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이 울고 있다.주인님과 나만 있는 코리아타운의 싱글아파트가 지진처럼 흔들릴 정도로 주인님은 꺼이꺼이 울었다. 마치 내가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는 사실을 아는 듯 말이다.
뭐 주인님의 울음소리가 아무리 커도 이웃집 흑인들과 라티노들의 파티 음악소리에 묻혀 밖으로 새어나가진 않겠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자식들을 창문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주인님이 한동안 온갖 애정을 쏟았던 내가 이제 노쇠하여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의 충격이 큰듯 나의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큰 소리로 울고 있다.
바닥에 엎어져서 우는 꼴이 완전 개망신당한 모습이다.
나는 주인님의 아내와 사별한 후에 이집에 들어와서 주인님의 아내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평소 나를 대하는 주인님의 자상한 모습을 통해서 주인님이 사랑이 넘치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 주인님의 아내를 떠나보냈을때도 저렇게 울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나는 그냥 멀직이 떨어져서 주인님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냥 주인님의 곁에 가만히 있어주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마지막 위로가 될 것이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나 같은 개는 평생을 울부짖으며 보내는데 소위 ‘울음’에 관하여서는 통달하게 된다. 주인님의 울음소리가 저리도 오래토록 구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만큼 주인님이 퍼붓는 사랑이 깊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13년간의 오랜 삶속에서 통달한 진리중의 하나이다.
주인님이 최신 유행 하는 번역기라고 좋아라하고 내 목 주위에 달아놓은 ‘반려견 통역기’를 통해 통역되어지는 나의 음성은 대부분 의미 없는 울음소리로 이루어져 있어 인간들의 귀에는 통역기가 있건 말건 번역되어지는 개의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우리 개들은 눈빛으로 소통하고 바디랭귀지를 이용하여 서로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의 복잡하고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 인간들이 반려견 통역기라는 기계를 달아놓으면 개들과 속시원히 소통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 같다.
나같은 개들은 오감을 통해 육감으로 소통한다. 인간들은 입밖으로 내는 소리들을 통해 소통하려고 하는데 그건 정말 개소리다.
개짖는 소리를 번역해봤자 거의 배고프다. 아프다. 주인님. 누구야 등이 대부분이다. 비싼 돈을 들여 반려견 통역기를 사는 이유를 나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주인님께 순종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자 임무이므로 죽을때까지 반항하지 않을 것이다.
태어나자마 버려져서 길거리를 헤매다가 경찰에게 낚여 온동네 멍청한 개새끼들이 같이 합숙하는 셜터에서 나를 구원해준 우리 주인님을 나는 정말로 좋아한다.
셜터에서 만난 치와와가 (참고로 나는 골든 리트리버 종이다) 안 그래도 비좁은 셜터에서 내 품에 들어와 한 말인데 주인님이 오신 한국에서는 개들을 잡아먹는 인간들이 많다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 적이 있어 한국인에 대한 대체적인 선입관이 개판에 가까웠는데 막상 지내보니 한국인들만큼 정이 많은 사람들도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있을때는 개들에게 간이라도 떼줄것 만큼 친절하다가 아무도 보지 않으면 개들을 개패듯이 패고 차가 많은 도로에 죽게 내버려두는 가식적인 이중인격자들이 많다.
한국인이니 미국인이니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싸잡아 모든 한국사람이 개를 잡아 먹는다든지 혹은 모든 미국사람들이 개를 사랑한다든지 하는 말은 다 무의미한 개짖는 소리다.
아참! 개 짖는 소리가 나와서 말인데 나같이 주인님을 관찰하고 사려깊게 행동하는 개들과 달리 똥인지 음식인지 구별없이 자기 앞에 놓인 것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하는 소위 똥개같은 개새끼들은 정말 듣는 나도 시끄러울 정도로 무의미하게 짖어대길 좋아한다. 그래서 난 일부러 그런 개새끼들과 구별될려고 잘 짖지 않는다.
나처럼 똑똑한 개는 주인님도 똑똑한 사람을 만난다.
궂이 시끄럽게 짖지 않아도 똑똑한 주인님들은 잘 알아서 개들을 대한다. 정말 머리에 든것 없는 개들이 시끄럽다.
허구한 날 짖는다.
한번은 내가 그런 개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 이빨을 드러내길레 달려들어 목의 급소를 숨통이 막히도록 한번 깨물어 준 적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내 눈치를 살살보면서 피하는데 측은할 정도 였다.
근본없는 똥개들은 기죽었을때 참으로 불쌍하게 보인다.
