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Jul 05. 2024

천국에서 영원히, 언제까지 영원히?

니체의 영원회귀와 하나님 나라 - <심연호텔의 철학자들>, 존 캐그

유튜브 [쏭마담의 북쌀롱] 책소개를 위한 스크립트용 글모음.

https://www.youtube.com/watch?v=L52qou6lkPk


#나는 천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꽤 오랫동안 나는 천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천국에 가지 못할까 봐, 가 아니라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될까 봐.  

우리가 흔히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갖게 되는 이런 오해는 '영원히 사는 것'이 우리의 직관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죽음이든 마감이든 졸업이든, 무슨 일이든 끝이 있음을 인지하며 사는 인간으로서는, 그 영원을 가늠할 재간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히 좋을 수는 없다. 어떤 것이 좋은데 계속 좋아. 끝도 없이 영원히. 언제까지 영원히? 계속 계속 영원히! 이렇게 영원회귀라는 쳇바퀴를 돌리다 보면 우리는 그곳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뭐든 상관없이, 그만 무한히 무언가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에 질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원회귀, 재편집이 불가능한 무한 반복의 세계

철학자 니체도 어느 날 호숫가를 걷다가 이와 비슷한 질문에 봉착했다. 하지만 당시 그에겐 천국이란 개념이 그닥 매력이 없었던 건지, 아님 그때도 편두통이 도져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루 살로메와의 연애사가 잘 안 풀려 너무 외로워서였는지. 니체는 나보다 조금 더 비관적으로 질문을 몰아간 것 같다. 그 유명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등장하는 책 <즐거운 학문>(1882)의 전문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낮이나 밤에 악령이 당신의 가장 외로운 외로움 속으로 숨어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네가 이제껏 살아왔고 지금도 사는 이 삶을 한번 더,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게 될 거야. 새로운 것은 전혀 없을 거야. 반대로 모든 고통과 기쁨과 생각과 한숨 각각이, 또한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작거나 큰 모든 것 각각이 똑같은 순서와 배열로 너에게 필연코 돌아올 거야. 이 거미, 나무들 사이로 비춰드는 이 달빛, 심지어 이 순간과 나까지...” (84~85p)


#그렇더라도 “너는 이것을 다시, 무수히 반복해서 원하는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쓴 에릭 와이너의 표현(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을 빌자면, 니체가 말하는 이 삶은 편집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아온 삶의 어떤 것도 빼거나 더할 수 없이 정확히 똑같이 반복된다. 우리의 삶은 누구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만큼이나 지우고 싶은 많은 순간들로 가득하다. 대학에 합격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고 감격했던 순간도 있지만, 남편과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사춘기 아이에게 핸드폰을 집어던지던 시간도 있다. 이뿐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암선고를 받고 항암 치료를 받던 끔찍했던 몇 해와, 가족 중 하나를 불의로 사고로 잃거나 혹은 교통사고로 신체 일부가 영원히 절단되는 시간도 있다. 다시 한번 살게 된다면, 당신은 이 모든 실수와 불운과 비극의 시간을 다 삭제하고 재편집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걸 전부 받아들이거나, 전부 잃거나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너는 이것을 다시, 무수히 반복해서 원하는가?” 이것이 니체가 ‘영원회귀’ 사상에서 던진 질문이다. 


이즈음 되면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좋은 것만 반복되는 천국도 끔찍해 죽겠는데, 무수한 실수와 비극으로 가득한 인생까지 다시 반복해야 하다니. 도대체 니체는 왜 이렇게까지 생각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걸까? 


#인간은 모두 일상의 반복을 통해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왜?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을 쓴 존 캐그에 의하면, 이런 형이상학적 생각 자체를 니체가 처음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아주 오래된 개념이다. 제 꼬리를 문 뱀(우로보로스ouroboros), 힌두교와 불교가 각각 말하는 윤회나 업의 교리에서도 볼 수 있듯, ‘순환’이라는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의 종교와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꽃은 피었다 지고, 노인이 죽으면 아이가 태어난다. 낡은 건물이 무너지면 새것으로 교체되고, 처음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도 익숙해지면 어느새 루틴 한 일상이 된다. 우리의 삶 자체가 탄생과 죽음이라는 순환 고리의 무한 반복이라는 말이다. 자연도, 인간도 모두 이렇게 일상의 반복을 통해 삶을 영위해 나간다. 이것만큼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개념도 없다. 게다가 어떤 인생도 모두 좋은 것으로만 채워진 인생은 없다. 자신의 인생에 만족한 사람의 삶에도 희극과 비극이 공존한다. 그러니 인생이 반복된다면 희비극도 공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왜 우리는 무한히 반복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철학계의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

