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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지 Apr 24. 2020

만 19살, 유럽에서 살아남기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중학생일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한 Love&Peace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어떤 젊은 일본 남성이 아내와 함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담은 책. 그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때부터 나도 성인이 되고 난 후에 혼자서 어디론가 배낭여행을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1년 반, 21살의 3월에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고 같은 해인 2013년 7월 7일에 나는 드디어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안고 두 달간의 생애 첫 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게 된다.
 말이 여행일 뿐이지 사실은 유럽에서 살아남아 돌아오기나 다름 없었다. 낭만적인 여행이 될지 아니면 치열한 생존이 될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최소한 숙소라도 미리 예약은 해놓고 가야 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부모님의 말씀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마지못해 처음 도착하는 프랑크푸르트의 호스텔 2박만, 그것도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예약하고 떠났으니. 왕복 비행기표, 정해진 기간 내에 횟수 제한 없이 기차를 탈 수 있는 유레일 패스만 있어도 사실 충분할 것 같았다. 오히려 주변에서는 내 걱정해주느라 바쁜데 정작 나 혼자만 태연했고 친구들은 나보고 간이 아주 배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고 해서 ‘간툭튀’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떠나는 날 당일까지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그토록 바라 왔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설레고 긴장돼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 덤덤했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엄마 아빠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에도 웃으면서 자신 있게 잘 다녀오겠다 했지만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에 엄마로부터 받은 ‘기특하고 장하다 내 딸 사랑한다.’라고 적힌 메세지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겁이 없어서 정말 덤덤했다기보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는 두려움이 속 안에 감춰져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그동안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 그대로 두 달 후에 무사히 잘 돌아가야만 했다.
 집과 학교, 그리고 내가 아는 장소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고 낯선 장소에서 내가 모르는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던 두 달이라는 시간을 한두 장 분량의 글로 압축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끝없이 펼쳐지곤 했다. 미리 짜인 계획이나 일정이 있었더라면 절대 겪지 못할 일들과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떠나기 전에는 단순히 계획 없이 유동적으로, 그리고 내키는 대로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는데 오히려 그렇게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에 만나고 함께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이 내가 그때의  시간들 속에서 발견한 가장 큰 보물이었다.

 믿을 수 없게도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호스텔에 묵은 것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고 나서 이틀이 전부였다. 정처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였던 게 전부였는데 마치 신이 나를 돕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금전적이거나 부적절한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정말 진심 어린 마음이 있는 그대로 느껴지는 순수한 호의들이 지금도 한없이 감사할 뿐. 만 19살의 어린 나이에 먼 곳에서 혼자 온 나를 여기저기에서 동생처럼, 친구처럼, 가족처럼 그렇게 알뜰살뜰 보살펴주고 길을 밝혀주던 고마운 인연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다가, 길을 걷고 있다가, 광장 벤치에 앉아서 버스킹을 구경하다가, 기차역에서 지도를 보고 있다가, 화장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닷가에서 노을을 구경하다가 등등 그렇게 소소하고 소박한 순간들에 내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준 덕분에 대화를 나누게 된 사람들이 금세 내 친구가 되었고 평생의 은인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시작부터 여행이 아니라, 각 나라의 현지인들과 함께 먹고자며 진짜 현지 일상을 깊숙이 들여다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영화 같은 일들이 나에게 매일같이 벌어졌다.

 초반에는 내적 갈등도 없지 않았다. ‘여행을 하러 왔으니 남들처럼 최대한 유명한 곳을 눈과 사진에 많이 담아가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언제 또 이렇게 유럽여행을 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이렇게 평범한 일상만을 안고 돌아가면 나중에 후회되지는 않을까’.
 여행 때 필수로 남기는 괜찮은 인생샷이나 멋진 풍경 사진 한 장 제대로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 속에 선명해지는 것은 유명한 장소나 랜드마크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눈 추억들이다.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일상들이야말로 사실은 전혀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께 요리해 밥을 먹고, 함께 밤하늘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고, 함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함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함께 이웃집에 놀러 가서 커피 마시며 수다를 떨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함께 바닷가에 앉아 일출과 노을을 보고. 우연히 만났던 그 소중한 인연들과 평범한 듯하면서도 특별했던 일상들을 함께 공유했고,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순간순간들을 오래도록 같이 이야기꽃 나누며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값진 경험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너무나도 잘 안다.

 행복의 어원은 운명, 행운, 우연과 관련 있다고 한다. 내가 ‘우연’하게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이 함께 따라주었기 때문이고 어쩌면 그것이 내 ‘운명’의 한 부분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정말이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모든 필연적인 우연의 결과로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과 진실되게 마주할 수 있었고, 이후로 내 인생의 가치관도 행복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나의 첫 도전, 그리고 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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