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마담 Jan 02. 2021

32. 거절

그 없이 지낸 지 오래되었다

다이애나는 자기 오빠를 가리켜 '죽음처럼 냉혹하다'고 했다.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침내 마을 학교가 문을 열고 제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만의 작은 시골집 하나도 얻게 되었다. 투박하고 초라한 생활. 쓸쓸한 감정 위로 로체스터와의 열정적인 사랑의 기억들이 쓰라린 감정과 함께 밀려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존은 말한다. 사명감이 당신을 구원할 거라고. 하지만 제인에게 존의 그 대단한 사명감은  아름답고 부유한 상속녀인 올리버 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애써 부인하려는 한 남자의 냉혹한 감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존은 그렇게 그 날도 올리버 양의 사랑스럽고도 오랜 구애에 침묵과 완강한 거절로 일관하며 뒤돌아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큰 아이 아홉 살, 둘째가 여섯 살 때다. 이웃집 아빠가 토요일 아침이면 아들내미를 데리고 수영장에 갔다가 맥모닝을 사들고 귀가한다는 얘길 들었다. 매주 아빠와 수영장에 가는 아들들이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새벽 1시가 넘어 귀가해 아침부터 TV 앞에 앉아 비몽사몽이신 우리 집 그분. 긴가민가 한 마음으로 섭외에 들어가 보았으나 역시나, 씨알도 안 먹혔다.


“애들끼리 들여보내면 되잖아.”


깔끔한 이 한 마디에 수영복가방을 챙겨 들고 아이들과 집을 나섰다. 다행히 이 동네로 이사오며 남편이 모닝 한 대를 뽑아줬다. 나는 이제 오너드라이버다. 이 말은 꼭 남편이 아니어도 어디든 갈 수 있게 됐다는 말씀. 평소에 꼭 ‘아빠’ 여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다만 아이들이 이제 여자 탈의실에 같이 들어갈 수 없는 나이가 됐다는 게 문제. 탈의실 앞에서 큰 아이에게 잘 설명한다.  


“OO야. 우리 집에 아빠 없으면 그다음에 누가 아빠랬지?”

“응. 나 형님이 아빠지.”

“맞아. 너 이제 초등학교 2학년 형님 됐잖아. 동생 잘 챙겨서 수영복 갈아입히고 수영장으로 올 수 있지?”

“응!”


워낙에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아기 때에도 물만 보면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걸, 건져놓으면 또 뛰어들고 또 뛰어들었다. 수영장이면 사죽을 못쓴다.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 탈의실이 갈라지는 곳에 서서 아이들 수영복 가방을 건네주며 신신당부를 한다. 신발은 신발장에 잘 넣고 락커 키 꼭 챙기고. 샴푸랑 수건은 선반에 놓고 들어가고, 샤워장에서 깨끗이 씻고... 블라블라 걱정하며 갈라선 입구. 아이들보다 먼저 가있으려고 급하게 사워하고 수영장에 들어섰는데, 녀석들은 이미 물속에서 첨벙거리며 놀고 있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다른 아빠들처럼 수영장 바닥을 기어 다니며 애들 무등도 태워주고, 한껏 들어 물에 던져주기도 하고, 잠수 놀이도 하며 신나는 토요일 오후를 만킥했다.


물놀이 마치고 동생 샤워까지 말끔히 시키고 발그레한 얼굴로 출입구로 걸어 나오는 큰 아이를 보자, 고마움과 설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때부터였던가. 점점 남편에게 아빠 역할을 기대하지 않게 된 것이. 아빠가 못하면 엄마가 하면 될 일이다. 꼭 함께 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너는 왜 다른 아빠들처럼 하지 않니, 속으로 벼르며 그를 깎아내리지도 말자 했다. 대한민국에서 아빠 없이 아이 키우는 집이 우리 집뿐이랴. 디폴트를 ‘없음’으로 해두거나, ‘나’로 해두면, 적어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게 되겠지.


당시엔 그런 비교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늘 옆집 남자보다 못하는 우리 집 남자. 왜 그는 다른 아빠들처럼 아이들과 온몸으로 놀아주지 않을까, 다른 남자들은 화장실 청소며 재활용에 음식물 쓰레기며 다 버려주는데, 우리 집 남자는 일 년 가도록 설거지 한 번을 안 해줄까. 친정 부모님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왜 이 남자는 자기 부모님에게조차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옆집 남자들에 비하면 하나에서 열까지 다 이상했다. 나의 기준이란 게, 여러 옆집 아빠들의 장점의 총합만 모아놓은 것이라는 걸 알기 전까진, 적어도 그랬다.