잘 알려진 것처럼, 니체에게 영원회귀라는 개념의 첫 싹을 틔워준 건 철학계의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였다. 다음은 그의 책 <비관주의 연구>의 한 장면. 


“살면서 두세 세대를 보는 사람은 축제에서 마술사의 공연장 안에 한동안 앉아 공연을 연속해서 두세 번 보는 사람과 유사하다. 마술사의 수법은 단 한 번만 보여줄 의도로 고안되었다. 그 수법들이 더는 새롭지 않고 관객을 속이지 못한다면, 효과는 없어진다.” 니체는 이런 생각에 대체로 동의했으며, 거의 모든 경우에 우리 대다수는 영원회귀를-이것을, 그리고 모든 것을 무한히 반복하기를-생각하면 참담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단 하나의 삶의 안타까움, 지루함, 실망을 무한정한 미래 내내 다시 산다면 그것은 정말 지옥 같을 터였다. (85p.)

(...)


그리고 니체가 그의 생각을 여기에서 멈췄다면, 그는 그렇고 그런 비관주의 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 생각을 사고 실험에서 끝내지 않았다.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최고의 긍정공식으로 승화시킨다. (여기에 니체의 비범함이 있다). 


#영원회귀는 삶의 행보로 응답해야 할 무거운 질문

영원회귀는 형이상학적 서술이나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처럼 삶이 이토록 끔찍하게 따분한 이유에 대한 설명에 국한되지 않는다.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말이 아니라 ‘삶의 행보’로 응답해야 할 도전이다. 혹은 이런 표현이 더 낫다. 영원회귀 개념은 하나의 질문이다. “모든 것 각각에 깃든 질문, ‘너는 이것을 다시,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원하는가?’라는 질문이 당신의 ‘행동’ 위에 가장 무거운 짐으로 놓일 것이다! 바꿔 말해, 이 궁극적이며 영원한 긍정과 다짐을 그 무엇보다도 뜨겁게 열망하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삶에 얼마나 호의적이어야 할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시 사는 것에 만족”할까? 이때의 만족하기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외면하기, 혹은 그 운명을 자장가 삼아 잠들기, 혹은 그 운명 앞에서 체념하기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이 이것을 그리고 모든 것을 영원히 다시 할 것임을 알면서도 당신의 심장이 만족하도록 사는 것이다... 니체의 주장에 따르면 영원회귀의 긍정은 오로지 당신이 당신 자신과 삶에 잘 적응하려 하고 적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86p.)


#편집할 수 없다면, 그것들이 '옳은 선택인 편이 더 낫다

시시포스처럼, 인간은 누구나 굴러 떨어지는 바퀴를 반복해서 끌어올리는 것 같은 어떤 숙명을 안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루틴과 의무와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운명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운명을 받아들이고, 책임지고, 옳은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니체는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소름 끼치는 무한한 단조로움’을 ‘절대적 책임을 받아들이게 하는 지속적인 자극’으로 뒤바꿀 수 있다고. 어떻게, 아니 왜? ‘선택들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그것들이 ‘옳은’ 선택인 편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87p)


이제 나는 다시 나의 첫 질문으로 돌아온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긍정공식은 천국에 대한 내 생각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천국에서 영원히~언제까지 영원히? 그 끔찍한 무한 반복의 영원. 그걸 어떻게 긍정하도록? 적어도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죽은 후에 가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쓸데없는 사고실험 대신 나에게는 이런 질문이 더 필요하다. 내가 지금 발 딛고 선 이곳에서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질문이. 


