아와도 함께 기뻐할 수 없는 토라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움직이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와 같은 마음이.

‘지금 잠깐 기뻐해 본들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다시 슬픈 일이 찾아올 텐데. 그럼 나는 또다시 기쁨을 기다리느라 지쳐 나가떨어지고 말 거야. 언제 올지도 모를 기쁨을 기다리며 계속 상처받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낫겠어.’ 그렇게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착하고 속 깊은 딸 ‘호정’

_눈칫밥 먹으며 자라 자기일 알아서 척척 잘하는


이 책의 주인공 호정은 예쁘고, 공부도 곧잘 하고, 친구관계도 괜찮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엄마 아빠는 태권도 국가 대표 상비군 출신이었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호정을 임신하는 바람에 선수촌에서 나와 지금은 작은 만두 가게를 운영하며 살고 있다. 호정은 바쁜 부모님 때문에 어린 시절 잠시 할머니 집에 맡겨져 적잖이 눈칫밥을 얻어먹으면 살았다. 그러다 보니 일찍 철이 들어 부모 속 섞이지 않고 자기 일 알아서 척척 잘하는 속 깊은 딸로 자랐다. 아니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어느 날 비밀스러운 남학생 ‘강은기’가 호정의 반으로 전학 오기 전까지는.


#전학생 '은기', 가정폭력의 희생양

_자기 하고싶은 말만 하는 애가 아니라, 뭔가 말할 수 없는 걸 품고 있는 애 


전학생 은기도 겉으로 보기엔 평범하다. 늘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고, 농구를 좋아하고, 적당히 애들에게 섞여 농담도 하는. 아니, 카카오톡 계정도 페이스북도 없고 폴더폰만 가지고 다닌다는 점에서 조금 특이한 남학생이다.. 날마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졸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저 우두커니 뭔가 들여다보고만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수상한 남자애. 반 친구들의 평가도 애매하다. 나쁜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나는 너네랑 다르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애. 뭘 물어봐도 대답이 없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애다. 하지만 호정에게 은기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애가 아니라, 뭔가 말할 수 없는 걸 품고 있는 애다. 호정처럼.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을 울어 본 남자애.(p.150)


그렇게 둘은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상처를 조금씩 꺼내 보이며 서로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곽근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기 전까지.


#'곽근', 반에게 제일 잘나가는 남학생

_사배자? 걔네 집 잘살지 않냐?


이 책의 주인공 호정과 은기는 모두 ‘방치되면서 자라난 희생자’다. 작가는 두 인물을 통해 소아우울과 가정폭력이라는 우리 사회 민감한 이슈를 꺼내 놓았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두 주인공이 아니다. 곽근이다. 호정과 은기가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이제 막 다가서려는 순간 둘 사이를 갈라놓는 훼방꾼, 그리하여 마침내 호정의 깊은 우울이 활화산처럼 불타 올라 외부로 터쳐나오게 하는 빌런.


책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곽근은 수학 시험이 어렵게 나올 때에도 1학년 전체에서 유일하게 만점을 받는 남자애다. 수행평가를 대신해주는 학원까지 다니는 공부 잘하는 남학생. 교내 대회 수상 실적도 좋고, PPT 자료나 동영상도 잘 만들어서 조별 과제 때도 인기가 많은. 소문에 의하면 큰형은 공부를 잘해 서울대에 갔고, 작은 형은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걔네 집 잘 살지 않냐?”

내가 그렇게 묻자 나래는 철부지를 대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재산은 미리 아빠 이름으로 다 돌려놨지. 어디 가난한 동네 반지하에다가 가짜로 집도 꾸며 놨었대. 일 년인가, 이 년 동안. 사배자 전형 조건 맞추느라고.”

나래가 엄마한테 들은 얘기라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세상이 그렇게까지 못돼 먹었을 리가 없잖아. 만약 그렇다면 나(같은 애)는 어떻게 살아? (107-108p)


#곽근과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_그러니까 호정은 중학교 때, 이렇게 처신하면 안되는 거였다.


곽근은 잘 나가는 남학생의 전형이다. 공부도 운동도 게임도 농담도 다 적당히 잘하고, 잘생긴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잘 사는 집 아이 같은 귀태가 흐르는. 혹 곽근의 여친이 된다거나 하는 건 언제라도 괜찮은 구설수에 오르는 일 같은 그런 남학생. 그러니까 호정은 중학교 때, 곽근이 호정에게 대시했을 때 이렇게 처신하면 안 되는 거였다.


어느 날, 급식실에 자리 잡고 앉은 참인데 곽근이 내 앞에 나타났다. 같이 온 내 친구를 슬쩍 어깨로 밀어내고 내 앞자리에 앉았다. 마치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뭐야...”

친구가 짜증스럽게 말했고,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곽근네 반 애들 쪽에서 우우거리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 컸다. 우리 반 애들뿐 아니라 다른 반 애들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 쪽을 봤다.

그 순간 곽근이 싫어졌다. 관심이 없는 걸 넘어, 진저리 나게 싫었다.


