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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24. 2020

30. 일

'먹고사는 일'을 넘어서

왜 스스로 일해서 먹고살지 않는 거요?


사흘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던 제인. 어느 정도 지친 몸을 회복하고 거실로 들어서자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인은 여전히 의문의 눈초리를 던지는 이 집안 식구들을 향해 자신의 사연에 대해 들려준다. 자신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지만, 일하지 않고 구걸하며 다니는 거지는 아니라고. 일자리만 찾아준다면 언제라도 떠나겠다고. 단, 손필드 저택에 얽힌 사연과 자신의 실명만은 숨긴 채. 가난한 시골 교구 목사인 존은 제인에게 걸맞은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하며, 그전까지 기꺼이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청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아 소녀에게 세상이 주는 또 한 번의 환대였다.  


한 경기도 시장이 '청년 수당'이란 걸 처음 제안했을 때, 내 주변 어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팔다리 멀쩡하게 다 있고 일할 수 있는 청년들한테 왜 돈을 퍼주나?" 

 

포퓰리즘이라고 했다. 포퓰리즘의 사전적 정의는 '보통 사람들의 요구와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 활동'(캠브리지 사전)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 세금 갖다 퍼주는 불온한 정치적 사상, 활동'으로 변질된 채 쓰인다. 공산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을 일컫는 '레드 콤플렉스'와 한 세트로 따라다니며, 누군가를 어느 한쪽으로 쉽게 매도하는 단어로. 


2017년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힐빌리의 노래>. 이런 포퓰리즘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이다. '힐빌리'는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근처 쇠락한 공업지대(러스트 벨트)에 사는 가난한 백인들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 저자 '밴스'는 힐빌리 출신의 자수성가한 젊은 사업가다. 책의 외피는 가난한 미국 백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어떻게 가난, 가정폭력, 마약중독이라는 불우한 환경을 뚫고 예일 로스쿨을 들어갔는지에 대한 성공담 형식을 띄고 있다. 하지만 그가 담담히 회고하는 미국 백인 하층민들의 실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미국 사회를 들끓이고 있는 이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사회 양극화 문제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힐빌리 백인 노동자들. 그들은 왜 오바마를 버리고 합리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그렇다고 노동자 출신도 아닌 부동산 재벌 2세인 트럼프를 지지했을까. 아래는 '밴스'가 서술한 오바마에 대한 단상이다.  


"오바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어렸을 때 존경하던 사람들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명확하게 표준 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그저 생경하고, 그의 스펙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화려하다. 오바마는 복잡한 대도시인 시카고에서 자랐으며,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가 자신을 위해 펼쳐진 사회임을 아는 듯이 매사에 자신감 넘치게 행동한다. (p.301 <힐빌리의 노래> ) 


백인 노동자들의 오바마에 대한 거부감은 그가 흑인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살아온 이력의 생경함 때문이다.  대도시 출신의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엘리트. 그건 '운이 좋으면 실업자 신세를 면'하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는 깡촌 출신의 밴스와는 근본부터가 달라 보인다. 밴스에게 가난은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밴스의 조상은 '남부의 노예 경제시대에 날품팔이부터 시작하여 소작농과 광부를 거쳐 최근에는 기계공이나 육체노동자'로 살아온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부진 육체가 있었고, 노동을 팔아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고, 아메리카 드림을 꿈꿨다. 자본주의의 호황기. 그들은 일한 만큼 얻었고, 한때 미국의 뼈대인 중산층을 이루며 살았다. 평생 노동자로 살면서 몸의 언어를 기록한 철학자 '에릭 호퍼'에 의하면 그들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누구 못지않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등장하기 이전의 미국인들은 이상하게도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살이를 이야기할 때면 거의 예외 없이 “나 외에는 다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서둘러 달았다. 그들 가운데에는 이민 온 사람이 무척 많았다. (p. 32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하지만 경기를 부양하던 제조업이 기울고, 주로 백인들 차지였던 일자리들은 점점 외국 노동자들의 것이 되면서 그들은 서서히 정부 실업 보조금에 의지하는 빈민층으로 전락한다. 그나마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부심'마저 추락하게 된 것. 그리고 그 이유로 트럼프식 포퓰리즘, 즉 외국 노동자들의 유입을 막고 백인 노동자들에게 다시 일자리를 되돌려주겠다는 자국민 위주의 배타주의 정책이 이들 백인 노동자에게 통했다는 게 많은 이들의 분석이다. 


