쏭마담의 북쌀롱을 위한 스크립트용 글모음.
2016년 맨 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2024년 한림원에서 그녀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로 호명하면서 다시 한번 화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독서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로 <채식주의자>에 함께 수록된 단편 ‘몽고반점’에서 묘사된 형부와 처제와의 적나라한 섹스 장면 때문이다. 표제작 ‘채식주의자’는 평범하게 살던 영혜라는 여자가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육식을 거부하며 가족과 일상의 균열을 겪게 되는 이야기다. <채식주의자> 안에는 각각 영혜의 형부(‘몽고반점‘)와 언니 인혜(’나무 불꽃‘)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단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 콘텐츠에서는 나머지 두 편의 작품을 폭넓게 분석하여 영혜라는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정상과 비정상성, 그리고 폭력의 역사
- 주인공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그녀가 사회적으로 진단받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정상인'의 시각으로 읽으려고 하다 보면 그녀 마음의 동인과 몸의 증상에 대해 전혀 이해와 공감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왜 그녀가 '비정상'이 되었냐는 점이며,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통해 그녀를 둘러싼 폭력의 세계를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 <채식주의자>에서 다루는 폭력은 주로 '아버지와 남편'으로 대변된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도륙하고 어린 영혜에게 억지로 보신탕을 먹게 하는 아버지. 어른이 된 영혜가 육식을 거절한다는 이유로 몸을 결박하고 뺨을 때려 억지로 탕수육을 밀어 넣는 장면에서 영혜의 아버지는 표면적으로 용인되는 이 사회의 폭력을 대변하고 있다. 반면 영혜의 남편은 내면화된 폭력의 수위를 드러내 주는 인물이다. 남편은 처음 영혜를 만났을 때 아무런 끌림도 없었으나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여러 가지로 무난하다는 이유로 그녀와 결혼을 한다. 남편의 예상처럼 그녀는 남자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지도, 특별한 요구도 없는, 때가 되면 밥상을 차려내고 적당히 잠자리도 하는 평범한 아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고 나서부터 육식과 섹스, 기본적인 아내로서의 의무를 거절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의 삶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자 남편은 아내의 병에 대해서는 조금의 이해나 관심 없이 이런 여자를 만난 자신이 피해자임을 어필한다.
- 영혜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렇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이미 만연한 세계이며,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한 여자를 둘러싼 남성의 가부장적 세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폭력에 대해 예민한 촉을 가진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워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런 세계에서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영혜가 비정상인지, 이런 세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과연 정상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2. 인물 관계도로 본 식물성과 동물성
-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사회적응도와 경제적 능력'이라는 기준에서 영혜와 형부가 식물성 재질을, 영혜의 남편과 영혜의 언니가 동물성 재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예술이라는 아름다움 혹은 이상을 추구하는 형부는 영혜의 남편과 달리 처제를 쓰임이나 대상으로 도구화하지 않았고, 어떤 의미에서 처제의 식물성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몽고반점'에서 그녀는 형부가 자신의 몸에 그린 식물 덕분에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고, 그런 이유로 형부가 그녀에게 후배와의 교합 장면을 제안했을 때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주도하는 면을 보인다)
-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토플리스 차림으로 햇빛을 쬐며 광합성을 한다거나, 몸에 식물을 그리는 것을 조건으로 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장면은 그녀가 이미 식물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녀가 옷을 벗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 또한 그녀가 폭력의 세계로 상징되는 인간세계를 벗어나 자연과 여성성이라는 신화의 세계로 진입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 예술을 추구하는 형부 또한 영혜의 여체에서 그런 순수한 자연의 세계와 절대적 아름다움을 알아보는데, 영혜와의 교합을 자연과의 합일로 묘사하는 장면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상징이자, 동시에 이브의 사과처럼 형부를 금기의 세계로 유혹하는 금단의 열매로 작용하게 된다.