곽근이 그동안 떠벌렸던 연애들, 그게 정말 다 연애였을까? 그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 여자애들도 그걸 곽근이랑 사귀었던 거라고 기억할까? 여기서 일어나면 그 또한 소문이 되겠지. 정호정? 걔 성깔 장난 아니잖아. 둘이 깨졌나? 역시 둘이 사귀었네. 근데 안 사귄다고 시치미는 왜 떼냐? 아주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곽근을 걱정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이러고 가 버리면 곽근은 진짜 제대로 망신인데. 그렇게 망신당할 만큼 잘못했나? 그냥 나를 좋아했을 뿐인데.


나는 혼란스러운 지경에 몰려 있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무런 마음조차 없었는데. 그런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아닌 건 아닌 거다. 곽근과 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곽근의 전 여친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곽근이 눈을 크게 떴다. 여유롭게 기대고 있던 등을 얼른 바로 세웠다. 테이블 너머로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 했다.

“야, 앉아 봐.”
 “뭐?”

그러면서 나는 식판을 들었고, 곽근은 반쯤 일어서서 내 쪽으로 손을 더 내밀었다. 그걸 피하려다 나는 조금 중심을 잃었다. 식판이 기울어지면서 곽근의 교복 셔츠에 육개장이 쏟아졌다. 그리 뜨겁지는 않았지만, 아쉽게도.

곽근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노려 보았다. 급식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무슨 일이니?”

선생님들 테이블에서 어느 선생님이 일어나 물었다. 아이들은 다시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눈으로는 나랑 곽근을 흘금거리면서. (205p)


#그날 이후, 호정은 곽근의 소문이 되었다

_나는 곽근의 여친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곽근은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애의 감정 따위 뭐 어때. 그저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조금 밑밥을 깔아놓고 호기롭게 호정에게 다가가면 다른 여자애들처럼 얼씨구나 하고 내 손을 덥석 잡을 거야. 나를 받아들일걸? 내가 언제 한번 여자애에게 거절당해 본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호정은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온갖 자원을 그러모아 꼭 갖고야 마는 곽근과 그의 부모의 열심을 ‘못돼 먹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소녀였다. 그러니 곽근이 쳐 놓은 덫에 순순히 걸려들 리 없지 않은가. 호정이 안하무인 격인 그의 태도에 진저리 친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곽근은 이 날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호정이 은기에게 호감을 보이자, 은기의 뒷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평범하고, 모호하고, 남의 뒤에 기생하는 악

_한번도 손해보거나 제재당해 본 적 없이 자라난 악이라서. 그에겐 전혀 연민할 구석이 없다.


한나 아렌트의 그 유명한 악의 개념(악의 평범성)처럼, 곽근의 악의는 너무 평범하고 보통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찾아지지 않는다. 게다가 ‘악’의 속성이 그러하듯, 곽근은 늘 몸을 숨기고 남 뒤에 기생한다. 은기에 대한 소문을 퍼뜨릴 때도 직접 나서지 않고 자타 공인 ‘나쁜 남자애’를 앞세워 은기의 과거를 까발린다. 은근하고 교묘하게. 곽근의 서사를 따라가 보면 호정이 왜 그렇게 그를 진저리 쳤는지 충분히 공감이 된다.


최근 영화와 소설에 등장하는 빌런들의 특징은,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 방치되며 자라난 악인 경우가 많다. 마냥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곽근은 응석받이로 자라나 악이 된 케이스. 오로지 나만 있고 이웃은 없는. 이웃에 대한 공감능력이 불능하다.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누리는 온갖 혜택과 유리한 일상 저편에, 누군가는 간신히 용기내고 끌어모아 헤쳐가는 일상도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빌런이다. 한 번도 손해 보거나 제재당해 본 적 없이 자라난 악이라서. 때문에 그에겐 전혀 연민할 구석이 없다.


#방치되며 자라난 우울, 소아 우울

_ 호정의 우울엔 조금 억울한 부분이 있다.


책을 읽고 나서 한 가지 특이했던 것은, 호정에 대한 독서지기들의 반응이었다. 솔직히 잘 공감하지 못하겠다는 의견. 아니, 어린 시절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고, 이 정도로 우울증에 걸리면 세상에 안 걸릴 사람이 어딨어?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잖아. 바빠서 부모가 잠시 애를 못 챙겼을 수도 있지. 나도 어렸을 때 형편이 안 좋아서 적잖이 눈칫밥 먹고 자랐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꽁해 있진 않았다고.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그 정도 어려움은 겪으며 자란다. 얼마쯤 아프다 시간이 지나며 툴툴 털어버리면서 비로소 어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들이 그런 건 아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도 없던 어린 시절. 무방비한 상태에서 통과한 어떤 사건과 시간은 때로 어린 소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더욱더 어른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여기저기 우울이 만연하다. 분명 예전과 비교하면 지나칠 정도다.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우울증엔 ‘여러 얼굴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오랫동안 은신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해 있기도 하단다. ‘내 안에서 숨죽여 나를 지켜보다 어떤 계기로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고. (278-279p)


#소설 읽는 자의 특권

_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우리들의 어린 시절. 우울할 일로 말하자면 지금의 청소년들만큼 많았다. 다만 그때는 우울이 감히 나설 ‘어떤 계기’를 갖지 못했을 뿐이다. 우울을 수용할 만큼 사회적 인식도 여유도 없었다. 없었던 게 아니라 드러날 출구를 찾지 못할 만큼 다들 너무 바쁘게 살았다.


