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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Aug 31. 2023

[부부의 대화] "X차가 된 거 같아"

우린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거라고...

"여보 내가 똥차가 된 거 같아."

"똥차?"

 남편은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더 이상 질문할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이 있고, 끊겨서는 안 된다.

 남편의 시선을 피해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내 전 남자친구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 똥차를 피했잖아."

 "네가 똥차라는 거야?"

 "응, 결혼 전에는 분명 똥차까지는 아니었는데, 생긴 것도 배운 것도, 직업도, 다 나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똥차가 돼버린 걸까? 우린 신랑 벤츠 좋아하는데, 내가 똥차가 될 줄이야."


 농담을 가장한 진담이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을 순 없고, 그때 가지지 못한 다른 것을 얻었을 수 있다. 지금이 분명 더 행복하고 돈도 더 많고, 사랑하는 남편에 이쁜이 딸들까지 그때에 비하면 분에 넘치는 행복이 있었다. 단지 그때의 반짝반짝 빛나던 뭔가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냥 남편에게 미안했다. 

 여자친구로서는 사랑스러울 수 있던 모든 조건이 아내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예쁘지도 않고, 뚱뚱하기까지 하고, 살림도 지지리 못하고, 요리 실력도 거의 안 늘었고, 애들만 겨우 키우는 수준이잖아. 아, 맞다. 그래. 나도 장점이 있어. 여보, 나 웃기잖아. 나 웃기지? 나처럼 웃긴 마누라가 어딨어? 내가 제일 웃기지? 아싸~"

 감상에 빠져 주저거리다가 신나서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남편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안방으로 기어코 들어가 침대 이불속에 숨어버렸다.

 "뭐? 이불속으로 들어오라고? 벌써? 아직 밤도 아닌데. 응큼하긴..."

 남편이 똘똘 감싸고 있던 이불을 들춰내고 그 품으로 속 들어가 오두방정을 떨어본다.

 "귀엽다고 해! 귀엽다고 해! 웃기다고 해! 웃기다고 해! 안 그러면 괴롭힐 거야"

 

 남편은 긴 팔을 뻗어, 잔디처럼 빽빽하게 쏫아난 머리카락을 만졌다.

 "머리 많이 길었네."

 "응. 이제 고슴도치 공격이 안 되네."


 20살의 나보다 40살의 나는 생긴 건 좀 못나도, 성격은 좋아졌다고 위로해 본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나고, 아이도 키웠다. 


 20살에 나는 마스카라까지 풀화장에 높은 구두, 항상 옷차림도 신경 썼고, 머리스타일도 항상 관리했었다. 40살의 나는 생얼에 마스크를 풀장착하고 헐렁한 운동화에 배가 편한 헐렁한 옷만 입는다. 머리는 빡빡머리니 어디 비교가 되겠는가.

 다만, 이제 나는 자존심 부리며, 나만의 성에 갇혀 있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하고, 좋으면 좋은 만큼 방방 뜬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사달라고 조를 줄도 알고,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다고 솔직히 말할 줄도 안다. 속으로 구시렁대기보다 조잘조잘 하소연을 늘어놓을 줄 알게 되었다. 하기 싫은 일도 해야 참고해야 하는 법을 알았고, 싫은 사람과 멀어지는 방법도 알고 있다. 화나면 화나는 감정에 대해 말할 줄 알고, 사랑받는 법도 가족 간의 사랑도 배웠다. 겉만 예뻤던 예전의 모습보다 속은 알차졌지만 겉모습은 참 그렇다. 같은 나이의 친구들과 비교해도 참 관리가 허술했다는 게 느껴진다.


 벤츠는 아니더라도 똥차는 되지 말아야지. 다이어트를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결혼하고 예뻤던 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는 남편에게 고마워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그런 멋진 남자(?)의 숨겨진 단점도 알게 되었다.


 우연히 누군가의 고민 상담하던 글을 읽었다.

 30살이 되니 사람 만나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것. 더 생각하는 게 많아지고, 몇 번 대화만으로도 자기와 맞을지 안 맞을지도 안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본다. 

