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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ul 23. 2024

우리는 1이 될까?

분자에 좋은점을 놓고 분모에 나쁜점을 놓는다면 - 권여선의 '봄밤'

유튜브 [쏭마담의 북쌀롱] 책소개를 위한 스크립트용 글모음.

https://youtu.be/1xupu_VJqYs?si=0fvGoHS3HF5uQYK4




이 곳은 지방의 중증환자 전문 요양원. 영경과 수환은 각각 알코올중독과 류머티즘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요양원 직원들은 ‘유별나게 의가 좋고 사랑스러운 대신 화약처럼 아슬아슬한’ 고위험군 환자인 이들 부부를 ‘알류 커플’이라 부른다. 오늘은 오랜만에 영경이 외출증을 끊고 바깥 바람을 쐬러 나가는 날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경이 술을 마시러 외출하는 날이다. 영경은 류머티즘이 악화된 남편을 따라 요양원에 들어와 겸사겸사 자신의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금단 현상 때문에 구토와 불면, 경련과 섬망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날이면 한번씩 외출증을 끊어 요양원 밖으로 나간다.  


오늘도 영경은 외출하기 전, 수환의 병실에 들렀다. 똘스또이를 읽다가 재밌는 구절을 발견했다며 수환에게 읽어주고 가겠단다. (24p)


“어떤 정치범에 대한 똘스또이의 설명이야.”

“응”

영경은 손을 더듬어 수환의 손을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보드보로프는 혁명가들 사이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또 훌륭한 학자이고 아주 현명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그를 도덕적 자질로 봐서 일반 수준보다 훨씬 하위의 혁명가 부류로 간주했다.” 

영경은 계속 읽어나갔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노보드보로프라는 혁명가는, 똘스또이에 따르면,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까닭인즉,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면 분자를 초월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영경이 안경을 빼며 수환에게 말한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당신은 너무 똑똑해서 섹시할 때가 있어.”

영경이 씩 웃었다.

“그래? 너무 간헐적이라 탈이지.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1이 될까?”

“모르지.”

수환의 말에 영경이 중얼거렸다.

“내 병은 내 분모의 크기를 얼마나 측량할 수 없이 크게 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아. 당신은 아직도 분모보다 분자가 훨씬 더 큰 사람이야.”

“과연 그럴까?”

영경이 쓸쓸하게 웃었다.

“과연 그래.”

“근데 환아, 나는 사람들이 내 병을 병으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 의사들까지도 그런 것 같아. 그럴 때면 심하게 위축돼. 당신은 어때? 1이 될 것 같아?” (25-26p.)




영경과 수환은 12년 전 어느 봄. 친구의 재혼식이 있었던 한 웨딩홀에서 처음 만났다. 피로연이 열렸던 그날 밤. 첫눈에 그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영경은 전직 중학교 국어교사였다. 서른 둘에 결혼하고 아이를 하나 낳았지만 1년 만에 남편과 합의이혼 했다. 다행히 전남편은 시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육권을 영경에게 넘긴 뒤, 자신은 다른 여자와 재혼을 했다. 대신 한달에 한번만 아이를 자기 부모에게 맡겨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아이가 돌을 앞둔 어느 날. 시부모는 전남편 부부와 함께 앞으로 자기들이 손자를 키울 테니 걱정 말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아이를 데리고 이민을 가버렸다. 영경은 아이를 되찾기 위해 경찰에 납치 신고를 하고 소송을 준비했다. 하지만 언니들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했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함께 기도해 보자고 충고했다. 그때부터 영경은 언니들과 만나지 않았고, 모든 일에서 손을 놓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28p.)