#천국은 이땅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진행형

그 질문이 철학적인 질문을 넘어 내게 신앙적인 질문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천국에 대한 개념이 최근에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천국은 내가 죽으면 가게 되는 천상의 어떤 곳이었다. 이번 생은 혹 망했더라도 그곳에선 다른 선택과 재기를 노려볼 만한. 그곳엔 슬픔도 눈물도 없고 기쁨만 있는 곳이라니, 그곳이라면 이 땅에서 미처 전하지 못한 진심이 왜곡 없이 전해지고, 애쓰고 노력한 것들이 딱 만족할 만한 결실로 내게 보상되지 않을까? 어느 순간부터 천국은 이렇게 이 땅에서 실패한 자에게 주어진 인생 2회 차, 재기의 기회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간 신학계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고, 그동안 왜곡되었던 천국에 대한 개념이 새롭게 정립되었다. 천국은 우리가 죽으면 가는 천상의 ‘그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내가 구약과 신약의 신을 주라 시인했던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진행형이다. 그러니까 내가 기독교의 신을 받아들인 게 분명한데, 여전히 내가 사는 이곳이 지옥같이 느껴진다면, 나에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과 함께라면, 내 삶의 조건들이 비록 지옥 같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중심은 천국처럼 풍성하게 살아낼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영원회귀는 지금 이곳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질문

이 자각이 니체의 실존적 질문과 나를 맞닥뜨리게 했다. 매일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과 또 지금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 미래. 내가 이 소름 끼치도록 단조로운 일상을 내 것으로 책임 있게 끌어안는 것. 그리하여 생에 대한 충동으로 뒤바꾸는 것. 니체가 말한 이 태도야말로 어쩌면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이루어 내야 하는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하고 가장 적당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택의 총합이고, 편집할 수 없고, 단지 한 번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옳은’ 선택인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그렇다면  영원회귀 사상에서는 왜 재편집이 불가능할까? 

우리에게 인생 2회 차가 주어지더라도 재편집이 불가능하다는 니체의 이 개념이 여전히 껄끄럽다면, 최신 과학 이론으로 조금 더 보완해 볼 수 있겠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먼 미래에 과학이 고도로 발전해 우리가 시간여행을 할 수 있게 되더라도, 미래로 가는 타임머신은 가능하지만, 과거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한다. 바로 ‘타임 패러독스’ 때문인데... 타임 패러독스란, 우리가 시간여행을 할 때 필히 발생하는 역설이다. 거칠게 말하면,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한 가지를 바꾸더라도 그것은 '나비효과'처럼 일파만파 거대한 변화를 일으켜 다시 돌아왔을 때 지금의 나와 똑같은 내가 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이 결정적인 이유는, 이 타임 패러독스가 물리학 고정불변의 법칙인 ‘에너지보존의 법칙’에 의해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란, 우주가 탄생하면서부터 발생한 에너지가 지금까지 조금도 사라지거나 더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법칙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연필을 손에 쥐었다 바닥으로 떨어트리면 소리를 내고 멈춘다. 그리고 이 평범한 낙하 과정 중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은 온갖 에너지들의 이동이 발생한다. 연필을 들어 올리기 위해 나는 내 몸속 에너지를 사용하고, 이 에너지는 연필을 들어 올리는 동안 위치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연필이 떨어지는 동안 운동에너지로 변환되었다가, 바닥에 닿는 순간 소리에너지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의 양상이 바뀌는 동안에도 에너지의 총량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다. 인간과 지구와 우주는 초기부터 모두 커다란 흐름 속에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때문에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의 지구와 우주의 에너지를 크게 뒤틀어 놓는다.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타임머신을 타기 직전의 나와 전혀 다른 내가 되어 있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 인생에 2회 차는 불가능하다. 다른 우주에 또 다른 나는 존재할지 몰라도! ^^ 이 과학 이론이 영원회귀라는 니체의 철학적 가정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책소개> 심연호텔의 철학자들

니체 전문가이자 철학교수인 저자가 니체의 흔적을 좇아 알프스 질스-마리아를 여행하며 들려주는 니체 안내서다. 19세, 자살로 마무리될 뻔했던 첫 여행을 회고하며 17년 만에 그는 다시 어린 딸, 아내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세 살 배기 딸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보니, 다른 어떤 개요서 보다 생활밀착형 니체를 만나볼 수 있다. 여정 가운데 니체의 주요 개념 – 생의 비극, 영원회귀, 말인과 초인, 선악의 계보, 주인과 노예 도덕, 퇴폐와 역겨움, 생의 의지와 자기 극복 등이 자연스럽게 설명되어 있다. 읽고 나면, 니체를 좇아 알프스를 찾았던 수많은 니체 순례자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책갈피> 

과거엔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던 행동이

과거엔 ‘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루어지던 행동이 지금은 ‘돈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다“라고 니체는 주장한다. 22p.