 '나와 맞는 사람을 찾기보다, 내가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면 그 범위가 훨씬 넓어질 거라고...'

나는 이상형이 있었다. 눈이 아주 높은 편은 아니었지만 골고루 꼼꼼히 보는 성격이었다. 물론 이상형이 그렇다고 모두 그런 사람과 연애를 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상형은 말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이니까.

 

 남편은 내 이상형이다. 나는 이상형과 결혼했다. 얼굴이 하얀 피부와 여리여리한 몸매, 내가 키가 작으니 2세를 위해 평균 키, 똑똑하지만 자만심은 없는 현명한 사람, 소년처럼 순수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가족에게 어른들에게도 예의 있는 사람. 자기 할 일은 스스로 잘 해내는 사람. 나무 그늘처럼 언제든 편히 쉴 수 있게 해주는 배려 깊은 사람이었다. 이 정도의 장점을 가진 남자가 나를 사랑해 준다니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내가 짜놓은 덫에 걸린 남편은 연애 1년 만에 결혼을 해버렸다. 3년 간 알콩달콩 연애를 생각했던 남편은 내 계획에 의해 결혼 1년 만에 아빠가 되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사라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건 다 아이와 남편에게 양보했다. 반짝이고 예쁜 그들을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이의 머리핀 하나를 바꿔줘야 했다. 반짝 빛나는 아이와 멋진 남편은 보는 걸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아이가 하나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이가 둘이 되는 순간, 나의 자존감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의 책임이었다. 집이 엉망인 것도 게으른 엄마의 문제였다. 아이를 위해서 건강한 음식을 해야 했고, 아이를 위해 청결에 신경 써야 했고, 아이와의 추억을 위해 시간을 써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해외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닐 때 나는 아이를 등에 메고 싱크대에서 밥을 먹었다. 나 혼자도 버겁던 삶이었는데 두 아이의 육아는 더 힘든 일이었다. 우울증이 몰래 쌓였지만 어디에도 풀어낼 수 없었다. 육아로 시간은 바빴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의 엄마인지, 식모인지, 유모인지 모르게 살았던 것 같다.

 

 '다시는 예뻤던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거 같아.'

 거울을 보고 슬퍼했던 거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이가 겨우 32살이었다. 32살에 폭삭 늙어버린 게 너무 억울하고 슬펐다.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걸까? 남들보다 빨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그만큼 빨리 늙어버렸다. 


 둘째 아이를 낳고 다이어트를 했다. 몸에 붙어있던 오랜 지방덩어리가 몸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잃어버렸던 얼굴이 보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얼굴이 살 속에 숨어 남아있었다. 한 1~2년은 다시 즐겁게 살았던 것 같다. 아가씨 때만큼은 아니지만 화장품도 샀다. 화장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때 느꼈던 것 같다. 우울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는 게 맞다고, 남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전히 거울엔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있지만, 요즘은 그래도 그 여자가 참 좋아 보인다. 아무래도 봄이라서 그런가 보다. 봄은 꽃도 피고, 못생긴 여자의 마음도 설레게 만든다. 


 스스로 똥차가 되었다고 우울해했지만, 사실은 그저 세월이 지난 거다. 아무리 신형 고급차를 산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유행은 바뀌고 촌스러운 디자인이 되어버린다. 비록 그 차의 외관이 미워졌을지언정, 10년 간 잘 타고 잘 달려왔으면 됐다. 스스로 너무 몰아세우지 말기로 했다.

 똥차가 아니라 중고 중형차라도 되기 위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우린 늙어가는 게 아니라 익어간다는 노랫가사가 오늘따라 귓가를 맴도는 것 같다.

앞으로 더 예뻐질 딸들을 보면서

나도 한 때는 예뻤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며

나도 한 번은 예쁘게 살아봤으면 됐다고!

앞으로 더 예뻐질 딸들을 보며

얼굴 대신 마음을 가꿔야겠다.

 


 

똥차도 벤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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