- 따라서 이 책에서 식물성은 동물성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라, 폭력으로 상징되는 인간성과 대비되는 것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이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섹스의 진화>에서 말하는 동물의 섹스에 대한 부분을 옮겨 본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인간의 성적 습성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3천만 종의 다른 동물들의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도 비정상적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부분의 포유류는 인간처럼 다 자란 수컷과 암컷이 짝을 지어 핵가족을 이루지만 새끼를 낳은 후에는 함께 살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은 결혼이라는 계약에 의해 서로에게 의무를 지우고, 자신의 배우자와만 반복적으로 성관계를 갖는다.
둘째. 포유류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새끼를 돌보는 일이 거의 없다. 수컷들의 아버지 역할은 정자를 제공하는 것에서 끝. 하지만 인간은 성적 결합을 넘어 둘 사이 태어난 아이를 함께 기른다.
셋째. 수컷과 암컷은 따로 지내다가 번식, 즉 교미할 때에만 만난다. 암컷 또한 가임기에만 수컷을 유혹하며, 이들에게 섹스는 오로지 생식을 위한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수시로 쾌락을 위해 섹스를 한다.
마지막으로, 동물들은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교미를 한다. 하지만 인간은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은밀하게 사랑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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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동물, 즉 자연세계에서의 섹스는 번식과 생존을 위한 섹스이다. 따라서 자연세계에는 인간의 세계처럼 금기, 불륜, 관음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3. 포르노와 예술, 욕망의 관음성... 그리고 금단의 열매
- 식물성 처제의 나체를 카메라에 담고자 했던 형부의 처음 의도는 아름다움(예술)을 향한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처제와 형부 혹은 근친상간이라는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며 위험한 것이 된다. 영혜가 형부의 교합 요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웃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소름이 돋는다.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고 싶었던 적이 없었어. 그 사람 몸에 뒤덮인 꽃이요... 그게 날 못 견디게 했던 거야. 그것뿐이에요.” "그렇다면.. 내 몸에 꽃을 그리면, 그땐 받아주겠어?... 그걸.. 찍어도 괜찮겠어? 그녀는 웃었다. 희미하게,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혹은 무언가를 조용히 조소하는 듯이.
- 채식주의자에 해설을 단 허윤진에 의하면, 앎에 대한 욕망은 필연적으로 관음적일 수밖에 없다. 영혜의 몽고반점을 촬영하려는 형부의 카메라는 어떤 대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는 관음적 시선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히브리 신화 속 첫 인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혜를 범하는 형부의 행위는 인간에게 금지되었으나, 끝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며 영혜의 웃음은 이런 인간을 조소하는 신의 웃음 같다. 인간이 신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신의 자리를 넘본 것이며, 신과 인간의 경계는 소멸되고 관계는 파괴된다.
-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식물과 동물은 함께 추방되지 않는다. 그들의 신에게 불순종 하지도,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판단하지도, 따라서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런 의미에서 영혜의 몸에 그린 꽃 그림이 불경한 인간을 보호하는 일종의 부적처럼 작용하는 점도 흥미롭다. 영혜가 육식을 먹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 것은 어느 날 꾼 꿈 때문이다. 고기가 매달린 긴 헛간에서 날것을 먹고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게 된 이후. 하지만 형부가 꽃그림을 몸에 그려준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된다.
#4. 작가의 섹스 묘사, 무엇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
-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부커상을 받고도 한국독자들에게 크게 환영받지 못한 이유는 그녀의 적나라한 섹스 묘사 때문이 크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난 이웃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또한 '권위 있는 세계적인 문학상'이라는 무게감으로 재독하고 나서야 내 안의 불편함의 이유 몇 가지가 정리되었다.
- 첫째. 영혜와 후배 J의 몸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 이건 사심 없이 꼼꼼하게 읽다 보니 (나는 식물이고 동물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나무관세음보살...) 어느 순간부터 영혜 몸에 그려진 '몽고반점-낮의 꽃과 밤의 꽃'이 하나의 놀라운 이미지처럼 펼쳐졌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앙투아네트가 살던 자메이카의 트로피컬 정글과, 꽃과 사막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만개한 꽃과, 붉은 양귀비를 앞세운 겐조의 향수 따위의 이미지로 승화되었다.