인간들도 마찬가지 인것 같다. 혼자있을 때는 마음을 다스리고 여럿이 있을 때는 입을 다스려야 한다. 떠드는 인간치고 개들에게 잘해 주는 인간들을 난 13년 평생 한번도 보질 못했다.
난 개들을 잡숫는 것 분보다 쉴 새없이 나불대는 인간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다 겪어보고 하는 소리다.
내가 보아하니 인간들은 개들과는 달리 말로 서로 공격하고 싸움질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만히 지켜보면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 고함치고 언쟁을 벌인다. 그냥 우리 개들처럼 가만히 눈빛으로 소통할 순 없나 꼭 저렇게 말로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정말 개입장으로서 이해가 되질 않는다. 주인님은 인간치고는 조용한 타입인데 자식들이 나타나면 돌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 개들은 부모의 얼굴을 모른다. 그런데 가끔씩 얼굴 모르는 엄마가 그리워서 아파트 밖에 앰불런스가 지나갈때 사이렌 소리와 비슷한 소리로 울부짖는다. 그냥 그게 자동적으로 나도 모르게 입밖에서 나온다. 그런데 주인님의 자식들은 한동안 아침에 아이를 데려올때 ( 작은 인간들을 데려오는데 아마 주인님 자식의 자식같아 보인다 ) 매번 싸우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주인님의 자식들은 부모인 주인님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는 한번만이라고 어머니의 얼굴을 봤으면 소원이 없겠는데 인간들은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서로 싫증이 나나 보다. 안 그렇고서야 저렇게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고함을 치면서 다투지는 않을 것이다.
개들의 경우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처음 한번 물어뜯고 싸우고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면서 거리를 둔다. 그러나 지켜본 결과 인간들은 오랜 기간을 싸우면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고민은 관계에서 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고독이라는 것도 느끼는 이유는 이렇게 관계를 맺고, 혼자가 아닌 세상을 살고 있는데 우리를 둘러싼 타인이나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해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
개들은 주인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모른다.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주인님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주인님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그러나 주인님을 비롯한 인간들은 좋은 관계를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곁에 지켜보니 주인님의 자식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주인님이 돌봐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 보였다. 개들이야 주인님과 같이 지내는 일만 하면 되지만 인간들은 다른 많은 일들이 많이 있어 자식을 돌볼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는 모양이였다. 그렇다면 먼저 조용히 와서 이야기를 하면 주인님의 성격상 거절을 하지 못할 것인데 다짜고짜 하루는 찾아와서 고함을 치면서 자신의 자식을 집안에 두고 나가버리는 것이였다.
주인님은 자식을 따라가려다 방안에 남겨진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안고 어르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그렇게 순식간에 주인님과 나의 관계 속으로 들어왔다. 주인님은 첫 한달 동안을 아이의 우유를 먹이고 놀아주느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어쩔 줄 모르고 고생하는 주인님을 위해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님께 도움이 될까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아무래도 인간아이와 놀아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유심히 인간아이를 관찰하였다. 인간아이의 눈빛은 궁금증와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나에게 적대감정을 보이진 않았다.
인간과 다른 개라는 존재를 처음보는 사람치고 두려움없이 웃으며 나의 품에 들어왔다.
주인님은 처음엔 달려드는 아이에게 내가 놀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내가 잘 놀아주자 안심하는 듯 해보였다. 그러면서 우유를 아이에게 먹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주로 나와 놀게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주인님이 시킨 일이라 나는 기꺼이 순종하기로 하고 무엇을 하며 아이와 놀아줄까 이것 저것 생각을 해보았다. 사실 인간 아이들은 혼자서 잘 놀지만 조심성이 없어 다치기가 쉬운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아이를 지켜보면서 위험할 때 마다 내가 다가가서 보호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의 나이를 정확하게 갸늠해 볼 수 없지만 대략 낮잠도 자고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 가만히 텔레비젼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거의 나와 동년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는데 순발력이라든지 활동적인 면으로 보면 주인님보다 내가 아이를 지켜주는 것이 휠씬 낫고 그게 주인님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주인님의 자식이 아이를 맡긴 후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인님과 아이 사이를 번갈아 가면서 지켜보는데 하루가 얼마나 정말 쏜 살 같이 빨리 지나갔다.
주인님의 자식은 아이를 매일 저녁때 쯤 픽업하는데 나처럼 하루가 피곤했는지 매일 잔뜩 찌부릉한 얼굴로 아이를 데려갔다.
과거에 혹시 미움받을 일을 한 적이 있었었나 아무리 내 머리를 굴려봐도 오랫동안 주인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인님의 성격을 잘 아는 나로서는 도저히 추리해 낼 수가 없었다.
