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가는 길
새벽 1시 55분 비행기에 올라 비몽사몽간에 홍콩에 내린다. 1시간 앞으로 되돌아간 시간, 미명은 가시지 않는다. 경유시간 세 시간, 다음 비행기를 탈 때까지 꼼짝없는 노숙 신세다. 의자를 차지하고 잠깐 눈을 붙였나 싶은데 게이트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화장실에 다녀온다. 자다 깬 얼굴로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치앙마이로 가는 드래건에어에 오른다. 향신료가 섞인 누들 기내식이 이번 여행의 신호탄이다.
치앙마이 공항에 발을 내딛는다. 몇 시간 전 한국에서 맞던 일월의 삭풍은 사라지고 남국의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온다. 한국은 영하의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치앙마이의 아침은 벌써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온다. 입고 있던 패딩을 배낭에 구겨 넣고 공항 부스에서 택시를 예약한다.
치앙마이 공항 부스에서 예약한 택시는 어디로든 150밧, 가이드북에서 골라 두었던 숙소 앞으로 간다. 다행히 빈 방이 있다. 밤새 달려온 데다가 잠도 못 자고 짐을 풀었지만, 배가 고프다. 걸어서 나갈 수 있는 중심가, 빳 타페(Phatu Tha Phae) 앞으로 간다. 일단 바트(Baht)로 환전부터 하고서야 비로소 식사가 가능하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함께하는 동행이 있어 마음도 편하고 든든하다. 낯선 도시에 혼자 도착할 때의 걱정과 외로움이 덜어진다. 둘이 같이 먹는 음식은 또 얼마나 좋은지, 혼자 먹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찌는 듯한 치앙마이의 태양빛은 영하의 한국에서 온 나에겐 어색하리만큼 뜨겁다. 오후의 치앙마이에는 뜨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을 찾아 쉬는 사람들뿐이다. 간간히 오토바이와 뚝뚝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썽태우라는 빨간 트럭(?)이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한국과의 시차는 2시간밖에 나지 않는데 기온차가 현격하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더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은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겪어내느라 더욱 피곤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을 헤매는 일이 나는 왜 이리도 좋을까? 하릴없이 음악을 듣거나 더위를 피하는 느긋한 여행자들, 우연히 마주친 빨간 우체통, 새하얀 시트를 널어 말리는 세탁소의 뒷마당 풍경... 그렇게 기웃거리며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정수리가 뜨거워진다.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내리 세 시간을 잠에 빠진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니 잠이 꿀맛이다. 죽은 듯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어느덧 해는 지고 어둠만 자욱하다. 황금 같은 여행의 첫날, 낮잠을 너무 많이 잤나 보다 하는 자책에 벌떡 일어난다. 이번 여행은 태국이 아니라 "라오스"가 메인인 여행이지만 치앙마이는 나도 처음 아닌가?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고 할 일도 없으니 남민해민(Namminhaemin)이라는 지역으로 가보기로 한다.
낮에 갔던 타페문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니 여기가 식당이 더 많다. 어두워진 거리가 두렵지 않은 걸 보니 관광의 나라 태국이 맞다. 길을 가다 문득, 치앙마이에선 트래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트래블 에이전시에 찾아 들어간다. 사무실을 지키던 모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내일의 트레킹을 예약하고서야 비로소 여행지에서의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것 같다.
현지인들이 바글거리는 식당에 들어가 쌀죽과 딤섬을 주문한다. 값도 저렴하고 한 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다. 늦은 점심을 먹고 소화되기도 전에 잠들어버린 대가로 아직 포만감이 가시지 않은 게 유감이다. 그런데도 다 맛있다.
홍대 앞 같다는 님만해민(Nimmanhaemin)으로 방향을 정하고 걷지만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로를 따라 걷다 보니 묘하게 다른 곳에 와 있다. 여기는 빳 싸운덕(Phatu Saun Dok), 길을 지나쳐 왔다. 산책 삼아 시작한 걸음이라 방향을 다시 잡아 걷는다. 특정한 곳에 가야 한다는 목표보다 이런 걸음이 좋다. 밤이 깊어갈수록 더위가 꺾여서 걷기엔 좋은 밤이다.
님만해민에 도착한 시각이 너무 늦어서인지 밤의 열기가 사라지고 있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작은 가게나 갤러리들은 문을 닫고 바(Bar)도 조용해지는 중이다. 홍대 앞의 열기를 상상하고 온 터라 실망스럽지만, 열심히 걸어온 보답으로 문이 열린 가게에 들어가 술에 취해 흥청거리는 치앙마이 사람들 옆에서 태국 맥주인 싱하(Singha)를 마시는 것으로도 즐겁다.
돌아오는 길엔 툭툭을 잡아탄다. 기사는 한국인이냐 묻더니 대뜸 한국말로 "한국사람 돈 많아요." 한다. 기사 아저씨의 한국말이 귀여워서 어떻게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하느냐고 물으니 한국에서 4년 동안 일했다고 한다. 능숙한 한국어에 반해서 그의 툭툭을 타기로 한다. 기사는 생각보다 더 친절하다. 골목 안쪽의 작은 게스트하우스를 어렵게 찾아준다. 시간이 늦어져서 내심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는데 덕분에 안전하게 귀가한다.
몸이고 마음이고 새로운 여행의 리듬에 적응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번 여행은 태국 북부의 치앙마이에서 출발해서 라오스를 거쳐 방콕으로 가는 여행이지만, 라오스 여행이 중점인 데다가 전처럼 세세한 계획도 없다. 그때그때 여정을 결정해 갈 계획이라 그런지 여태까지의 여행과는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다.
한국을 떠나온 지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일상에서와 똑같은 하루일지언정, 그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 여행, 그것이 주는 눈부신 자유를 만끽할 일만 남았다. 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