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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Aug 16. 2024

왜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강렬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까

 <그림과 눈물> 제임스 엘킨스 저, 정지인 역, 아트북스

 유튜브 [쏭마담의 북쌀롱] 책소개를 위한 스크립트용 글모음.

https://youtu.be/o1yLnqiD8bk?si=q8NfbbQTE3grE60t




스탕달 신드롬 ; 예술 작품을 감상하다가 무아지경을 경험한 사람의 정신적·신체적 반응을 가리키는 용어. 매우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할 때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어지럼증 혹은 환각이나 심한 경우 실신을 하는 경험을 일컫는다.


<그림과 눈물>의 저자 제임스 엘킨스는 어느 날 그런 의문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그림 앞에서 격렬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까. 작품의 예술성 때문에? 아님 감상자의 개인적인 어떤 경험으로 인해? 그렇다면 왜 똑같은 작품 앞에서 다른 사람은 아무런 미동도 느끼지 못할까. 그는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 본 당신들의 경험에 대해 들려 달라고. 별 기대 없이 쓴 이 편지에 미술 애호가 400여 명이 응답했고, 그는 이들이 보내온 다양한 경험을 분석하며 하나의 패턴을 발견한다.


첫 번째 경우에 속하는 이들은 그림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고, 복잡하고, 압도적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바라보기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울었다.

두 번째 경우의 사람들은 그림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있고, 어둡고, 고통스러울 만큼 광대하며, 차갑고, 어떤 식으로든 이해하기에 너무 멀게 느껴져서 눈물을 흘렸다.  (p.12)


매우 밀접한 듯하면서도 완전히 상반된 이들의 경험 앞에 제임스의 호기심은 더욱 발동되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그림과 감상자가 서로 빚어내는 화학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눈물의 비밀을 제대로 고찰해 보기로 한다.  



그가 가장 첫 번째로 찾은 것은 로스코. 그의 추상화 14점이 전시되어 있는 미국 휴스턴의 로스코 채플이다. 흔히 한두 가지 색상의 대비로 표현되는 로스코의 추상화는 20세기 들어 가장 많은 애호가들을 울린 작품이다. 예배당에 걸린 그의 작품은 ‘보통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거대한 자주, 검정 직사각형에 담겨’ ‘이렇다 할 주제도, 제목도’ 없이 ‘중력을 무시한 채 허공에 붕 떠’ 있었다. 그저 덧칠한 흐릿한 붓 자국, 물감을 흩뿌려 반짝이는 듯 보이는 선들. 그 흔적들 사이로 얼굴인지 빗줄기인지 하늘인지 모를 기묘한 형상을 연상하게 하는. 아무 형체 없이 어두운 색깔로만 존재하는 작품. 하지만 애호가들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 보다 로스코의 추상화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작가의 의도였을까? 로스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배당 그림을 의뢰받을 때만 해도 그는 ‘신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그림들에 종교적인 주제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림들이 스스로 어두워져 버리더군요.” 하지만 또 다른 인터뷰에서 그는 다시 말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들은 내가 그 그림을 그릴 때 겪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나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극이나 무아경, 파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내 그림 앞에 설 때 힘없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은, 내가 그 기본적인 감정들을 전달했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p.33) 그리고 그는 몇 년 후 자신의 집 욕실에서 손목을 그었다. 1년 뒤 그의 작품은 휴스턴의 예배당에 봉헌되었다.


제임스 앨킨스는 말한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형태와 그 배경은 필연적으로 보는 사람에게 형태가 있는 뭔가를 떠올리게 한다”고. “로스코는 우리에게 어떤 대상과 그 배경에 대한 불완전한 기억을 일깨우면서, 정작 그 대상 자체는 움켜쥐고 내주지 않는다. 그것은 곧 인간인 우리가 이 세상이 배열되는 방식을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을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일이므로, 우리에게는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다. 혹자는 그가 가장 심오하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상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또는 그의 표현대로 그의 그림들이 ‘필멸성의 암시’를 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그의 그림들은 끈질기게 공허함을 추구하며, 바로 그 점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p.37)


나아가 ‘로스코는 사람들이 상실감이나 공허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바로 이런 질식할 듯한 기분을 느끼길 원했다.’ 저자에 의하면 이것은 근거가 있다. 로스코는 살아생전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그림을 캔버스에서 18인치(45cm) 정도 떨어져 감상할 것을 요구했다. 저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 거리는 ‘복잡한 술집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른 사람과 사이에 두는 정도’의 거리이자, 약간의 불편함이 감지되는 친밀함의 거리다. 그리고 그 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만나게 되는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비극 - 상실, 공허, 죽음 따위를 경험했을 때 일상에서 살짝 물러나 음미하거나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거리일 지도 모른다.