혹시 나때문에 주인님이 난처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원래 주인님은 살기 훨씬 편한 곳에 살았는데 애완동물을 기를 수 있는 아파트를 열심히 찾다가 결국 일부러 나쁜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 내가 나쁜 인간이 우글거리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시도때도 없이 아파트 주위에 들려지는 병원 엠뷸런스와 경찰차 사이렌 소리 때문이다 ) 이 음침하고 낡은 아파트에 살게 됬다.
원래 나를 싫어했는데다가 이런 곳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 매번 찾아오기 싫어셔 였는지 주인님의 자식은 나를 노려보면서 주인님께 여러번 불평을 터트렸다.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주인님은 자식이 그럴때마다 난처한 표정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설득하였다.
나의 목에 걸린 반려견 통역기는 개의 말이 인간들에겐 번역이 되지만 인간의 말이 개에겐 통역되지 않는다.
사실 통격기가 있건 말건 눈빛과 표정만으로 인간과 소통할 수 있기에 나는 주인님이 무엇을 설득하는지 짐작 할 수가 있다.
주인님은 나와 얼마나 함께 살고 싶어하는지,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간절하고도 애닳은 마음을 담아 호소하였다.
주인님은 아내를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고 많이 외로웠었나 보다.
주인님은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주인님의 애잔한 마음이 충분히 나에게 전달되었다. 외로운건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난 배 고픈 것은 몇일 견딜 수 있지만 외로움은 하루로 견딜 수 없다. 마음이 그렇게 불안 할 수 없다. 나같은 개들은 외로우면 정말 안절부절해 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서성거린다. 주인이 없이 혹은 있었다가 버려진 길거리의 개들의 울부짖음을 난 밤마다 듣고 있다.
반려견 통역기에 아무리 그 울부짖음을 번역해 봐도 그저 아무 의미없는 울음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다. 개들은 그래서 종種이 틀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떼로 모여 다닌다. 내가 짐작하건데 인간들도 외로움을 잘타는 존재인것 같은데 다 모여지내는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왜 그럴까? 한 공간에 2명만의 인간이 모여도 서로 무시하는듯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각자 따로 냉랭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러다가 혼자가 되면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텔레비젼앞에 몇 시간을 멍청한 표정으로 앉아있는다. 같이 있으면 헤어질려하고 홀로 있으면 만나려고 분주한 인간들의 모습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주인님 자식도 내가 같이 시간을 보낸적이 한번도 없지만 아마 그런 부류의 인간임에는 내 모든 소뼈다귀를 다 걸 수 있다.
어차피 개를 키우지 않고 주인님 홀로 있어도 잘 찾아오지 않아보이는 주인님 자식은 주인님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기는 척 주인님과 내가 같이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것을 허락했는데 굽실거리는 주인님과 대조적으로 거만하게 나를 바라보는 주인님 자식이 나는 달려들어 물어뜯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그러나 내가 동물적 본성을 드러내고 화를 내봤자 결국에는 주인님이 홀로 남겨질 거라는 생각때문에 나는 그러지는 않기로 하고 약간 소심한 톤으로 조심스럽게 주인님 자식을 향해 한번 짖어주었다.
짖으면서 보니 주인님 자식은 나의 천적 고양이와 같은 인상의 얼굴을 가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고양이들은 애당초 개들의 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게으르고, 자기 밖에 모르고, 씻기 싫어하고,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그걸 인간들이 모르는지 우리 개들은 얼마나 주인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온 맘을 다하여 관찰하고 섬기는데 고양이들은 쥐뿔도 하는 일이 없이 가만히 있는데도 완전히 상전 모시듯이 하는데 도저히 난 납득이 가질 않는다.
평생 손도 까딱하지 않고 인간들에게 음식을 받아먹고 똥이나 싸는 고양이들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저주할 것이다. 주인님의 자식이 그 저주의 대상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다는 것이 조금 안타깝지만 그래도 나같은 개들은 한번 마음먹은 것은 고양이와 달리 절대로 변함이 없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거대한 뚱보 고양이같은 주인님의 자식과는 달리 주인님과 내가 돌보는 아이는 정말 맑고 순수한 눈빛을 가졌다. 주인님이 낮잠을 주무실때나 잠깐 외출할때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 그 아이를 보호하다보면 기진맥진할때가 한 두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파트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아이와 놀면 하루가 얼마나 즐거운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주인님도 귀여워하는 인간아이를 나도 귀여워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지만 주인님과 연관이 없다손 치더라도 이 인간아이는 정말로 하는 행동이 귀여워 쓰다듬어 주고 싶다. 나는 인간의 웃는 모습을 가장 좋아한다. 인간아이는 같이 있는 하루종일 까르르 거린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가장 좋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점점 웃음도 줄어들고 자꾸 홀로 있고 싶어하다가 우울함에 빠져버리는 것 같다.
