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 먹어 본 기억이 있다. 손질되어있는 닭고기를 사 와서 밑간을 하고, 튀김옷을 입히고 하나하나 기름에 넣는다. 혹여나 눌어붙을까 노심초사하며 닭고기를 하나하나 돌린다. 와중에 기름이라도 한 방울 튀면 화상을 입는 것도 흔한 일. 요리 후 남은 기름을 처리하는 일까지 생각하면 치킨은 사서 먹는 게 가성비가 훨씬 좋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민간식 후라이드 치킨도 한번 만들어 보려면 품이 제법 많이 든다. 개인이 한 마리 요리하는 일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업으로 수많은 치킨을 조리하는 사장님들은 오죽할까. 물론 업장에는 보다 전문적인 조리시설이 있겠지만, 하루 수십 마리의 치킨을 튀긴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후라이드 치킨을 로봇이 조리하는 시대가 왔다. 뜨거운 기름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로봇 팔은 닭고기가 알맞게 튀겨질 때까지 분주하기 철망을 흔든다. 어디 그뿐인가? 다 튀긴 치킨을 양념통으로 옮겨서 양념을 입히는 일까지 로봇이 할 수 있다. 로봇이 치킨을 요리하다니! 스카이넷이 지구를 점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인가. 정녕 내가 사는 22세기에 다시 한번 러다이트 운동¹을 보게 되는 것인가.
1) 19세기 초반 영국에서 있었던 기계 파괴 운동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발전하고, 새로운 기계는 우리의 삶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도 얼핏 보면 약국은 지난 20년간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인다. 처방전을 가지고 가면 약을 조제해 주는 곳. 필요에 따라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는 곳. 건강과 영양에 관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 하지만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있을 것 같은 약국도,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많은 첨단 기계들이 도입되고 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처방전 바코드다.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게 되면 우측 상단 혹은 하단에 2차원 바코드가 인쇄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처방전의 위조, 변조를 방지하기 위한 기능이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사실 약국에서 이 바코드는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바로 바코드를 통한 처방전 입력이 가능하다는 것! 전산프로그램과 연동된 리더기로 이 바코드를 찍으면, 별도의 조작 없이 처방전이 프로그램에 입력된다.
만약에 처방전에 바코드가 없다면 처방전의 내용을 하나하나 손으로 입력해야 한다. 먼저 환자 이름,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여 수진자 조회²를 한다. 그다음 처방전 교부번호를 입력하고, 의사면허번호, 병원을 알 수 있는 요양기관 번호를 입력한다. 여기까지 마치고 나서야 처방 의약품을 입력할 수 있다. 특히 소아 처방전의 경우에는 1회 복용량이 소수점 아래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주 조심해서 입력을 해야 한다. 하루에 몇 번 먹는지 잘 체크하는 것은 필수요, 혹시나 중간에 용법이나 복용일 수가 다른 약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주의를 요한다. 하나하나 입력을 다 마쳤다고 끝이 아니다. 약제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기호³가 있는지 한번 더 확인해야 한다. 여기까지 모두 마쳐야 처방전의 접수가 완료되는 것이다.
하지만 처방전 바코드의 경우는 이 모든 과정을 1초 이내에 완료되도록 도와준다. 수기입력의 경우처럼 추가적으로 검토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빠르고 신속하다. 정말이지 이 바코드 입력 시스템이 없을 때는 약국을 어떻게 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2) 의료보험 자격을 조회하는 것
3) 기본 의료보험 이외에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코드
“죄송해요 약사님, 애기가 내려오면서 처방전을 찢어버렸어요.”
소아과에서 처방전을 받아오신 어머니가 미안해하며 처방전을 내게 건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그 2~3분 사이에, 처방전을 지키려는 자와 찢어버리려는 자의 암투, 그리고 그 와중에 처방전을 지켜서(비록 찢어졌지만) 내게 건네준 어머니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하하 괜찮습니다 어머니. 처방전 저한테 주세요.”
그런데 괜찮지 않았다. 하필 아기가 찢어버린 부분이 처방전 바코드 부분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방법이 없다. 그냥 하나하나 다 입력하는 수밖에...