그렇게 관람자들은 로스코의 ‘캔버스에서 보이는 몇 가지 특이한 부분들에 매달려’ 자신의 ‘외로움, 상실, 슬픔, 공허, 비극’ 속에 침잠한다. 자아의 어두운 심연, 인간의 한계와 생의 이면을 마주한다. 자신을 비운다. 고요, 평화, 아름다움, 무아경‘의 세계로 넘어간다. 한낮의 백일몽, 그리스 비극과 카타르시스, 혹은 종교적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초월적 세계와 접속한다. 그리고 눈물은 이런 정신적 작용에 대한 어떤 징후 혹은 표식이다.


출간 및 번역된 지 거의 20년이 넘은 이 책은 최근 국내에 소개된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다가 만났다. 내가 아는 한 작품과 감상자의 거리 및 서로가 빚어내는 상호작용에 관한 안내서 중 가장 탁월하다. 눈물이 말라버린 시대에 운다는 것의 의미, 지식과 시간과 기억이 작품 감상에 미치는 영향, 미적 기준의 변화와 감정의 화학적 작용, 눈물의 종교적 의미와 변화를 다양한 사례와 역사적 고증을 통해 펼쳐나간다. 개인적으로 중세시대 피에타와 우는 성모상을 통해 본 참회와 헌신으로서의 눈물 편이 재미있었고, 낭만적 주정주의에서 계몽시대 주지주의로 이어지는 감상 태도의 변화를 여러 작품, 화가, 사조와 함께 설명하는 작가의 박식함에 매료되었다. 작가의 복잡 미묘한 표현들을 그에 딱 걸맞은 단어와 배열로 바꿔놓은 번역가의 탁월함은 신의 한 수.


마지막으로, 오늘날 예술 작품에 대한 많은 이들의 뜨거운 관심과 열의를 지켜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현대인들은 어쩌면 예술 작품을 통해
종교적 체험을 대신하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몇천 년 동안 인간을 지배해 왔던 신의 존재와 확실성은 지난 몇 세기 과학기술의 발달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며 점차 그 의미를 잃고 있다. 신이 사라진 그 자리는 어느덧 신보다 더 유능하고 경이롭고 게다가 매일매일 새롭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빠르게 대체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으로 채워져야 할 그 자리가 메워질까. 과학의 발전이 눈부실수록 현대인의 공허와 불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가는데? 예술이라고 가능할까? 제아무리 종교적 체험에 가까운 미적 경험이라도 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오늘날 예술과 종교의 효용에 대해 여러 가지로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책갈피 #1. 만약 눈물이 먼저 나오고 정신이 그 뒤를 허겁지겁 좇아가는 것이라면?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는 로빈이 한 것과 같은 반이성적인 진술들에 관한 훌륭한 이론을 갖고 있었다. 요컨대 우리의 정신은 흔히 신체에 생긴 일들에 놀라고, 그것을 설명하고 정리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눈물을 특정한 경험의 징후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설명될 수 있어야만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눈물이 먼저 나오고 정신이 그 뒤를 허겁지겁 좇아가며 투명한 드레스나 팔이 없는 동상 같은 온갖 이야기를 꾸며내는 거라면?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몸과 생활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런 사소한 거짓말들 없이는 우리 몸의 실체를 보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이 사실은 우리 자신도 어찌할 힘이 없는 불가해한 부속물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p.62)


책갈피 #2. 노년은 영원히 알지 못할 일에 적응하는 것일 뿐.   