사실 인간이 그렇게 되는 것이 주인님을 잘 만나면 모든 음식과 집걱정이 사라지는 우리 개들과는 달리 인간들은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종일 분주하게 일하다 보면 웃음도 줄어들고 성격도 날카로워지면서 쉬기 위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어있다. 홀로 된다는 것은 개나 인간에게 결코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 매일 방실거리는 인간 아이를 보면서 저 아이도 언젠가 어른이 되면 웃음을 잃어버리고 혼자 있길 원하는 인간 어른이 되어버릴수 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왔다.
그래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웃음을 잃어버릴 그날까지 그냥 곁에 있어주는 것 밖에 없다.
주인님이 요즘 기침을 많이 하시면서 낮잠을 자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인간아이가 다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해야 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그 다짐이 무참히 짓밟힌 일이 일어났다.
그날따라 주인님이 몸이 힘들어서 몸져 누어있었는데 주인님 자식인 고양이 얼굴이 아파트로 찾아왔다. 놀란 주인님이 문을 열어주자마자 들어와서 대성통곡을 하였다.
물론 내가 그 고양이 얼굴이 하는 인간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언제나 주인님의 아파트에 올때 같이 오는 인간아이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하려고 코를 킁킁 거렸다. 소의 우유 냄새와 신선한 풀냄새가 섞인 아이 인간의 냄새를 기억해 내는데 별 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주인님은 고양이 얼굴이 하는 울음섞인 말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무말없이 듣고 있었다. 괘씸하기 그지 없는 고양이 얼굴이지만 주인님이 저렇게 마음이 아파하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분명 인간 아이의 일일 것이다.
혹시 저 고양이 얼굴이 인간아이를 픽업해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잠깐 어디 들렀다가 고양이 얼굴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인간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 고양이 얼굴이 아이를 이곳 아파트에 잠시 내려놓는 순간도 싫어하는데 저렇게 오랫동안 여기 있을 턱이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고양이 얼굴은 아파트 안으로 들어온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문턱에 오랫동안 서서 울고 불고 밤새도록 있다가 되돌아 갔다. 주인님은 고양이 얼굴을 보내고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는 주인님의 뒷모습에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애잔함을 느낄수 있었다. 애잔함이 평범한 슬픔과 다른 점은 애잔함이 슬픔보다 더 깊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애잔함의 대상은 낯선 대상이 아니라 깊이 사랑하는 대상이라서 그렇다. 나같은 개들은 주인님이 되는 인간들과 애잔함이 깃든 깊은 관계속에 있다. 주인님에 대한 충성심이 깊을 수록 주인님이 손쓸 수 없는 슬픔속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아픔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된다. 나는 조용히 꼬리를 흔들면서 다가가 주인님의 다리를 비벼댔다. 주인님은 나를 바라보지 않고 계속 창문밖을 응시하면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분명 인간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것이다. 정확히 무슨일이 벌어진지 알 수 없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는 주인님의 손끝의 감정이 평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나의 육감에 그 슬픈 감정이 그대로 내려와 앉았다. 새깃털처럼 가볍지만 내려오면 육중한 무게로 어깨를 짓누르는 그 슬픔이 그대로 내 마음에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에 인간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그 다음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에 문소리만 들리면 나는 혹시 그 인간아이가 아닐까 바라보았다. 문밖으로 무슨소리만 들려도 나는 문에 다가가서 문을 열려는듯 긁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인간아이는 결국 주인님과 나의 공간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주인님 다음으로 인간에게 정을 부었던 인간아이가 나타나지 않자 몇개월은 공허함에 미칠지경이 되었다.
주인님이 있어야 하는 개들에게 충성의 대상인 인간들이 사라지면 공허감이나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도저히 가만히 바닥에 누워있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허무주의는 또 다른 이름의 무신론이다. 나같은 개가 무신론을 거론하니까 우스운 모양인데 모든 개들 (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은 작은 애완견들은 제외하고 )에게 주인님은 모두 다 신神이다.
개가 원하는 것을 다 주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관계로 맺어져 소통하고 사랑을 나누는 살아있는 신과 피조물의 관계이다.