이 책은 다른 한편에서 미국 복지 정책의 실책을 이야기하는 예로도 자주 인용된다. '복지 여왕'이 그것이다.  복지 여왕이란, 일하지 않고 정부 수당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심지어 그들 수당의 상당부분은 마약을 사는데 지출되기도 한다고 하여 언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발 사례에 대해서 무조건 맹신하는 일부 사람들은 이 예화를 끌어와 시혜성 복지정책의 폐해에 대한 반증으로 사용한다. 우리도 이제 좀 삶의 질을 논하자는 복지 정책과, 빈부 격차 해소를 이야기하는 현 정부의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논지로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혐오는 막강하다. 우리 부모 시대 때 일은 생계와 직결됐다. 15-16세, 사춘기가 어디 있나. 발육이 완성되기도 전에 일을 나갔다. 가려할 수  없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다음날 굶을지 모르는 세상인데. 돈이 되는 것이면 무조건 하는 게 진리였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다르다. 일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취향과 선택도 고려한다. 이왕이면 즐겁게 하길 원한다. 노예처럼 일해서 번 돈을 쌓아두고 커피 한잔 사 마시지 못하는 어른을 보고 '돈의 노예'라고 말한다. 그들이 돈이 되면 뭐든 하던 시절. 눈감아 준 비리가 눈덩이처럼 쌓여 다리가 무너지고, 건물이 내려앉고, 배가 가라앉은 걸 우리는 보고 자랐다. 게다가 우리는 그들이 쌓은 노력이 어느 정도 자본주의라는 동력 덕분에 순풍을 달았다는 것도 안다. 그들의 노고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눈부신 노력 뒤에 운도 어느 정도 따라줬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기성세대가 되었고, 집 한 채 정도는(!) 소유한 부자가 되었다. (부동산 가격을 이렇게 천정부지로 띄워놓고는!) 그리고 지금 젊은이들에게 훈계한다. 너희가 우리 시대만큼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 것은 '노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그들의 논지엔 그들과 우리 세대 사이의 변화랄지 세월의 흐름을 반영하는 논지가 없다. 라테~로 시작하는 그것. 불쌍하게 말하면, 너무 그들 자신의 '노오력' 혹독하게 써버려서  '신'에게 돌아가야 할 일정정도의 감사를 잃었달까. 그래서 그들의 논지는 우리 귀에 잘 들리지 않는다. 그 모든 걸 자신의 공로로 여기는 오만함. 그들은 너무 '자신'의 '옳음'으로 꽉 차 있어서. '타인'의 '다름'이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여서. 


그리고 지금 세상은 일하지 않는 자에 대한 혐오보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자들에 대한 혐오가 더 팽배하다.  <힐빌리의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도 동일하다. 밴스가 지적하는 것들은 단순히 세금을 남용하는 개인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그들에게 근로의 의욕을 꺾게 하고 일시적 시혜에 단발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환경.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도록 만들고 누군가에겐  무기력을 드리우는 다른 출발점이 존재한다는 것. 그 불공정함에 대한 시정을 그도 내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두 친구가 있다. 대학에서 만나 절친이 된 사이다. 그들은 졸업할 때가 되자 각자 길을 모색한다. 친구 A는 대학에 남아 계속 연구하는 일을 하고 싶지만, 집안 사정상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지방 강사 자리 하나도 하늘에 별따기인 대학 사회에서 언제까지 버틸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린 학자금 상환도 목을 죄었다. 애초에 꿈같은 건 접었다. 그래도 꿈과 맞바꾼 직업이니 이왕이면 안정된 직장에 들어가 돈이라도 많이 벌고 싶었다. 처음 목표는 대기업과 공기업.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험을 준비했지만 역시나 경쟁은 치열했고, 차례로 낙방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자 중소기업이라도 어떤가 싶었다. 시작은 미미해도 열심히 하면 언젠간 알아주지 않을까.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명절 수당도 상여금도 없이,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을 바꿔나가며, 나이 들어 번듯한 내 사업 하나 차려 나갈 요량으로. 그때쯤이면 좀 여유 부리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하지만, 경쟁업체는 하루 걸러 생겨나고 지금 계약한 이 업체가 내년에도 또 우리 제품을 써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가 언제까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친구 B 또한 A처럼 일찌감치 꿈은 접었다. 그렇다고 불확실한 미래를 꿈꾸며 마냥 피터팬처럼 살 순 없었다. 성인답게 자기 몫은 하고 살고 싶었다. 그는 프랜차이즈 중에 경기 부침이 비교적 심하지 않을 것 같은 외식업체 하나와 계약해 일찌감치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지원한다며 자신의 건물 1층에 세 들었던 임대인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아들에게 제공했다. 대출을 낀 것이었지만 임대료가 나가지 않으니 자리가 잡히면서 조금씩 자금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몇 년 후 이번엔 좀 더 멀리 있는 건물에 가게를 하나 더 차린다. 역시 아버지 건물이어서 몇 년이 지나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고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려도 될 만큼 돈이 벌렸다. 열심히 일했고, 아버지는 아들 용돈 받아 산다며 주변에 자랑까지 하며 다녔다. 몇 년 후 그는 성실한 직원 하나를 지점장으로 앉히고 아침마다 두 사업체를 둘러보는 사장님이 되었다. 