 내가 생각하기엔, 이것이야말로 노년에 들어서야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지혜이다. 기억이 쌓이면서 사람은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 영원히 알지 못할 일에 적응할 뿐이다. 성급하게 이유를 찾아내려 하기보다 수수께끼로 남겨두는 것에 점점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p.75)


책갈피 #3. 눈물은 훨씬 더 크고 복잡한 기상 상태의 일부

- 서부에 있는 한 대학의 영문학 교수는 자기 아내가 그린, 아무도 없는 정리되지 않은 침대 그림에 대해 써 보냈다. 그 그림을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다름 남자와 연애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교수는 침실에 혼자 있었다. 침대 옆에 서서 우연히 그 그림을 쳐다보게 된 그는 마침내 그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아내가 저버린, 그들 부부의 침대였던 것이다. 그는 울기 시작했다. (,,,)   

- 그 영문학 교수는... 그 그림이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충격’을 가해, ‘적절한 경험’으로 이끌어주었다고 말했다. 아내가 줄곧 자신에게 말하려 했던 것을 대신 보여줌으로써 마침내 제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자신이 옳게 해석했다고 확신하는지 물었다. 그 ‘충격’이 그를 경악하게 함으로써 ‘잘못된 경험으로 이끌고 그리하여 아내의 의도를 오해하게 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교수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밀쳐진 것일 수도 있음을 인정했다. 예를 들어 그 그림을 예전의 결혼생활로 다시 돌아가자는 아내의 초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충격이 사태를 명확히 파악하게 해 주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엇이었든 그가 이해하고 있던 것을 완전히 지워버렸을 수도 있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했다는 뜻은 아니지요 “라고 말했다.(...)

- 나는 충격이란 것을 바로 이렇게 이해했다. 갑작스러운 충격, 혹은 터져 나오는 눈물은 우리가 그림을 보는 동안 경험하는, 훨씬 더 크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복잡한 기상 상태의 일부인 것이다.... 불안정함을 느끼고 그림이 당신의 생각을 밀거나 잡아당긴다고 느끼는 것은 바람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번개를 맞는 것은 더욱더 드문 일이다. 그러나 비와 바람과 천둥과 번개는 회화라는 거대한 기후 체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다. 눈물은 느닷없이, 그림의 의미와 전혀 무관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폭풍우의 중심에서 오는 것이다. (...) 그들의 이야기는 드물게 찾아오는 폭풍우와 같지만, 평소 그들과 함께하는 산들바람과 가벼운 구름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난폭한 뇌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둥과 번개와 우박과 진눈깨비에 대해, 심지어 토네이도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한다. 실제 삶에서 벼락은 주로 언덕 꼭대기나 노출된 고지대를 때린다. 내가 예로 든 감상자들은 혼자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벼락이 때릴 만한 황량한 장소에 가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의 힘에 노출되어 있고, 어떤 폭풍우가 오더라도 고스란히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우리 대부분은 대피소로 피하는 쪽을 택한다. 나 역시 그림에서 이상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적이 어려 번 있지만, 그때마다 해설을 읽거나 다음 그림으로 넘어감으로써 덧문을 닫아걸었다. 이것은 감상적 오류가 상당 부분 낭만주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그림을 보고 우는 것과 낭만주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것이다. 또한 감상적 오류가 20세기에 특히 낮게 평가된 것도 무관하지 않다. (p.123-127)


책갈피 #4. 그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 <성 프란체스코의 무아경>은 어딘지 모르게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닮아 있었다. 그것은 적합한 질감을 갖고 있었고 가장 적합한 장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에서는 단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그 자리를 붓 자국과 색깔들이 다 채운 것 같았다. ‘마술적인’이라는 단어로는 내가 느낀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느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기억해 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회상 능력을 거의 상실해 버릴 만큼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그 그림에 애착을 갖게 된 것이다. (p.136)