고통은 우연의 결과일 리 없다

니체와 쇼펜하우어가 19세기 중반에 발전시킨 비관주의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사악하다는 믿음에서 유래했으며, 그들은 이 믿음을 소년 시절에 습득했다. 그들은 세상의 고통을 부정하거나 치장하기를 거부했다. 무슨 의미든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고통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쇼펜하우어는 1850년에 이렇게 썼다. “고통이 삶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목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실존은 자신의 목표를 전혀 성취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세상 어디에서나 넘쳐나며 삶 자체로부터 떼어낼 수 없는 욕구와 필요에서 기원하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어떤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는 순전한 우연의 결과로 간주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50p.


칸트는 변비에 걸린 정신의 확실한 징후

캐럴은 칸트주의자다. 이마누엘 칸트는 일반적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평가받지만, 니체는 칸트를 ‘파국적인 거미’로 칭했다. 관념론이라는 거미줄을 짜서 너무나 많은 좋은 사상가들을 얽어맨 시스템 제작자라는 뜻이다. 칸트는 계몽주의의 이상들인 질서, 조화, 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무의 화신이었다. 니체는 바로 이 철학적 개념들을 해체하려 애쓰며 평생을 보냈다. 칸트는 자기 통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정확하며 열정 없는 통제였고, 니체는 그런 통제가 기독교의 경건 및 자기희생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도보여행이나 극한의 단식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차분하고 반복적인 산책을 했다. 매일 산책하면서 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의 경계를 감히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유명한 칸트의 산책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고 한다. 이런 제약된 순회는 니체에게 상상할 수조차 없는 행동이었다. 그것은 변비에 걸린 정신의 확실한 징후였다. <안티크리스트>에서 칸트를 언급하면서 니체는 이렇게 쓴다.

‘기독교적이며 독단적인 창자를 지닌 이 허무주의자 ’칸트‘는 쾌락을 걸림돌로 여겼다. 어떤 내적 필연성도 없이, 어떤 심층적인 개인적 선택도 없이, 쾌락도 없이 ’의무‘의 자동인형으로 일하고 생각하고 느끼기보다 더 신속하게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행동이 과연 있을까? 이것은 바로 퇴폐에 이르는 비법, 심지어 멍청함에 이르는 비법이다. 칸트는 백치가 되었다.’

캐럴은 더없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녀는 자유를 변덕스러운 열정에 맞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합리적 능력에 맞춰야 한다는 칸트의 믿음에 끌렸다. 그녀가 보기에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의 유산을 확대하려 애쓴 니체 같은 사상가들은 변덕스러운 열정에 휘둘렸을 뿐이다. 칸트에 따르면, 감정은 도덕정 명령과 개인적 선호를 혼동하게 함으로써 개인을 그릇된 길로 이끌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열정에 이끌릴 때 개인은 도덕적 의무를 간과하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캐럴이 보기에 니체는 약탈적인 멍청이 거나 최소한 애처로울 정도로 착각에 빠진 사람이었다. 53-54p.


결혼 - 안타깝구나, 쌍을 이룬 영혼들의 오염이여!

