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 너네 10만 돼 봤어?

모든 교회는 자기 수준에 맞는 목사를 가진다

by 쏭마담


살아오면서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어서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임에서 기독교인 입네 하는 이들이 반갑게 다가와 "어느 교회에 다니냐"며 나를 그들과 한통속으로 묶고, '저들'과 '우리'로 편 가르기 할 때. 그냥 신분을 감추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사는 곳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아준 것도 이웃의 대형교회 신도였다. 그들은 내가 이삿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각티슈를 사들고 우리 집에 방문해서 내게 교회에 다니냐고 물었다. 며칠 뒤 놀이터에 애들을 풀어놓고 지켜 보고 있었는데 이번엔 물티슈를 든 이들이 내게 다가왔다. 같은 교회 교인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며 다른 교회에 출석 중임을 밝혔는데도 그들은 굳이 가까운 자기 교회에 한번 와보라며 내 손에 주보와 물티슈를 쥐어주었다. 그 열심이 기이할 정도여서 나는 그들이 건네준 주보 첫 페이지에 쓰인 '목회 칼럼'을 훑어 읽기 시작했는데... 마지막 문단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말았다. A5 한 면을 빡빡 하게 채운 칼럼 내용 중에 예수와 복음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온통 담임 목사 자기 자랑 일색이었다. 어느 정치 집회에 초빙되어 갔는데 진행자가 자신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았다는 둥, 얼마 전 출간 한 자기 책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새벽기도를 3부로 나눠 드리고, 북한군도 무서워서 못 쳐들어온다는 중학생만 몇백 명이 넘게 출석한다는, 반경 몇 킬로 안에서 꽤 유명한 대형 교회였다. 뒷장을 넘겼더니 백화점 문화센터에 버금가는 각종 프로그램이 즐비했고, 전도 축제에 친구를 데려오면 당시 모든 아이들의 선망이었던 고가의 변신로봇을 선물로 주겠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각티슈를 들고 다니는 여자들을 길에서 만나면 멀리 돌아가게 되었다.


내 기독교 기피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서울의 한 대형교회가 한창 아들 세습 문제로 분열되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즈음부터였을 것이다. 그 교회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평소에 다른 교회들이 다 세습을 하더라도 그 교회만큼은 그럴 리 없을 거라는 약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담임 목사의 아들은 이전부터 한국교회 세습 문제에 함께 비판의 목소리를 보태 왔고, 상식적이고 능력도 출중해 보였다. 굳이 이런 분열과 논란을 일으키며 아버지 교회를 물려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담임 목사는 옆 교회에서 잘 목회하고 있던 아들을 자기 교회로 모셔와 '합병 및 위임목사 청빙'을 진행했다. 그 다음부터는 교단법을 악용하고 꼼수를 쓰는 수순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디에나 있는 예외와 불가피성을 들어가며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했다. 저 북한의 김일성 수령이 김정일에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하듯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 교회가 세습에 앞장서자 이어 중대형 교회들이 그 패턴을 이어받아 우후죽순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었다. 당연히 성도들은 실망했고 교회는 분열됐다.


그즈음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유튜브 동영상 하나를 물어다 주었다. 클릭해 보니 교회 앞에서 세습에 반대하는 교인들이 조용히 피켓팅을 하고 있는데, 그 옆을 수요예배인지 금요 철야기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교인들이 힐난하듯 쳐다보며 지나가고 있었다. 누군가 시위대를 향해 비난을 했던가, 어떤 질문이 오갔던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약간의 언성이 오가고 난 뒤 내 또래 여자 하나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네 10만 돼 봤어?"


뭐? 10만 돼 봤냐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하는 순간. 나는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야 말았다.


유명한 정치 명언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그걸 교회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은 워딩이 가능하다. "모든 교인은 자기 수준에 맞는 교회를 가진다." 우리가 목사의 비리를 아무리 비판해도 목사 혼자 바지 벗고 춤을 출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에 장단 맞춰주는 교인이 있고 지지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행위가 가능하다. 교인 또한 자기 수준에 맞는 목사를 가지는 것이다. 뼈아프지만 그 진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우리를 객관화시켜 보지 못하고, 아무리 교회에 와서 울고불고 회개한들 우리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 교회의 크기와 성도수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정당성을 입증하는 번영주의 신앙. 너네 10만 돼 봤어? 라는 말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할 수 있는 그 성도의 말은 세습을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감행하는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코로나 이후 국민일보에 보도된 한 설문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종교 호감도를 물은 응답에서 개신교는 25.3%, 천주교와 불교는 각각 65.4%, 66.3%를 차지했다고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뢰도인데,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전체의 18%. 응답자 중 개신교 당사자를 빼면 그 수치는 다시 9%로 떨어졌다. 그나마 코로나 이전에는 신뢰도 31%를 보여주던 개신교는 코로나 기간을 지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몇 달 후 같은 기관에서 이번엔 개신교도 1,0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자기 교회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조사였는데, 이 수치가 또 묘하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다'에 '예'라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전체의 90%, '내가 출석한 교회에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84%에 달했다. 하긴, 요즘 세상에 교회가 맘에 들지 않는데 의무감이나 관성으로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회가 맘에 들지 않은 사람은 이미 가나안 교인이 되어 있을 테니. 남은 이들은 그 교회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터.


그렇다면 교회 안과 밖에서 바라보는 이 기묘한 호감도의 격차는 우리에게 무얼 말해줄까. 과대망상? 인지부조화? 객관화 불능? 정확히 기술할 용어를 찾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을 떠도는 용어들이 병리적이라는 것만은 알겠다.


나는 이제 어디를 가나 기독교인을 만날까 봐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었다.



[창고] <국민일보> 교회를 신뢰하나요? 32%->21->18%... 추락하는 교회. (국민일보·사귐과섬김 코디연구소 공동기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 목사의 비리를 고발하자 그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