- <성 프란체스코의 무아경>은 울퉁불퉁한 암석들과 이상한 곡선을 그리며 구부러진 나무들, 하늘을 향해 목을 젖히고 있는 새, 누더기 구름 같은, 내가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그림이 정말 아름다운 것은 벨리니가 그곳에서 나와는 달리 단순히 놀거나 몽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기적의 증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푸른 바위와 마주쳤다며 아마 그 바위에 동이 들어 있기 때문에 푸르다고 말했을 것이다. 벨리니가 바위를 푸르게 그린 까닭은 그것들이 계시를 암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인의 발치에 놓인 바위의 약간 움푹한 부분에는 작은 화초들이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자연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들은 성스러운 비에 잠긴, 계시의 목격자들인 것이다. <성 프란체스코의 무아경>은 모든 잔가지와 가시들이 제 나름의 성스러움을 지니는 하나의 세계를 담고 있다. 벨리니와 동시대를 산 한 사람은 “그의 그림들 속에서 배회하기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분명 그 말은 나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그 그림 속에 담긴, 사람들이 쉽게 놓칠 법한 자잘한 것들 하나하나를 사랑했고, 놓치기 쉬운 것일수록 더욱 애정을 가졌다. 나는 그림 아래쪽 가장자리를 따라 돋아난 식물들을 특히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예를 들어 성인의 발 앞에는 식물 네 포기가 아무렇게나 자라 있다. 대부분의 화가라면 네 개의 줄기에 잎들이 예쁜 동그라미를 그리며 둘러나 있는 꽃다발을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벨리니는 그런 상투적인 표현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왼쪽 묘목은 곧은 줄기 하로 되어 있고 줄기 아래쪽에 작은 잎 하나가 달려 있으며 꼭대기에는 다시 작은 잎들이 왕관 모양으로 모여 있다. 잎들이 서로 포개져 있어 정확히 몇 장인 지는 알아볼 수 없다. 세 번째 작은 나무가 걸작이다. 약간 나부끼듯이 위쪽을 향해 뻗어가다가 두 가지로 나뉘는 모양인데, 갈라진 부분에는 자고 푸르스름한 잎 세 장이 돋아나 있다. 갈라진 두 가지 모두 빈약하다. 하나는 옆으로 뻗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덩굴손이 바람에 흔들리고, 끝부분에는 위쪽을 향해 이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다. 위로 나부끼는 가지는 월계수 모양을 닮아 있지만 크기가 너무 작아서 알아채기 어렵다. 자세히 관찰하면 그림은 이러한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잎사귀마다 검은빛을 발할 정도로 윤이 나고, 모든 돌이 광택이 난다. 오른쪽 제일 위쪽에는 세 개의 작은 덩굴손이 늘어져 있다. 너무 가늘어서 금색 머리칼처럼 보이는 가장 긴 덩굴손에는 종 모양의 줄기에 섬세하게 굴곡진 잎 네 개가 달려 있고, 그 끝에는 너무 작아서 그림 속으로 숨어버릴 것처럼 보이는 막 돋아난 싹눈이 있다.

- 쉽게 놓칠 수 있는 것들을 포착해 냈다는 바로 그 점이 나를 사로잡았고, 잊고 있었던 작은 것들에 다시금 주의를 기울이게 해 주었다. 모든 걸출한 그림들이 그렇듯이 그 그림으로 인해 나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풍경을 바라보게 된 것은 물론 바위의 색조와 구름의 형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작은 잎들도 알아보았고, 가지가 살짝 한쪽으로 밀쳐진 것처럼 구부러진 것도 알아보았다. 나는 빛줄기가 잎들을 거쳐 땅바닥에 닿는 동안 서서히 길을 잃는 모습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말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 그림은 일종의 글 없는 성경이었다. 그것은 내게 숲 바닥에 나뒹구는 미물과, 이름 없는 돌에서 새어 나오는 미미한 미광에서도 의미를 찾은 법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한때 평범한 것들이 다소 성스런 빛 속에 잠겨 있는 세계에 경이를 느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p.148-150)