인간아이도 나타나지 않자 고양이 얼굴도 함께 종적을 감추었는데 얄미운 고양이 얼굴이지만 주인님이 너무 힘들어 하시니 고양이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주인님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멀찍이 다가가지 않고 누워 주인님의 눈치만 살폈다. 주인님은 나와 아침산책을 한 뒤 집에 들어와서는 하루종일 멍하니 창문밖만 바라보았다. 일주일에 한번 차를 몰고 마켓을 갈때도 평상시 운전하면서 부르던 휘바람도 멈추고 화가 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살얼음을 걷는 듯한 나날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입맛도 없고 자는 시간이 많아지자 주인님은 나를 동물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평소 가던 동물병원은 아주 냄새나고 개짖는 소리가 시끄러운 곳이였는데 이번에 주인님을 따라간 동물병원은 아주 근사한 곳이였다. 사실 우리개들은 주인님이 정해지면 주인님만 바라보고 신경쓰는데 그 곳에 모인 개들은 자신의 주인들 뿐에게만 아니라 동료 개들에게 모두들 주인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듯 다들 아주 친근하고 다정했다. 옆에 나보다 종족이 천한 계급인 삽살개에게 물어보니 이 병원은 인간과 개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대화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그런 장소라고 대답했다.
지능이 조금 낮아서 이 장소를 정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했지만 분위기로 봐서 나나 주인님에게 필요한 교제장소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야 주인님만 건강하고 잘 계시면 그것으로 만족인지만 인간인 주인님은 그래도 같은 인간들과 담소도 나누어야 된다는 것을 난 잘알고 있었기에 이 장소를 어떻게 알고 찾게 되었는지 알순 없었지만 주인님이 시간이 갈 수록 이 곳의 인간들과 웃고 즐기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내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나는 이 곳에서 주인님이 사라진 인간아이와 고양이 얼굴을 잠시라도 잊고 같은 또래의 많은 인간들과 자주 교제했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주인님이 그래야 건강과 활기를 찾고 나에게 애정을 더 많이 배풀어주실 것이라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주위의 인간들과 같이 온 다른 개들도 다들 기분이 좋아 흥분되는지 연신 혀를 널름거리면서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런 흥분의 도가니가 만들어진 이유는 안 물어 봐도 그들의 주인들이 다 기분이 좋다는 증거이다. 개들은 주인이 기분 좋으면 같이 기분이 덩달아 좋아진다.
가끔씩 인간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이유는 그들의 주인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인간이나 개들이나 마음 한구석에는 주인님을 모시는 공간이 반드시 있다. 만약 주인님이 있어야 할 그 공간이 텅 비어 있으면 불안해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길에 버려진 개들이 다들 그렇다. 주인에게 버려지고 주인이 없어 슬픔으로 마음이 가득차 있고 분노와 광기만이 주인없는 개들의 입에선 끊임없이 흘러 넘친다. 주인이 없는 삶과 주인이 있는 삶의 차이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주인이 없는 삶이 지옥이라면 주인이 있는 삶은 천국이라는 완전한 차이이다.
주로 종족번식을 위해 동침을 하는 개들에게 삶의 낙이라면 오로지 주인님이 있냐 없냐는 이유로 나누어 진다. 주인님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주인님이 괴로우면 나도 괴롭다. 주인님이 외로우면 나도 외롭고 주인님이 절망하면 나도 절망한다. 주인님이 유쾌하면 나도 유쾌하고 주인님이 웃으면 나도 짖는다. 이것이 주인님이 있는 개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삶이 불안하다. 아무런 이유없이 분노하게 된다. 나는 주인님과 멀찍이 떨어져서 주인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 아이가 사라진뒤 처음으로 듣는 주인님의 웃음소리였다. 각자 개들을 데리고 온 다른 많은 사람들주과 한 데 어우러져 웃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렇다. 주인님은 내가 대신해주지 못하는 인간만이 메워줄 수 있는 갈증을 느꼈던 것이다.
주인님이 대화할 다른 인간이 절실히 필요했었구나 생각하니 그것을 일찍 헤아리지 못한 나에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이러고도 주인님의 반려견이라고 말할 수 있나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성격이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코커스 패니얼종의 개한마리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코커스 패니얼 종은 워낙 도도한 종의 개라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없는데 희안하게도 다정한 얼굴으로 나에게 어느 주인을 따라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자괴감에 괴로워 대꾸하기 싫어 질문을 못들은 척 외면을 하고 있는데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한발자국도 옮길수 없다는 듯이 멀뚱이 오랫동안 내 앞에 서있어 마지못해 나의 주인님이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알려주면서 나는 그 암컷이 자랑하듯 뽐내는 황금빛깔의 윤기나는 멋진 털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 암컷의 주인은 부자라는 것은 단박에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코커스 패니얼은 자신의 주인이 인간여자라고 덧부치면서 은근한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순간 코커스 패니얼이 지금 발정기때라는 확신이 나의 가슴을 후려쳤다. 요즘은 인간과 같이 지내는 반려견들이 거세하는 것이 인간들의 법으로 정해져 있어 대부분 수컷이고 암컷이고 거세를 하는데 나는 아주 어릴때 거세를 했었다. 그런데 내 앞의 코커스 패니얼은 거세를 하지 않았는지 계속 자신의 혀를 날름거리면서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발정난 개는 아무도 못말린다.