바코드 못지않게 약국 운영을 윤택하게 하는 녀석이 있으니 바로 자동 조제 기기 ATC⁴다. 보통 고혈압, 고지혈증과 같은 만성질환으로 1~2개월 분의 약을 꾸준히 타 가시는 분들이 많이 방문하는 약국에는 필수적인 기계이다. 하지만 우리 약국처럼 이비인후과나 소아과 처방을 주로 받는 약국은 고민이 필요하다. 나도 처음에는 많이 고민했다. 우리 약국은 2~3일 치의 감기약 조제가 많기 때문에 ATC가 꼭 필요할까?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사면 후회하지 않을까? 와 같은 고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결정적으로 ATC를 구매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발생했다.
4) Automatic Tablet Counting and dispensing의 약자로 자동으로 약을 조제해주는 기계
약국을 운영하면서 궁금한 일이 발생하면 물어보는 사이트가 있다. 약사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활동하는 비공개 커뮤니티이다. 주로 현직 약사들끼리 지식을 공유하거나, 서로의 애환(?)을 위로해 주는 쉼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약사들이 모이다 보니 궁금한 내용을 물어보고 답해주는 경우도 많은데, 나처럼 ATC를 살까 말까 고민하는 약사님들도 참 많았나 보다. 관련 질문을 검색하니 수십 개의 글이 나왔다. 그중 하나의 글에 달려있는 댓글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ATC구매를 고려하신다고요? 그렇다면 고민하지 말고 일단 계약부터 하세요. 자 제가 가정을 한번 해 볼게요. 점심시간에 약사님이 짜장면을 먹으려고 시켰습니다. 맛있겠다 하면서 껍질을 벗기고 젓가락을 뜯는 그 순간 환자가 들어옵니다. 2달짜리 혈압약 콜레스테롤 약 처방입니다. 이때 ATC가 있는 약사는 기계 돌리고 짜장면 드시다가 약 드리면 됩니다. 만약 없으면? 어쩔 수 있나요. 다 불어 터진 짜장면 드셔야지요.
머리를 세게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사실 약국에서 짜장면을 잘 시켜먹지도 않고, 우리 약국에 혈압약 처방전을 가져오시는 분이 거의 없긴 하지만 어째서인지 불어 터진 자장면을 울면서 먹고 있는 나 자신이 뇌리를 스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ATC구매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처음에는 너무 충동구매를 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았다. 우리 약국은 처방전의 절반 이상이 가루약인데, 비싼 기계 모셔놓고 놀리는 게 아닐까? 안되면 중고로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나?
하지만 이런 걱정이 무색할 만큼 ATC는 열심히 잘해주고 있다. 알약 처방만이라도 기계가 조제를 해 주게 되니 그만큼 환자와 상담할 시간이 늘어났다. 가루약과 알약 처방전이 함께 접수될 경우에도 내가 가루약을 조제하는 동안 ATC가 알약을 조제해 주니 조제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장기처방전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약을 받아가는 고객들의 만족도가 더 높아졌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기술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기계가 개발되어 산업현장에 투입되고 있는 현실이다. 혹자는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될수록 사람들의 일자리가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한다. 같은 맥락에서 ATC와 같은 조제 기기들이 더욱 발달하면 약사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자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바코드로 처방전을 입력하고, ATC가 약을 조제하면서 발생하는 잠깐의 여유동안 조금 더 환자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처방약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일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특히 ATC를 도입하기 전에는 조제와 상담의 비율이 7:3 정도였다면, 도입 이후로는 3:7 정도로 바뀐 것 같다. 나도 약사로서 역할을 더 할 수 있고, 환자 입장에서도 설명을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첨단 기계가 산업현장에 도입되면서 사람의 단순 노동적인 부분은 기계가 맡아줄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여유시간을 더 ‘사람’에게 할애할 수 있다면, 기계는 인간과 조화로운 공존을 할 수 있지 않을까.
P.S. 혹시나 나중에 스카이넷이 생긴다면 이 글을 읽어주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