수환은 스무살 때부터 쇳일을 시작해 서른 셋에 작은 공업사 사장이 될 만큼 한때 수완 좋은 남자였다. 하지만 거래처의 횡포로 갑작스럽게 판로가 막히자 안정적으로 잘 굴러가던 공업사는 부도를 맞았고, 아내는 그에게 위장이혼을 제안했다. 그리고 아내는 이혼하자마자 자기 명의의 재산과 집을 모조리 팔아 잠적해 버렸다. 그는 서른 아홉에 막대한 빚을 끌어안은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지만 형편은 나아질 줄을 몰랐다. 그는 그때부터 어제라도 죽을 생각을 단검처럼 지니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수환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병실을 걸어나가는 영경의 깡마른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경과 처음 만났던 그 봄밤을 떠올렸다. 영경은 최근 외출할 때마다 한번도 제때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이틀 만에 들어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지난번에는 일주일 만에 거의 송장 꼴이 되어 돌아왔다. 의료진이 외출을 반대하는 것도 당연했다. 수환 자신만 해도 이제 더 이상 손쓸 수 없어 진통제에 의존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영경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 먼저 어떻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환은 자신이 영경의 외출을 제지할 아무 권리가 없음을 알았다. 설혹 이게 그들에게 마지막 봄밤이 되더라도. 수환은 영경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것이 자신이 영경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임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책 <시학>에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하마르티아 때문에’ 불행에 빠진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7편의 단편은 모두 불행과 비극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하마르티아’적 인물들이 주인공이다. 이 책의 해설을 쓴 신형철 평론가에 의하면 ‘하마르티아’란 원래 ‘화살이 과녁을 비껴가는 일’을 가리키는 말인데, ⓵ 단순한 판단 착오나 실수인지, ⓶ 주인공의 도덕적 성격적 결함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고 한다. (243p.)


신학에서도 ‘죄’를 가리키는 용어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이 바로 이 ‘하마르티아’다. 잘 알려진 것처럼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로 인해 처음 이 땅에 죄가 들어온다. 인간은 이 때부터 창조주의 섭리와 목적에 어긋나는 방식, 즉 하마르티아를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아간다. 재밌는 건, 죄는 실체가 없다는 거다. 죄는 과녁을 비껴가는 화살이기 때문에 늘 결핍과 왜곡으로만 나타난다. 어둠은 빛의 부재, 지옥은 신의 부재처럼. 죄는 늘 무언가의 ‘없음’으로만 존재한다. 때문에 죄의 실체는 늘 모호하고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봄밤’의 주인공 영경도 인생의 어느 시절 과녁을 벗어나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 환자가 되었다. 그의 불행의 씨앗은 분명 타인이 제공한 것이다. 전남편과 시부모가 아이를 빼앗아가지 않았다면?. 언니들이 그때 이 모든 상황을 신의 뜻으로 돌리지 않고 영경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아이 찾는 일을 도왔다면? 분명 영경은 생에 대한 의지를 놓고 이 지경까지 전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람들은 영경에게 죄를 묻는 듯 하다. 똘스토이의 분자와 분모 이야기에서처럼, 영경은 사람들이 자신의 알코올중독을 ‘병으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심하게 위축’됐다. 우리 또한 누군가의 불행을 마주할 때마다 자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설혹 인생에 비극이 찾아오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극복해 내야 한다고. 그렇지 못하고 술에 의존해 살고 있다면, 너에게도 일정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그러니 너 또한 유죄라고. 


이 짧은 단편에서 영경에게 죄를 묻는 이는 바로 영경의 두 언니들이다. 두 언니는 잊을 만하면 영경의 요양원에 찾아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영경이 아무리 퉁박을 주고,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해도. 옳은 소리와 염려를 그치지 않는다. 세상의 가장 비참한 불행을 끌어안고 만신창이가 된 욥을 찾아와 네 고난의 이유를 생각해 보라고 꼬치꼬치 캐묻던 욥의 친구들처럼. 분명 이 불행엔 너의 잘못된 판단과 실수와 성격적 결함이 있을 거라고. 너는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고. 


그런 욥과 욥의 친구들을 향해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이 교만한 것들아!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것들아. 

너희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구나. 


나는 욥기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메시지와 톨스토이가 네흘류도프라는 혁명가의 입을 빌어 했던 말이 똑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들아. 

남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제발 너 자신이나 비춰보려므나. 

신의 자리에 앉아 그만 왕노릇 하려므나.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한다면 그를 참소하는 대신, 

옆에 앉아 그의 곁을 지키주려므나. 

네 입을 가리고,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려므나.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신의 목소리를 듣게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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