시도때도 없이 발정하는 인간들과 다르게 개들은 어느 기간동안 종족번식을 위해 일정한 기간동안 발정기를 가진다. 거세되어 그 기분이 어떤지 확실히 모르지만 관계를 가지는 개들의 신음소리를 듣거나 그늘진 구석에서 서로 개들이 교접하는 모습들을 바라보면 교접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고 교접 후 아름다운 작은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숭고하고도 장엄한 일이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은 그 숭고하고 장엄한 교접을 한낱 야만적인 행위로 폄하하기도 하는데 그건 교접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교접은 생명체와 생명체가 서로 만나 사랑을 확인함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결과를 가지는 일련의 작업이며 일종의 거룩한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코커 스패니얼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나에게 덤벼들듯 눈에서 광선을 뿜어냈다. 내 몸이 거세를 당하지 않았다면 저 광선에 맞아 내 몸도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자자 날 그만 쳐다보고..코커 스패니얼! 여기는 도대체 어디길래 인간들과 반려견으로 득실대는 거지? “
나의 차가운 반응에 코커 스패니얼을 정신을 차리려는듯 고개를 몇번 좌우로 흔들어 대더니 다시 한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그 날 잡아 먹을 듯한 광선은 뿜지 않고 다소 수그러진 눈빛이였다.
“어라 넌 거세수술을 한 거야?”
“난 거세수술보다 중성화수술이란 말을 더 좋아하지”
“거세니 중성화니 니가 그말을 좋아한다는 것이 뭐가 중요하니?”
서로 사랑을 할수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인지 코커 스패니얼은 차가운 음성으로 나에게 쏘아붙였다.
“하긴..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평소 나는 인간들이 개들을 사랑한다면서도 생식기를 없애버리는 중성화수술을 하는 점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주인님이 결정하는데에 따라 순순히 따르는 것이 개의 도리(?)이기에 우리 주인님도 나를 중성화시킬때 아무런 거부반응을 표시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물이 지어진데로 놔두지 않고 인간 마음대로 개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뭔가 좀 잘못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뭐하는 데 인간들과 개들이 한곳에 이렇게 많이 모여있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나는 코커 스패니엘에게 조금 높은 톤으로 짖었다.
“개 좋아하는 인간들 모임이야. 그냥 모여서 수다 떠는 데지”
“오호라. 개를 좋아하는 인간들 모임이라구. 그런데 인간들끼리만 서로 이야기하고 개들은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인데?”
나같은 골든 리트리버종들은 앞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을 인도하는 맹도견 업종에 많이 종사하는데 그 이유가 맹도견들에게는 인간과 동물사이의 감정흐름을 읽는 능력이 굉장히 탁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골든 리트리버인데다가 태어날때부터 나는 다른 개들보다 월등하게 인간과 개들 사이의 감정흐름을 아주 센스티브하게 잘 읽는 편이였다.
“이름이 뭐야? 이 재미없는 중성개야!”
“중성개?. 재미있군. 내 이름은 중성개가 아니라 코비야”
그렇다 내 이름은 코비다. 주인님이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부르면서 내 이름이 되었다.
“코커 스패니얼! 도대체 왜 이 병원은 인간들과 반려견으로 득실대는 거지?”
“나도 몰라. 나도 여기 처음이야. 내가 다니던 병원은 이 분위기와 완전 반대였는데..내가 몇일 아팠더니 집사가 여길 데리고 왔네”
“집사? 집사가 뭐야?”
“응 나한테 밥도 주고 재워주고 돌봐주는 인간이지”
“주인님이라고 불러야지. 집사가 뭐야?”
“너야 말로 주인님이 뭐야? 집사라 불러야지”
코커 스패니얼은 나에게 되려 윽박질렀다. 나는 대꾸를 하려다 말고 주인님은 어디 계시나 주위를 둘러 보았다.
“어라. 주인님 어디로 갔지?”
“집사하고 여길 나갔어”
“엉? 날 여기 두고?”
“너는 무엇때문에 여기왔어?”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런데 주인님 어딜 갔지? 걱정되네..”
“무슨 개소리야?. 니가 왜 인간을 걱정해?”