영원한 독신자 니체는 결혼이 전혀 다른 두 가지 형태를 띨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결혼은 “하나의 긴 어리석음”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어리석음 안에서 처절한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곤궁함을 통상적인 삶의 온갖 구속 장치들로 은폐한다. “안타깝구나, 쌍을 이룬 영혼들의 오염이여!” 니체는 외친다. “아아, 한 쌍의 참담한 만족이여!” 캐럴과 나는 결혼할 때 “쌍을 이룬 영혼들의 오염”을 다시는 영속시키지 말자고 약속했다. 캐럴이 기꺼이 나와 함께 도보여행을 하겠다는-함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것은 이 약속을 지키는 한 방법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결혼은 길게 이어지는 오류일 수도 있지만 또한 다른 무언가, 더 높은 무언가의 실현일 수도 있다. “하나를 창조하려는 둘의 의지는 그 의지를 창조한 자들 그 이상이다. 서로를 그런 의지를 품은 자로서 숭배하는 것을 나(니체)는 결혼이라고 부른다. 57p.


어버이 노릇이라는 책무들 앞에서 공포를 느끼며 전율하는 사람만이

캐럴을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자식을 원한 적이 없었다. 손톱만큼도 원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여전히 자식을 원하지 않는다. 내 성년기의 삶 대부분의 기본 전제는 부재했던 나의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였다. 그리고 나는 베카나 캐럴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조용히 품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내가 베카나 캐럴을 버리는 편이 모두에게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자식 없는 니체가 묻는다. “너는 자식을 욕망할 자격이 있는 남자인가? 너는 성공적인 남자, 자기 정복자, 네 격정의 지배자, 네 덕의 주인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실망, 이기심, 불안정성. 부모는 이런 것들을 억제한다고 여겨지지만, 내 제한된 경험상 이것들은 정확히 육아를 할 때 발생하는 심리현상이다. 내가 아는 철학자 중에 자식이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문데, 내 친구 클랜시는 그런 철학자 겸 아버지다. 최고의 니체 번역자로 꼽히는 그는 어버이 노릇은 바위 깨기와 비슷한데, 다만 더 고되다고 말한다. 과거에 남자들은 ‘생활비 벌기’가 육아 못지않게 어렵다는 핑계를 대며 그 고역에서 손을 뗐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핑계는 거창한 코미디요, 여자를 집안에 눌러 앉히는 데 효과적인 편리한 문화적 신화다. 이제 21세기에 가부장주의가 더욱 쇠락함에 따라 더 많은 남자들이 어버이 노릇의 고통스러운 진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려움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일 때가 많다. 


베카가 나에게 몸을 기대며 팔을 잡아당겼다. “아빠, 쉬 마려워.”

“그래, 그래, 아빠도 알아. 아빠도 마렵거든. 1분만 가면 내리니까, 그때까지 참을 수 있지?”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데모크리토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식 키우기는 불확실한 사업이다. 오직 싸움과 걱정으로 한평생을 보낸 뒤에야 성공에 이른다.” 육아는 매우 어렵다는 진부한 얘기가 아니다. 이 인용문에 담긴 것은, 어버이 노릇이라는 창자 꼬이는 긴장으로부터의 해방은 오직 어버이인 당신이 죽어야만 이루어진다는 더 씁쓸한 주장이다. 육아에 넌더리가 나서 달아나고 싶어 지더라도, 그 심정은 단지 육아에 마음 쓰고 있음을 뜻할 뿐인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폴리스를 이끌기에 적합한 유일한 지배자는 지배자 노릇을 꺼리는 지배자라고 말한다. 잘 다스리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잘 다스리기가 쉽거나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기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산출한다. 권력을 원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릇된 이유로 권력을 원한다. 나의 가장 깊은 부분을 움켜쥐고 나의 금지된 생각들을 풀어놓는 나에게 이 생각이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어버이 노릇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버이 노릇에 포함된 책무들 앞에서 공포를 느끼며 전율하는 사람만이 그 책무들을 짊어지기에 적합할지도 모른다. 


산 아래에서 나는 베카를 들쳐 업고 내달렸다. 관광객들을 헤치고 나가 줄을 서고, 화장실 사용료로 쓸 스위스 동전을 찾아 여기저기 뒤적거린 뒤에, 마침내 변기 앞에 도착했을 때, 베카와 나는 둘 다 축축해져 있었다. 나는 어른 노릇을 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하고는 유아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베카가 내 침울한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빠, 미안.” 아이가 속삭였다. 137-139p.