인물의 성격과 심리를 묘사하는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인지, 책을 손에 들자마자 한 큐에 다 읽었다, 인물들이 울고 웃고 흔들릴 때마다 함께 그 감정에 동요했고, 개인적으로 작가의 분신들에 충분히 설득당했다. 읽는 동안 내 마음 어느 한 귀퉁이도 조금 녹아내렸던가.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얼어붙은 땅에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나는 읽는 내내 내 마음의 변화를 기쁘게 수용하고 호정에게 함께 실어 흘려보냈다.


이것이야말로 소설 읽는 자가 누리는 특권이자, 소설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는가.  


#책갈피


- 은기도 그렇게 울어 본 거였다

“잘 우는 앤 줄 몰랐는데.”

“나 잘 안 울어. 안 우는 애야.”

... 그때 은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한 걸음, 나도 은기 손을 마주 잡았다. 몇 걸음 가다가 은기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걸었다.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소리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손을 잡고 있었고,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손이란 참 힘이 세구나. 그저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온 마음이 전해지는구나. 따스해지는구나. 또 그만 눈물이 솟았다. 조금도 슬프지 않은데, 왜, 대체.

은기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울지 말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은기도 알고 있는 거였다.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있다는 걸. 은기도 그렇게 울어 본 거였다. (150p)


- 내게는 그 밖에 많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날 무슨 더 분노할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그날은 고모가 특히 화를 냈다. 저녁을 먹다가 큰소리가 오갔고, 할머니가 울었다. 나는 모르는 척 계속 밥을 먹었다. 곰국에 밥을 말아서, 할머니가 잘게 잘라 물에 담가 둔 깍두기랑 같이. 곰국은 우유처럼 진하고 밥알은 보들보들했다. 깍두기도 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그리고 나는 비참했다. 비참하다는 말을 모른다고 해서 비참한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말보다 마음이 먼저 생겨났을 것이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러고 나니 정말로 난처해졌다. 큰소리는 그쳤지만, 식탁에는 할머니의 조용한 눈물 그리고 고모와 삼촌의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눈을 내리뜬 채 바닥이 드러난 국그릇을 숟가락으로 살살 긁기만 했다. 무언가 먹을 것이 더 있기를 바랐다. 그때 고모가 내 쪽으로 눈을 돌리며 물었다.

“맛있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곰국이 맛있긴 했다. 내게는 그 밖에 많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중 내가 이름을 아는 마음은 맛있다는 것뿐이었다. 고모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짜증이 난다고 중얼거렸을 것 같기도 하다. 삼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질렸다는 듯이. 어쩌면 그런 말을 했던가? 225


- 곽근이 그토록 그럴싸하다는 사실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곽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곽근을 열심히 본 건 처음이었다. 솔직히 곽근은 꽤 근사했다. 반듯하게 넓은 어깨, 단정하게 자른 머리, 잘 손질된 교복. 옆자리 애가 무슨 말인가 하자 곽근이 그 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조금 웃었다. 하여간 우리 반 참 가지가지 다이내믹해. 곽근이 그렇게 말했다. 적당한 바리톤의 목소리에 인상 좋은 웃음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꽤 하는 애. 세련된 발음으로 영어를 하고 학생부 독서 이력에 교양 있는 책들이 빼곡한 애. 곽근은 박인석 같은 애들처럼 욕을 입에 달 고 살지도 않았다. 혀를 내민 셀카 따위를 페이스북 프로필로 걸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남자 친구 삼고 싶어 할 만한 애였다.

곽근이 그렇다는 사실에, 그토록 그럴싸하다는 사실에 속이 뒤틀렸다. 불이 일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 가겠지. 레벨 테스트에서 또 좋은 성적을 받겠지. 끝나면 학원 앞에 엄마 차가 기다리고 있겠지. 엄마, 배고파. 얼른 집에 가지. 엄마가 간식 준비해 뒀어. 아, 역시 엄마밖에 없어! 집에 돌아가 아빠한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겠지. 다녀왔습니다. 그래, 우리 아들 고생이 많지? 헤헤, 고생이 많다고 하면 뭐 해 줄 건데? 그러고 말간 얼굴이 되어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켜고 단톡방에 이런 말들을 쓰겠지. 우리 반 참 가지가지로 다이내믹하다니까. 룸 카페? 거기서 뭘 했겠냐? 뻔하지. 낄낄. 정호정 요즘 좀 미친 거 같지 않냐? 걔는 중학교 때부터 상또라이였어.

나는 일어섰다. 내 손은 이미 음악책을 들고 있었다. 그대로 두 손을 치켜들어 곽근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260p)


 -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므로.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호수와 같아. (3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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