- 동시에, 여전히 영혜와 후배 J의 교합 장면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인간사회의 금기를 넘어서는 불편함이나, 내밀한 것이어야 할 인간 섹스가 대낮처럼 발가벗겨 묘사되는 방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녀의 섹스를 묘사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방식에 뭔지 모를 작가의 도발이 느껴졌다. 기존 영화와 소설에서 여체를 대상화하는 남성들의 상투적인 시선과 전개 같은, 익숙하면서도 불편하게 하는 요소가 있었다. 작가는 너도 알고 우리가 다 아는 섹스를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섹스에 대한 금기나 가식을 깨고 싶었던 걸까. 성스러울 것도 속될 것도 없는, 그러니 신비할 필요도 없는 동물과 식물의 섹스. 어떤 이를 통과하며 그의 경험에 따라 관음과 춘화와 불륜과 간통이 되기도 하는 인간의 섹스. 그러니, 이걸 불편해하는 너의 섹스에 대한 시각을 점검해 볼 찌어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걸까.
- 분명한 것은, 작가가 우리 세계의 불편한 것을 다루는 시선과 방식이다. 작가는 결코 그것을 타자화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에서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줄곧 견지해 온 태도다. 그녀는 폭력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한 촉을 가졌기에,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가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펜을 든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서정적 산문(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은 그렇게 탄생한다.
#5. 여전히 남은 폭력의 문제
- 그렇다면 영혜의 식물성을 가장 잘 이해하는 듯했지만, 결국 둘 모두를 파멸로 이끈 형부는 이 책의 악인인가? 실제로 손목을 그은 사건 이후 영혜는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듯 보였다. 만약 형부가 처제를 끌어내어 카메라 앞에 세우지만 않았다면 영혜는 식물인 채로 나름 사회에 적응해 가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영혜의 언니 인혜처럼. 나름의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 작가는 '나무불꽃'에서 인혜도 영혜와 다름없는 가부장 세계의 희생자였음을 강하게 항변한다. 자기의 열정과 찍은 이미지 안에만 갇혀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무능했던 남편. 어쩌다 부탁하는 양육과 집안일에도 늘 뒷전이었던, 여관에 든 여행자 같았던 남편. 추문 이후에도 그녀는 홀로 가게를 꾸려 나가며 동생 영혜의 뒷바라지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녀는 겉으로는 영혜와 달리 수완 좋은 사회 적응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인혜의 독백을 통해 그녀도 오래전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한다. 선량한 인간으로, 남편의 요구를 참아내며, 이 순간만 지나면 얼마간 괜찮으리란 생각으로... 버텨온. 그리하여 어느 날 무심코 아침식탁에서 앉아 찻주전자의 끓는 물을 머리에 붓고 싶어 지곤 했다는 걸 상기시킨다.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것과 꼭 같았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 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그렇다면 그녀를 영혜와 달리 이 세상에서 구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행히 그녀에게는 아이라는 끈이 있었고, 그녀는 아이 덕분에 산다는 것의 기이함을 뒤로하고, 아이의 단내 나는 작은 몸뚱이 곁에 눕는다. 아직 죄 지어 보지 않은 어린 얼굴을 보며 잠든다. 그리고 다시 어김없이 시작되는 일상을 살아낸다. 아이에 대한 모성은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도 가부장제에 희생된 여자들이 스스로 다시 살아가게 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etc.
- 마지막으로 이 책은 <희랍어 시간>과 겹으로 읽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주장해 본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의 비극적 운명(말을 잃고, 눈이 멀고, 다른 존재로 변신하고)과, 인간사 덧없음의 아름다움과, 이데아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분하는 세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고 사랑하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이해를 깔고 다시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 비로소 제대로 읽는 거라고... 아래 떡밥을 던져본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요,라고 그가 말한다. 하지만 이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던 거지요... 아름다운 사물을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힙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운 자체만-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믿는 자신이.
<희랍어 시간> p.93
이런 문장을 읽으면, 영혜는 단지 수동적인 식물성 인간, 즉 조현병 환자가 아니라 플라톤처럼 '아름다움 자체'를 적극적으로 믿고 싶었던, 그리하여 그녀는 폭력적인 현실이라는 꿈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넘어간 각성한 인간일 수도 있겠다고 막 해석하고 싶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