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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Jul 13. 2023

[청춘일기] 비 오는 날 취객

2008년 7월 25일의 봉천동 버스정류장


비오는 거리

비 오는 날 버스를 타고 여의도에서 출발했다

비로 인해 도로가 막혀서 헤맸다.

비는 줄줄 내리고, 버스는 안 가고, 일정은 늦었는데, 마음이 바빴다.


사람들의 신경도 날카로워졌는지 여기저기 소리를 높였다.

괜스레 우울한 날...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있다가 막차를 놓쳤다.

결국 평소 타던 버스가 아닌 다른 노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버스 안 뉴스에서는 화재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데...

밖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화재 날 땐 뭐 하고 이제 와서 내리는지...'

고시원 화재 사진

가난한 형제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살려고 올라와 일하던 50대 어머니가 조그만 고시원 방 안에서 화마와 함께 사라졌다는 데...

갑자기 또 울컥..

세상 왜 이렇게 돌아가나 한숨을 쉬다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나는 또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하나...' 걱정이 됐다.



버스 안에 술 취한 승객 남자가 꾸부정하게 앉아있더니 결국은 덜컹대는 버스의 흔들림에 바닥으로 고 구라 졌다. 놀랜 사람들이 달려와서 취한 승객을 다시 자리에 앉혀 놓았다.


갑자기 버스 아저씨가 승객들을 향해 사정을 한다.

"이 사람이 봉천 사거리에서 내려야 하는데... 아직도 안 내리고 있어요. 이러다 종점까지 가면 안 되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버스 기사님에게 내버려 두라고 난리를 친다.


그러다가 내가 내릴 정거장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 아저씨가 먼저 내리는 어떤 아가씨에게 부탁을 한다.

"미안한 데 이 사람 여기서 같이 내리면 안 되겠냐고...."

갑자스런 요구에 당황한 듯 우물쭈물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다.


"기사님, 그럼 여기에 내려주세요. 제가 경찰서에 연락해 볼게요."

기사 아저씨가 반색하며 고맙다며 인사를 한다. 승객들과 기사 아저씨가 술 취한 남자를 부축해 버스 정류장에 내려둔다.


비 오는 버스 정류장에 술 취한 남자와 함께 내렸다.

신고 전화를 하기 위해 전화기를 켠다.

119는 아닌데, 112로 해야 하나? 혼자 망설이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안내방송을 듣고 있으니

옆에 있던 청년이 말을 건다.

"저 아래 내려가면 파출소가 있거든요. 제가 내려가서 신고할게요."

함께 내린 청년이 가지 않고, 버스정류장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핸드폰을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렸다.

 청년은 떠나고, 술 취한 남자와 나는 6차선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 남았다.

버스 운행시간이 지나서일까? 도로에 차도 서서히 줄었다.

도대체 얼마나 먹은 걸까? 남자의 나이는 회사 신입사원쯤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양복까지 말짱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잠꼬대도 했다.

'저 사람 내일 아침에 일어나 엄청 후회하겠고만'

잠시 생각하는 사이, 남자가 버스 정류장 바닥으로 '쿵'하고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서 괜찮냐고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술김이라 멀쩡해도 내일 아침이면 엄청 아프겠다.'


밤은 늦었는데 출동한다는 경찰차는 올 기미가 안 보였다.

혼자 두고 가기엔 세상이 무섭고, 깨우기엔 정체 모를 취객이 무서웠다.

한 참을 서성이고 있으니 아까 갔던 신고하러 갔던 청년이 다시 돌아왔다.

경찰서에서 차를 보내겠다고 했단다. 경찰차가 오기 전까지 자신이 지키고 있을 테니 먼저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래, 나는 내일 할 일이 많지. 얼른 가서 잠을 자 둬야 하는데... 이 정도면 내 도리는 한 걸 거야.'


나는 청년에게 남자를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청년은 진정 믿을만한 사람인가?'

분명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나쁜 사람이라고 쓰여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 근처에 파출소가 있다는 걸 알정도라면 동네주민일 것이다.

'설마 지갑만 털어가진 않겠지?'


혼자 생각에 생각을 하다가 집에 돌아가 언니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그 사람 얼굴 기억나?"

"아니, 모자를 썼다는 것만 기억나는데..."


이불속에 누워 혼자 또 상상에 빠진다

'내일 아침 버스기사 아저씨와 함께 경찰서에서 범인의 '몽타주'를 설명하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워낙 세상이 흉흉하니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다.

술을 많이 먹어 길가에 널브러진 그 남자 봉천동 어느 파출소에서 정신이 들면 머리가 좀 아플 것 같다.


다행히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경찰차가 근처에 돌아다니거나 범죄목격자를 찾는 전단지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그제야 선량한 청년을(?) 혹시 모를 범죄자로 의심한 거에 미안함으로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술에 취해 버스에서 넘어지고, 버스정류장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어도 그래도 경찰서를 통해 집에 무사히 돌아갔을 생각이 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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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흉한 세상에 조금은 겁이 없었던 20대의 어느 날이었다.

막차가 끊긴 새벽에 술 취한 남자를 겁도 없이 혼자 맡아서 경찰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지금이나 그때나 조금 무모했던 것 같다.

다만, 술에 취한 분이 사회 초년생쯤 보이고, 거의 인사불성(?)에 가까웠기에 그랬던 것 같다.

당시는 겨울이 아니라 벤치에서 잠들었다고 죽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겠지만, 아침엔 출근을 위해 말끔하게 정장을 입고 출근했을텐데... 밤늦게 술이 떡이 되어 벤치에 버려진 모습이 좀 안쓰러웠던 것 같다.

 '뭐가 이 사람을 이렇게 술에 취하게 만든 걸까? 사람이? 아니면 사회가?'

MBTI 최고의 오지라퍼 INFP 답게 혼자 '사회 초년생의 힘든 사회생활'을 혼자 상상하며... 무엇보다 힘들게 번 그 사람의 주머니(지갑)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다만 아가씨에서 엄마가 된 지금은 내 딸이 나와 똑같이 하겠다고 한다면 말리고 싶다. 나는 무모하게 살았지만 내 아이들은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인 것 같다.


 마침 글을 올리는 날인 오늘도 비가 내린다.

술에 굴복해 정신이 놔버렸어도 모두 비 맞지 말고, 무사히 두 발로 집으로 귀가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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