최고의 성공은

유명한 순례자들은 어떤 먼 장소에서 위안을 구하고 발견한다. 오로지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신을 향한 고된 길을 걸어야만 우주적 화해가 성취된다. 그러나 어쩌면 실패한 순례자들도 약간의 구원을 발견할 것이다. 고통은 단지 고통이라는 것, 무덤은 텅 비었다는 것, 단 한번 발을 씻는 것으로 인간 실존의 때를 벗겨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한 일부 순례자들은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구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패한 순례자가 바라는 것은 약간의 다정함, 그리고 세상이 아예 한 톨의 희망도 없는 곳은 아니라는 단순한 직감이 전부일 것이다.


순례의 후반부, 곧 사회로 복귀하는 여정은 여러모로 전반부보다 훨씬 더 힘들다. 피로감은 확실히 더 심하고, 순례 초기에 생긴 상처들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잘 알려진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랐다. 그는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자 했다. 그것은 힘든 경험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삭과 함께, 당신이 죽이고자 했던 아들과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상상해 보라. 이 여정이 훨씬 더 힘들지 않겠는가? 당신이 죄책감, 고통, 실망을 용케 헤치고 집에 도착하면, 어쩌면 집 자체가 당신이 처음에 떠났을 때와 달라져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성서 속의 욥처럼, 모든 것을 잃은 뒤에 모든 것을 두 배로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실패한 순례자들이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뒤늦게 성공에 이르렀을까? 물론 이 성공은 기독교도가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지만, 어쩌면 이 성공이 더 나을 것이다. 아니, 이것이 최고의 성공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실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순례자는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부드러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는 드문 순간에 승리할 것이다. 161-162p.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한계를 부여할까?

전통적으로 아버지 노릇의 핵심은 아이가 느끼는 가능성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아빠가 제일 잘 알아 “라는 표현의 짝꿍은 ”아이는 그렇지 않아“이다. 분명 이런 입장이 옳을 때가 있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위험한 산에 오르는 것은 막아야 마땅하다. 아이들은 종종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해로운 가능성을 탐험하고, 그럴 때 부모로서 우리는 실존적 자유가 아이들에게 부과하는 위험을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니체를 계승한 실존주의자들은 우리의 지나친 위험 회피는 어떤 상황의 실제 위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불안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불안과 공포. 일상에서 우리는 불안과 공포를 열심히 회피한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유럽 철학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사상가들은 불안과 공포가 회피할 수 있거나 회피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니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에 따르면 공포는 특정 대상이나 원인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불편하게도 인간임이라는 구덩이 자체에서 나온다. 키르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공포란 ‘자유의 가능성을 감지함’이다. 당신의 삶이 지닌 모든 가능성을 상상해 보라. 그 가능성의 개수에 10의 거듭제곱을 곱하고, 거기에 다시 10의 거듭제곱을 곱하라. 마지막으로 당신이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당신 자신에게 금지한 무수한 가능성을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의 느낌이 어떠하든, 그 느낌은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을 약하게 희석해서 느끼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판에 박힌 어른의 삶은 대개 우리를 마비시켜 이런 유형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공포의 힘을 일깨운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한계를 부여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실상 모든 아버지는 아이가 가장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자신이 이런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대다수가 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 자신의 불안을 회피하거나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는 깨달음에 천천히 도달하는 중이다. 아이의 안전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 할수록 결국 우리 자신이 중요하다는 점이 더 명백해진다. 193-195p.


너 자신이 되기의 핵심

강조하거니와 ‘너 자신이 되기’의 핵심은 자신이 늘 탐색해 온 ‘누군가’가 되기가 아니다. ‘너’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기도 아니다. 너의 참된 ‘존재’ 그대로 영원히 실존하기도 아니다. 자아는 어딘가에 놓여 있는 채로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아는 능동적이며 진행 중인 과정 안에서 ‘되다’를 뜻하는 독일어 동사 ‘werden’ 안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영속적 본성은 다른 무언가로 되기다. 다른 무언가로 되기를 다른 어딘가로 가기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자아를 찾아 나선 사람에게는 이 이야기가 몹시 실망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본질은 더도 덜도 아닌 그런 능동적 변화다. 254p.

매거진의 이전글 곽근이 그토록 그럴싸하다는 사실에 속이 뒤틀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