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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24. 2020

31. 아버지의 유산

가짜뉴스, 불행과 슬픔의 유통


그 심연에는 채워지지 않는 열망과
가슴을 들썩이게 하는 포부들이 괴롭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어 하우스는 예상했던 것처럼 따듯한 곳이었다. 두 자매인 다이애나와 메리는 취향과 감정과 도덕적 원칙에 있어 제인과 완벽하게 일치했고, 서로에 대한 그들의 존경은 함께 지내는 즐거움을 배가 시켰다. 제인은 세인트 존으로부터 여학교 선생 자리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작은 집과 삼십 파운드의 연봉 제안도 받는다. 가난한 교구 목사로서 그건 존이 베풀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어 하우스에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이들 남매의 외삼촌의 부고와 유산 상속에 대한 소식을 담은 이 편지는 곧 제인의 운명을 또 한 번 뒤바꾸게 될 예정이다.   




오늘도 카톡을 받았다. "꼭 읽어보세요"로 시작해서, 보이스피싱을 피하는 법 같은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주는가 싶다가 어김없이 현 정부의 실책과 공산주의 운운하며 끝나는  글을.


보내준 글을 열어보기만 하고 바로 닫아버린지는 꽤 오래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한두 번 가짜 뉴스에 대해 요목조목 반박하며 진지하게 썰을 풀어 보내드리기도 하고, 이런 글을 공유하실 거면  출처라도 좀 명확한 걸로 보내주시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당신들도 배울만큼 배운 지식인이 아닌가. 왜 누가 어떤 사실에 근거한지도 모르고 떠벌린 카더라 통신에 대해, 왜 아무런 비판도 없이 수용하는가. 그렇게 '노오력'이 중요하다면서? 차라리 그런 글을 읽고 다시 당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당신의 언어로 보내준다면 좀 더 이야기해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고. 남이 쉽게 쓴 글을 그저 그렇게 쉽게 퍼다 나르는 것으로 당신의 자식들이 설득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그렇게 여과하여 보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어제 온 글의 어느 수녀님의 글이었다. 마치 이해인 수녀님을 연상시키는 첫머리.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 대한 비판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에 대해 얘기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또 그들의 신념이자 우상인 한  대통령에 대한 찬사로 넘어가 있었다.


'18년간 재임했으나 그는 호, 명예박사, 직함 따위 요구하지 않았고 죽을 때 허름한 시계와 헤어진 혁대 하나 남겼다... 그는 허례허식과 권력을 빙자한 군림을 증오했다...'


'18년 재임'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것이 군림이며, 군부를 등에 업은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권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건만, 그것이 독재가 아니라고 부득불 우긴다. 그런 형태의 독재는 그들이 그렇게 혐오해마지 않는 저 북쪽의 김 씨 일가가 70년 이상 해오던 그 방식인 걸 그들만 모른다.


어디까지가 수녀님의 글인지 알 수 없이 그 글은 다시 현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 당대표의 최근 발언에 대해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할 병자일 뿐이다'라고 시작하는 글이었다.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출처를 밝히고 싶으나, 나와있지 않으니 나 역시 누가 쓴 글인지 모른다)


* "전라도 출신 OOO 민주당 대표가 작고하신 이건희 회장에게 일장 훈계의 애도문을 발표했다. 비록 살아생전에는 잘못한 게 많지만 죽어서라도 뉘우치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했다. 참 고약한 애도문이다. 고 서정주 시인이 전라도에는 양반이 별로 없었다는 말씀을 하셨다가 전라인들이 들고일어났던 사건이 새삼 떠오른다. 전라도는 죽은 사람에게도 훈계질을 하는 모양이지? 죽은 자의 환생 문제까지 걱정해 주는 마음은 가상하나 조선 8도 한 귀퉁이에 죽은 사람에게까지 훈계질 하는 장례문화가 있는 줄은 몰랐다.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당 대표 앞에 '전라도 출신'이 왜 필요한가. 누군가를 논할 때 출신지로 분류해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언사가 제일 먼저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일장 훈계,  조선 8도...이런 단어는 저 위대한 수령동지를 예찬하기 위해 억양도 이상한 북쪽 선전부장들이 자주 쓰는 단어가 아닌가. 대체 당 대표의 애도문은 또 얼마나 치우쳤길래 그렇게 고약했을까.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카피가 고스란히 찾아졌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신경영, 창조경영, 인재경영...
고인께서는 고비마다 혁신의 리더십으로 변화를 이끄셨습니다.
그 결과로 삼성은 가전, 반도체, 휴대폰 등의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했습니다.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같은 고인의 여러 말씀은 활기 있고 창의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성찰의 고민을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강화하고, 노조를 불인정하는 등 부정적 영향을 끼치셨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투명한 지배 구조, 조세포탈, 정경유착 같은 그늘도 남기셨습니다.
고인의 혁신적 리더십과 불굴의 도전 정신은 어느 시대, 어느 분야든 본받아야 마땅합니다.
삼성은 과거의 잘못된 고리를 끊고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고인의 빛과 그림자를 차분하게 생각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일단 '비록 살아생전에는 잘못한 게 많지만 죽어서라도 뉘우치고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했다'라는 그 고인을 향한 훈계조의 뉘앙스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혁신의 리더십과 불굴의 도전 정신은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세웠고, 성찰하던 그의 삶은 창의적인 기업 문화를 일궈냈다. 하지만 불투명한 지배 구조, 조세 포탈, 정경 유착 또한 그가 남긴 것이다. 애도문은 한 시대를 빛냈던 인물에 대한 공과 과에 대해 골고루 평가되어 있었고, 내 눈에 균형 있게 보였다. 온통 빛으로, 또는 온통 그림자로만 쓰이는 인간의 삶이 어디 있으랴. 빛과 그림자, 공과 과 모두 그 사람이다. 왜 우리는 그를 늘 빛으로만 이야기해야 하나. 왜 그는 공과 과를 균형 있게 얘기했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처넣어야 하는 병자'되어야 하나.


왜 당신은 이런 글을 자식에게 "꼭 읽어보세요"라고 하고 보내야 하나. 도대체 왜!


그리고 오늘 나는 불현듯 이들이 참 불행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자식은 나의 전부여서, 대통령은 아니더라도 장관이나, 그도 아니면 사회에서 그럴듯한 자리 하나쯤 꿰차서 늘그막에 내 평생 다 바친 보상쯤 이뤄줄 줄 알았는데... 늘 자기들 먹고 살기에도 급급한 자식들은 그렇다고 살갑게 전화해 안부를 묻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자식들처럼 환갑과 회갑에 비행기를 태워주지도 않는 그 자식은 또 얼마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지. 내가 온몸 바쳐 사수한 이 나라가 지금 공산주의자 손에 넘어가 언제 곧 북쪽에서 밀고 내려올지도 모르는 마당에 내가 보내는 애정 어린 경고는 읽기나 하는지 반응은 없고. 그렇게 늙고 병든 이 내 몸이 서글퍼, 이렇게 출처도 모르는 글을 퍼 나르며 자신의 슬픔을 유통하는 중이구나.


그 많은 가짜 뉴스들이 그들의 불행과 슬픔의 양일 수 있다는 것. 그들의 불행과 슬픔에 내가 가담하고 있다는 데에까지 생각에 미치자, 나는 지금 참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 이낙연 민주당 대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님의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페이스북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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