나는 정말 주인님이 걱정 되었다. 저번에 주인님 자식과의 일로 주인님이 많이 기분이 상했는데 이번에 저 코커 스페니얼의 집사와 또 다른 교제가 시작되면 얼마나 더 기분이 상할까 미리 걱정이 된 것이다. 나는 주인님이 인간끼리 똑같은 관계의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나같은 반려견과 인간들은 그냥 서로 같이 있어주어도 서로 교감하고 사랑을 느끼는데 인간과 인간들은 왜 그리 시작부터 시끌벅적 이야기 하다가 매번 서로 상처를 주고 헤어지고 울고부는지 나는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코커 스페니얼은 나의 주위를 계속 맴돌다 자기도 지친듯 다른 개들과 인간 무리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코커 스페니얼의 발정난 공격을 물리친다고 써버린 나의 기운을 차리기 위해 그냥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렇게 잠시 서있는데 하얀 옷(사실 나는 하얀옷 검은옷 두가지밖에 구분할 수 없다 – 주 최근 연구에 의하면 개의 눈에는 세상이 회색,녹색,적갈색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개는 원래 어두운 일몰부터 새벽 시간에 사냥감을 찾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색 식별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을 입은 인간여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인간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에게서 주인님의 자식인 고양이 얼굴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의아했다. 저 하얀옷 여자가 고양이 얼굴과 친구인가? 나는 다시한번 킁킁거리면서 조심스럽게 하얀옷 여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열심히 손바닥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바라보던 하얀옷 여자는 나에게 함박웃음을 지면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내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허락하는데 생면부지인 하얀옷 여자와 친한 듯 꼬리까지 흔든 것은 그 하얀옷 여자의 체취를 더욱더 가까운 곳에서 맡아보기 위함이였다.
자신의 손모양을 마치 주인님이 날 빗어주는 기구처럼 해서는 내가 짖을때까지 계속 하얀옷 여자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각각의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한 체취를 정확하게 구분할수 있는데 나는 그 하얀옷 여자가 고양이 얼굴과 직접적으로 최근에 서로 접촉했음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주인님의 지시를 잘 따르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인식하는 것과 주인님이 원하는 방향을 인식하는 것 바로 이 두가지이다.
분명 저 하얀옷 여자를 따라가 보면 주인님이 그토록 찾기 원하는 아이인간를 찾을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하얀옷 여자를 따라가라는 명령을 내려주어야 하는 주인님이 지금 사라져 버려 나는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주인님의 훌륭한 개가 될수 있을지 나는 너무 당황스러워 낑낑거렸다.
내가 낑낑 거리자 하얀옷 여자는 내머리 쓰다듬기를 그만두고 함박웃음을 짓더니 내가 별로 평소 좋아하지 않는 간식을 어디서 꺼내어 내 코 앞에 들이 밀었다.
나는 난감했다.
저 간식을 받아먹어야 할지 아니면 주인님을 찾아 나서야 할지 말이다. 잠시 나는 하얀옷 여자가 내미는 간식의 냄새를 온 신경을 다해 흡입하고 난뒤 마지못하는 식으로 날름 입에 갖다 넣었다. 하얀옷 여자는 뭐가 기분이 좋은지 손벽을 치면서 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하품을 했다. 나는 하품을 잘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내가 하품을 하면 내가 지루하거나 피곤할 줄 하는데 (물론 그럴때도 있지만) 방금 나는 ‘긴장이 되어서’ 하품을 했다.
어디서 사라진 주인님을 찾는담?
나는 하얀 옷 여자에게 다가가 여자의 손을 핣았다. 인간들은 내가 손을 핣으면 간지럽다고 까르르 거리며 좋아하는데 나에겐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복종과 화해의 제스처로 인간이나 동료개들을 핣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얀 옷 여자의 손을 핣은 것이다.
그렇게 하품도 하고 손도 핣으며 있는데 갑자기 어디에서 인가 하얀 옷 여자와 비슷하게 생긴 ( 각각의 냄새들은 판이 하게 다르지만 ) 인간 하얀 옷 입은 여자들이 무리져서 나타났다.
그러고 서로 이야기를 떠들었는데 나는 이 순간이야 말로 여기를 벗어나 주인님을 찾아야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둘러보니 예전에 내가 갇혀있던 셀터같이 수 많은 개들이 울어대고 있고 간간히 하얀 옷 여자들이 그 개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개들을 쓰다듬고 간식들을 주고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주위에 있는 개들은 각각의 높이와 장단으로 짖거나 낑낑거렸는데 대부분들이 불안함을 호소 하였다. ‘침입자가 가까이 있다. 우리 친구가 아닌것 같아. 방어 태세를 갖추어라’라는 몰티즈부터 낮은 으르렁 거림을 하는 허스키까지 천태만상이였으나 한결같이 앞으로의 자신들의 생명이 곧 마칠 것 같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곳은 예전에 주인님과 같이 간 장소 같았다.
