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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극히 사적이고 애국적인, 어머니의 정치색

애국심이 공공성을 잃었을 때 우리는

by 쏭마담


어머니의 정치색에 대해 나에게 기이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두 장면을 소개한다.




#1. 박근혜 국정농단


온 국민이 광장으로 달려 나가 촛불시위를 하기 직전, 세월호로 기울 대로 기울어진 민심에 결정적으로 한 방을 날린 일명 '국정 농단 사건'이 막 언론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던 때였다. 사이비 종교 교주의 딸이 대통령의 비호 아래 각종 국정과 인사 문제에 암암리 개입한 것도 모자라 사전에 대통령의 연설문과 각종 서류를 보고 받아 검토했다고 하여 모든 언론이 앞다투어 이 기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때도 한번 통화하면 한두 시간씩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던 어머니와 나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정치 얘기로 넘어가 있었다.


"우리도 왜 편지 같은 거 쓰고 나면 내가 제대로 썼는지, 치우치거나 놓친 내용은 없는지, 여러 번 읽고 검토하잖아. 혹 맞춤법 틀린 거라도 봐줬음 해서 주변 사람들한테 보여주기도 하고. 그런 의미로 친한 언니한테 한번 봐달라고 하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건가?"

"......!"


나는 잠시 말문을 잃고 말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정치에 문외한인 나였어도 '농단'이 무슨 말인지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단'자는 잘 몰라도, '농단'의 농자는 농락하다, 우롱하다의 그 '농'이 틀림없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국민을 농락하고 우롱했다는 말이고, 또 그건 나 같은 정치 바보를 그야말로 개 돼지 아니, 바보 취급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 화가 나려던 참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니, 정치가 무슨 소꿉놀이도 아니고! 연설문을 왜 동네 언니가 검토를 해요? 그 많은 정치 전문가들 다 어디다 두고? 대통령 비서실은 들러리로 있나요?"


이렇게 대충 땜빵을 해대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그 뒤 대통령 파면 결정이 내려졌을 때에도 비슷한 말을 해서 또다시 나를 격앙시키고야 말았는데.... 그때는 '위헌'이 이유였다. 대통령 탄핵은 소추장에도 없는 사유를 만들어 넣은 종북좌파의 합작품이라는 둥, 사실오인에 법리 적용이 잘못되었다는 둥, 나는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이유들을 내세워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위헌이라며 힘껏 부정하셨다. 그러니 헌법에 대해서도 일자무식인 나는 또 이렇게 반박할 밖에.


"어머니. 대한민국 헌법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대학에서 4년 동안 법 공부하고 사법 고시 힘들게 패스해서 연수원 생활 2년 하고 다시 현장에서 수년간 판검사 생활하며 온갖 판례와 법리해석 거쳐 헌법재판소 재판관 된 8명 보다 헌법에 대해 더 잘 아세요? 그게 위헌인지 대체 어떻게 아세요?"


그때 알았다. 정치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가까운 어머니의 태도는 기득권으로 누려온 지역색과 그녀의 태생적 신분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또한 법률가들의 전문성을 자기 아래에 둘 만큼 그녀에게 명분으로 작용한다는 것. 그러니 뼛속까지 평민인 데다, 정치는 감히 높으신 어른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자란 나는 절대 그녀의 정치색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렇게 정치색은 어머니와 우리 세대를 이상한 방식으로 가르고 있었다.


#2. 건국 전쟁


아들 : 엄마, 할머니가 용돈 보내주셨다~ <건국 전쟁> 이 영화 꼭 보라고. 이거 무슨 영환데 그래?

나 : 아... 그거,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관한 영화일걸? 안 그래도 지난주 우리 교회 단톡 방에서도 그 영화 때문에 난리였거든. 어떤 집사님이 이 영화 강추한다고 꼭 보라고 올렸는데 다른 집사님이 단톡방에서 정치 관련 이슈는 예민하니 내려달라고 했대. 그랬더니 한 공동체 안에서 자기 의견 좀 올리는 것도 안되냐고 하면서 잠시 소란.

아들 : 근데, 할머니가 엄마랑 아빠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보래. 굳이?

나 : 그러게. 왜 그러셨을까. <건국 전쟁> 보는 게 뭐 어때서? 엄마 아빠는 그런 거 아무렇지도 않은데, 굳이 몰래 보고 말아야 할 건 뭐냐. 엄마는 그런 게 좀 이해가 안 돼.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 얘기할 때도 말했지만, 누구나 한 사람 안에 공적이 있으면 과실도 함께 있는 거거든. 어떤 사람도 온전히 잘한 것만 있거나 혹은 못한 것만 있을 수 없어. 근데 어른들은 자꾸 공적만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거 같아.


몇 달 전 우리는 <서울의 봄>을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용돈을 보내드리면서 꼭 보시라고 추천하지 않았다. 역사에 무관심하던 아들이 그 영화를 보고 현대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을 뿐. 실제 역사와 영화적 설정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영화의 어떤 설정이 당시 역사적 맥락을 잘 살려냈는지, 지금의 세태와 어떻게 결부해서 평가할 수 있는지. 덕분에 이야기 나눠서 좋았다. 근데 어른들은 왜 돈을 주고서라도 우리를 설득하고 싶어 하는 걸까. 당신들의 세계와 결정이 옳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할까.


이번 영화 <건국 전쟁>만 해도 그렇다. 우리는 그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생애를 다룬 내용이라는 것 외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근데 어느 순간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런 쇼츠가 돌아다녔다. 그는 내가 엊그제 재미있게 보고 온 신작 영화 <파묘>를 예로 들더니, 이 시기에 대작들이 개봉한 이유가 자신의 영화를 순위에서 떨어트리기 위한 좌파들의 음모라고 했다. 좌와 우로 갈라치기 하며, 우파와 극우 기독교인들에게 관람을 독려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덜컥 '불호'의 감정이 생겨버렸다. 일제의 만행에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굿하는 영화에 무슨 음모 따위가 있겠는가. 하지만 저렇게 비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라면 보고 싶지 않았다. 댓글의 말들이 옳았다. 감독은 쓸데없이 좌파를 들먹여 자기 영화를 스스로 '파묘'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어머니와 정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는 점점 더 좁혀질 수 없는 세대 차이를 만났다. 내가 '정치'에 대해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는 바로 '공공성'이었는데, 어머니 세대의 정치에는 그 단어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의 정치색은 굉장히 사적이고... 뭐랄까, 늘 애국심에 은은하게 아니 열렬하게 젖어 있었다.


공공성이 결여된 애국심.

그리고 나는 내가 그간 기이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의 정치색이 바로 이 단어였다는 걸 알았다.



[참고] 찾아보니, 농단의 '농'은 그런 의미가 아니네. ㅋㅋ 농단(壟斷) : 시장의 높은 곳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고 자기 물건(物件)을 팔기에 적당한 곳으로 가서 시리(市利)를 독점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나 대상을 제 이익(利益)을 위해 간교(奸巧)한 수단(手段)으로 좌지우지하는 것을 이름. (출처 : 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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