그리고 몇 년 후 캠핑 붐이 일었고, 그저 별 기대 없이 남편에게 “우리도 캠핑이나 해볼까”, 했을 때의 남편은 좀 달랐다. 말이 꺼내기가 무섭게 캠핑 장비와 용품을 보러 다니고, 새것과 중고를 적절하게 배합한 합리적 가격에 물건을 사들이더니 그때부터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다니기 시작했던 거다. 아이들을 위해 무엇 하자는 말에 잘 움직이지 않던 남편의 변화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갯벌에서 조개며 해산물을 잡을 수 있는 서해안과, 서핑을 할 수 있는 동해안, 다이빙을 할 수 있는 계곡까지... 적지 않은 캠핑을 다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저마다 다른 계절의 정취를 맛보았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어떤 아빠는 아이와 몸놀이를 하고, 어떤 아빠는 캠핑을 다닌다는 사실을.


그는 눈에 보이는 집을 짓는 사람이다. 그에게 텐트를 친다는 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의미 있는 일이다. 눈 앞에서 뚝딱뚝딱 집 한 채가 지어지고, 노력한 만큼 바로 손에 들어온다. 이 얼마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가. 반면, 아이와 부대끼고 몸놀이를 하고 으르렁거리며 환호하는 일은 보이지 않는 집을 짓는 일이다. 애당초 소음 데시벨에 취약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고, 아버지와 그리 놀아본 적 없던 그에게 도무지 어필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던 거다. 남편들이라고 다 자기 취향을 무시하고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아니었다. 어떤 아빠는 너프 총을 종류별로 사들이고 노루 새끼처럼 뒷산을 뛰어다니며 아들과 총놀이를 한다. 어릴 때 총이 너무나 갖고 싶었던 아빠다. 어릴 적 야구 선수가 꿈이었던 아빠는 주말마다 운동장에 나간다. 글러브를 끼고 허리가 나갈 때까지 아들에게 공을 던져준다. 그렇게 아들 덕분에 결핍했던 자신의 유년을 보완하는 것이다.


캠핑을 한창 다니던 남편은 그다음, 자전거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평상시 숨쉬기 운동 한번 하지 않던 남편은, 헬멧과 장갑과 엉덩이 바지와 전조등과 후미등을 사고, 휴대용 펑크패치 세트를 갖추더니 몇십 킬로 라이딩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말마다 미친 듯이 달렸다. 일할 때처럼. 저러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도 좋았다. 적어도 그가 일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으니. 극렬했던 아들 사춘기를 아빠와 함께 라이딩 다니며 극복했다는 이웃들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고 있었던 터였다. 사춘기 때는 남자 어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고, 나는 내심 남편의 역할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함께' 하는 것에 대해선 역시 젬병이었다. 첫 라이딩. 춘천까지 1박 2일 126km 구간을 따라나선 아이들은 그 후 몇 번을 더 따라다니더니 더 이상 아빠와 함께 라이딩을 가지 않는다. 그는 애당초 남에게 맞춰서 뭔가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만의 방식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싫은 건 죽어도 못한다. 얼르고 달래서 마지못해,가 안된다. 그러니, 그 사이에서 나고 자란 우리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그러다 보니.


이제 사춘기가 막 끝나가는 아들 하나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아들 사이에서, 남편은 요즘 내내 거절당하는 게 일이다. 고기 먹으러 가자, 싫어요. 집에서 먹으면 안돼요? 자전거 타러 가자, 나 숙제할 거 많은데. 여행 가자. 싫어요. 왜? 그냥요. 열에 아홉 정도를 계속 거절당하는 중인데, 신기하게도 그걸 1년 넘게 하고 있다. 아내에겐 이미 남편 없이 아이 키우는 일이 디폴트가 되었고, 아이에겐 아빠 없이 놀 수 있는 친구들이 디폴트가 된 지 오래인데. 그는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이 거절의 의미를? 아니며 알면서 부정하는 중인 걸까.  


함께 한다는 건 누군가 희생해야만 가능한 일인데. 결혼 생활 내내 함께 하지 못한 그걸, 설마 이제 와서 가능할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적어도 그가 오해하진 말길 바란다. 그가 그 시절 아내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고 그가 자신의 취향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거절도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라는 걸. 그저 어느새 우리가 함께 세운 가풍이 희생과 배려보다는 취향과 자유가 먼저가 되었다는 걸.


그 사실로 나도 자주 가슴 아팠지만, 더이상 그런 일로 울진 않게 되었다. 그저 매번 어긋나는 이 타이밍을 담담히 받아들일 나이쯤 되지 않았나, 그렇게 다짐할 뿐.

매거진의 이전글 31. 아버지의 유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