그 장소는 내가 짖거나 주인님과 놀자고 어리광을 부리기에는 분위기가 이상한 그런 장소였는데 그 장소를 갔다온후에 주인님 아내의 모습은 볼수가 없었었다. 나 같은 개들은 인간들보다 후각이나 청각이 월등한데 주인님의 아내가 안보여도 주인님 아내의 냄새는 집안 곳곳에 있어서 나는 얼마나 그 냄새의 주인공이 나타나길 기다렸는지 모른다.
나는 도리질을 했다.
어서 정신 차리고 이 장소를 떠나 주인님을 찾아야지.
나는 수많은 개떼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긴 복도를 정신없이 뛰어 돌아 다녔는데 아무리 돌아봐도 밖으로 나갈수 없었다. 문들이 달린 작은 방들 건너편에는 수많은 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순간‘난 죽기 싫어’라고 외치며 달려가는 개 한마리가 있었는데 그 개는 바로 나에게 발정했던 (자끄만한 놈이 웃긴다) 코커 스페니얼이였다. 그런데 코커 스페니얼의 뒤로 하얀 옷 입은 인간 두명이 달려왔는데 인간 한명이 순식간에 코커 스페니얼을 들어올렸다. 좀전에 발정에너지로 봐서는 충분히 인간 한명 정도는 제압할 것이라고 나는 계속 낚여진 코커 스페니얼을 바라보았으나 인간의 품안에 안기자 마자 코커 스페니얼은 풀이 죽은듯 온몸이 축쳐져 버렸다.
그렇게 하얀 옷 입은 인간의 품안에 안긴체 코커 스페니얼은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갔는데 아주 순간의 찰나로 코커 스페니얼은 감은 눈을 힘들게 떠서 나를 바라보았다. 개들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한다. 내가 어릴때 없었지만 요즘 흔하게 눈에 띄는 신종 개들은 인간들이 이상하게 개들의 눈을 귀엽게 만든다고 기형으로 튀어나올정도로 크게 만든 개들은 그 눈으로 감정을 많이 나타내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처럼 평범한 개는 눈으로 상대방에게 많은 감정들을 나타낸다. 방금 코커 스페니얼의 눈에는 눈물이 있었고 나는 분명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 눈물은 바로 죽음 직전 ( 예전 셀터에서 인간들이 무슨 음식이나 바늘을 꽂으면 한결같이 그 개들은 죽어버렸다 )의 개들이 똑같이 흘린 눈물이였다.
아 이곳은 개들을 죽이는 곳이구나!
나는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그런데 주인님은 왜 날 여기에 데려다 놓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가 없었다. 분명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하지만 나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왜 주인님이 나를 개들이 죽어가는 이곳에 놔두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주인님이 인간아이 때문에 슬퍼해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므로 빨리 이 곳을 벗어나 내가 인간아이의 부모인 고양이 얼굴의 냄새를 여기 있는 하얀 옷의 여자에게서 맡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헸기 때문이다.
나는 개들이 죽어 나가는 이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하얀옷 인간들의 손을 뿌리쳤다.
이리 도망 가고 저리 도망 가고 얼마나 많이 피해다녔는지 내가 숨이 찰 정도로 몸을 열심히 움직였다. 하얀 옷 인간들도 지친듯 바닥에 널부러렸는데 갑자기 복도끝에 큰 문이 열리면서 더 많은 숫자의 하얀옷 입은 인간들이 복도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번개같이 열린 큰 문 틈 사이로 몸을 날렸다. 내가 문틈 사이로 들어가자 그 장소에 있던 모든 하얀옷 입은 인간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렸다.
인간들이 왜 소리를 치는지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오로지 주인님의 냄새가 배여진 장소를 찾아 코리아 타운의 이 골목길 저 골목길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돌아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내 몸이 많이 늙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주인님이 나를 쉬게 하려고 그 장소에 데려갔구나 이해를 하게 되었다. (모든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 주인님은 분명 나를 배려할 정도로 자상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알수 없었지만 주인님의 집을 찾겠다는 나의 집념은 꺾을 수 없었는지 결국에는 주인님의 집을 찾을 수가 있었다.
놀란 눈으로 집문을 열어준 주인님에게 나는 반려견 통역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 냄새. 찾았다.”
영문을 모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인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부터 아이를 찾고
고양이 얼굴에게 아이를 돌려주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이제 내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저 다시 주인님이 아내와 있을때 처럼 다른 아내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뿐이였다.
주인님이 울고 있다. 주인님과 나만 있는 코리아타운의 싱글아파트가 지진처럼 흔들릴 정도로 주인님은 꺼이꺼이 울었다. 마치 내가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나는 사실을 아는 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