책갈피 #5. 잊힌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에는 무언가 감동적인 것이 있다   

-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거나 찾는 사람이 드물어 보이는 장소들, 못 보고 지나치기 쉬운 대상들, 그리고 보통은 못 보고 지나치는 형태와 색깔 들에 이끌린다... 뉴욕 주에서의 그 오래된 기억들은 또한 나에게, 주로 주로 인디언들을 그린 기묘한 그림들로 알려진 19세기 화가 랠프 에드워드 블레이크록의 몇몇 그림들을 특별히 친밀하게 느끼게 한다. 그가 그린 기이하고도 작은 관목울타리 그림들이 특히 그랬다... 농부들은 블레이크록이 그린 것과 같은 길게 늘어선 덤불을 돌보지도 않는다. 어른 아이들이 숨기 좋은 장소도 될 수 없고, 짐승들의 은신처로도 적당하지 않으며, 등산객의 관심을 끌 만큼 보기가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가만히 서서 그것들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날이 가고 한 해가 저물어도 아무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조차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블레이크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블레이크록은 그림을 특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철저히 잊힌 것들에 대한 블레이크록의 끈기 있고 애정 어린 관심에는 굉장히 감동적인 뭔가가 있다. 내 눈에 그의 그림들은 우수로 얼룩져 있고,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일종의 무아경에 빠뜨린다.... 나는 이네스와 블레이크록이 왜 내게 이런 힘을 발휘하는지 생각해 보았고, 그들이 내 유년기와 그리고 3세기 전에 그려진 벨리니의 그림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인지도 안다. 풍경에 대한 나의 이런 감상이 19세기에, 특히 러스킨과 아널드 같은 영국 작가들과 피히테와 셸링과 노발리스 같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덤불울타리에 대한 나의 애착은 세기전환기의 유미주의와 초기 유대신비주의의 특징들, 풍경에 관한 17세기의 관념, 더 나아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영지주의에도 끈이 닿아 있다. 나는 내가 지닌 관념들의 모호한 계보를 낱낱이 알고 있고, 유년기 나의 상상을 지배했던 낡은 개념들을 모조리 열거해 볼 수도 있다. 열쇠는 아는 것이다. 무엇이 나의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지 알고 있는 한, 그것이 역사적 관념들 속에 어떻게 섞여드는지, 그러면서 역사의 사실들에 어떻게 배어들고, 스스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위장하는지 감시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렇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각자의 지적인 계보를 지니고 있고,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좋아하게 하고 또 어떤 이미지들은 거부하게 만든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신을 이끄는 것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생각과 감정이야말로 그림을 벽 장식물 이상의 뭔가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p.183-185)


책갈피 #6. 내가 죽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그림은 여전히   

- 내가 연구한 것에 따르면, 시간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우는 주된 이유 중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가보지 못한 미술관을 다시 찾아가 똑같은 벽에 똑같은 그림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변하지 않은 예술품이 어떤 식으로든 변해버린 그녀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해서(...), 혹은 ‘자신이 보고 있는 그림이 자기가 죽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거기 있으리라는 사실’에(...), 또 어떤 사람은 그림을 보며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롭고 조화로울 수 있는지 알게 되어 울었다고 내게 말했다. 망가진 자기 인생과 달리 그 그림은 유리병에 든 배처럼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완벽하게 유지되었고, 영원히 그러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대조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고 그는 말했다. (p.224)


책갈피 #7. 사물, 이야기, 그리고 신의 부재   

- 타마라가 본 그림과 베를린에 있는 그 그림, 그리고 <비구름> 모두 중심이 텅 비어 있고, 뭔가가 있어야 할 곳에 허공이 있다. 첫째 그림은 심연 속으로 다 흘러가 고갈되어 버리고, 둘째 그림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셋째 그림은 아무 특징 없는 평원으로 늘어나 사라진다. 셋 다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을 지니고 있다. 그 그림들은 텅 비었고 쓸쓸하지만, 그렇게 만드는 것이 뭔지는 조금도 분명하지 않다. 무엇이 빠져 있는 걸까? 나를 잡아당기고, 타마라를 울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

- 나는 그 그림을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야기의 부재, 구실의 부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든 설명할 거리가 있다면 편안했을 것이다. 하물며 기억해내고 싶지 않은 프로이트 식 유년기의 기억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 그림은 말하려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불편함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절대적인 무, 전적으로 유일무이한 사물의 부재였어요. 그리고 그것이 처음에 한 일은 내게 겁을 주고 충격을 주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느낌은 확실히 일종의 속수무책의 감정이었고, 일종의 경이였으며, 일종의 탐색이었어요. 울음이 찾아왔을 때 그녀는 해방의 느낌을 맛보았다. 그러나 타마라는 자신이 무엇에서 풀려난 것인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처음에 그녀는 매혹을 느꼈고 그다음에는 두려움을 느꼈으며 그런 다음에는 울었다.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림 속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을 멈추지 않는, 그 허공을 제외하면 말이다. (p.32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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