      

분명 어떤 이의 시작은 확연히 다르다. (건물주라고 다 수익을 올릴 거라는 단순한 도식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없길. 지역에 따른 임대수익의 차이와 공실률 그리고 한 건물이 거느린 거대한 부채 비율을 생각해 보면 어쩌면 이건 배보다 배꼽이 큰 공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언가를 담보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도 엄연한 소유인 건 사실이다) 그리고 비단 건물뿐이겠는가. 그건 부모가 물려준 지적 수준이나 뛰어난 재능일 수도 있고, 사회 경제적 지위의 되물림일 수도, 결혼할 때 지원받은 전세자금일 수도 있다. 배경의 도움이 있었다는 건 기득권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건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갚는 것에서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과는 엄연히 다른 스타트를 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이 자본을 증식하는 이 사회에서 그건 어느 순간 확연히 다른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그들에게, 자본주의의 동력도 다하고, 이제 취향이랄지 삶의 질도 따져 물어야 하는 사회 초년병들에게,  고작 *한 달에 몇십만 원 정도 '용돈' 좀 주면 어떤가. 복지 여왕들처럼 일 안 하고 놀고먹을 만큼에 해당하는 기 백만 원의 수당도 아니지 않은가. 돈 많은 친척 어른이 오랜만에 만나 격려 차원에서, 너 요즘 열심히 산다며?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하며 쥐어주는 용돈처럼. 몇 백만 원 대의 임대료도, 몇 천만 원 대의 사업자금도, 후계자 수업용 어느 본부장 자리도 아닌데... 그런 출발도 무지 기수인데, 그 정도쯤 줄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는 한 달 월세가, 누군가에게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식사가, 또 누군가에겐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정도일 그것. 하지만 제인과 같은 천에 고아에게는 분명 따듯한 환대일 그것. 단지 금액의 규모를 떠나 그건 '격려받는 느낌'일 것이다.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사회가 주는 따듯한 환대. 그 적은 액수의 지원이 앞으로도 별반 달라 보일 거 같지 않지만, 좀 더 힘내 보아야지, 하고, 누군가의 어깨를 감싸안는 위로가 된다면. 그렇게 잠시 멈춰 서, 다른 생각을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여유가 된다면. 그걸 포퓰리즘 운운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 사회도 이제 그 정도는 가능한 사회가 되지 않았나. 



<힐빌리의 노래>, J.D.밴스 저/김보람 역, 흐름출판.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에릭 호퍼 저/방대수 역, 이다미디어.

* 심리학자인 김태형 교수가 어느 유튜브 강연에서 했던 이야기로 기억하는데, 링크를 찾지 못해 간접 인용했습니다. 정확한 워딩이 아닐 수도 있고 혹, 강연의 전체 맥락을 오해하는 글이 될까 봐. 링크를 찾게 되면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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