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두씨앗 Sep 07. 2023

무엇이 나를 화나게 만들었을까?

'가사노동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가볍게 아침을 먹고 모닝커피를 빙자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도서관 가실 일 없으신가요? 제 책 반납과 대출을 부탁드려도 될지 해서요"


잠시 고민이 됐다. 도서관에 가야 할 일이 있기는 했지만, 운동도 가기 싫어 뭉그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언니의 집과 우리 집은 5분 남짓 거리다. 대단지 아파트로 따지면 같은 아파트라 할 정도로 딱 붙어있는 옆 아파트였다.

 워킹맘인 언니를 대신에 가끔 조카들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학원비 결제를 대신해 주는 일들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책 반납이라....


"반납해야 하는 책은 있습니다만..."

 

 도서관에는 가야 하는데 갈지 말지 정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는 가긴 가야 하는데 내 도서도 반납하기 귀찮으니 가는지 말지는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 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요."


 기분이 묘했다. 책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정주부로 있는 내가 일하러 나간 언니대신 도서관 대출과 반납의 심부름을 해줘야 하는가?


 기분이 조금 상했다는 게 맞았을 거였다.

"혹시 도서관 갈 일 있니? 나 대출해 놓은 책이 있는데, 마감일이 내일까지인데, 내가 회사 때문에 대출을 못할 거 같은데 낮에 시간 될 때 혹시 받아다 줄 수 있을까?"

 라고 얘기했어도 하기는 싫었을 거다. 그래도 기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참고해 줬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서관 대출과 반납은 촉각을 다투는 급한 일은 아니었다. 반납은 무인반납기도 있었고, 대출은 이틀 뒤 주말에 할 수도 있는데, 굳이 오늘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또 내면 아이가 튀어나왔다. '이거 뭔가 불공평한 기분인데?'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불만사항을 살짝 털어놨다.

"언니가 나한테 부탁을 했는데, 기분이 좀 그래. 내가 집에 있다고 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 기분이야. 내가 집에 있어도 내 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가는 길이라지만 도서관 대출과 반납은 꼭 내가 해줘야 할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낮에 회사 가고 그러니깐 가까운 데 사는 너한테 부탁했나 봐. 니 입장에선 좀 서운할 순 있지. 정 서운하면 차라리 돈을 받아. 돈을 받고 일하면 좀 나아."


 솔직히 내 성격으로는 하기 싫은 건 돈을 줘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렇지만 엄마의 말이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럼 얼마를 받을까?"

 "그냥 심부름해 주고 커피 한 잔 얻어먹으면 되지."


"5000원입니다."


"깎아주세요. 너무 비싸요."


"인건비가 올랐어요. 나 헬스 다녀야 해서 바빠요."


"도서관 갔다 오면 살도 빠지고 얼마나 좋아요"


"그럼 본인이 하세요. 깎아도 3000원은 받아야 해요."


"괜찮아요. 책 좀 안 보면 되죠. 그럼 이만...(쑝~)"


 마음에 걸려있던 무거운 짐이 훅 털리는 기분이었다.

5000원을 부른 건 좀 세게 부른 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가기 싫어서 그랬던 거 같다.

언니의 집까지는 집에서 5분도 안 걸리고, 심지어 내가 가려는 도서관 바로 앞이다.

하지만 나는 헬스장을 갔다가 언니집에 올라가서 도서관카드를 챙기고, 반납도서를 챙겨서 다시 도서관에 갔다가 내 책과 아이들 책, 그리고 언니의 책을 빌려서 다시 언니 집에 책을 가져다주고 집으로 오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별거 아닌 데 내가 좀 예민했던가? 언니의 성격상 곧 주말이라 대출할 수 있고, 반납이 급한 것도 아닌데 평일 낮에 부탁하는 거라면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내가 대신해줘야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급했으면 5000원이든 10000원이든 부탁을 했을 거니까.


 저녁 시간, 남편은 유튜브에서 봤다며 사람의 연봉으로 가격을 매길 수가 있다는 얘길 했다.

궁금해졌다. 나는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나의 노동력은 얼마로 환산될까?


"내 연봉이 일 년에 ***이니까 그걸 환산하면 나는 **억 정도 되는 거야. 그러니깐 내가 없더라도 **억이 있으면 내가 버는 수입을 대신할 수 있는 거지."

"여보, 여보 나는 나는 얼마야? 그렇게 계산하면 나는 얼만데?"


 중간에 끊고 들어오는 게 조금 거북했을까?

"아니 내가 얘기하는 건 연봉으로 계산하는 거야. 수입을 기준으로 환산하는 거지."

"그러니까, 나는 얼마냐고.."


 낮에 일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남편에게 조르듯이 재차 물어봤다.

남편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슬며시 웃으며 가격을 얘기했다.

"빵원이지. 너 지금 수입이 없잖아."

"나도 알아. 그래도 빵원이라고 말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내가 집에서 하는 일이 있잖아 가정주부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의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그런 건 쳐주지도 않고 대놓고 빵원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니야? 당장 내가 없으면 아이들 등하원 도우미만 불러도 80만 원이야. 밥하고 빨래하고 못해도 120은 줘야지."


 별것도 아닌 일에 또 혼자 열을 냈다. 남편은 잠시 무안하듯 보다가 밥을 마저 먹었다.


열심히 살아도 경력으로 쳐주지도 않고, 보수도 제대로 주지도 않으면서 할 일만 많다.

 무가치하다고 느껴지는 게 요즘 싫다. 아프고 나서 그런 마음이 더 심해진 거 같다. 이 전보다 못하는 게 많아지고, 더 하기 힘들어지니까 더 의기소침해지는 것 같다. 아이들은 이전보다 많이 컸지만 아직 마음을 놓고 나가기에는 신경 쓰이는 부분들이 많다.


 '엄마의 노동력은 얼마일까?'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하고 공부도 가르치고, 병원도 데리고 가고, 필요한 학용품을 챙겨주고, 학원도 챙겨야 하는데... 0원짜리라니 기운이 빠진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두 권 빌려왔다. 아프기 전에 계획했던 글이나 써야겠다. 쓰다가 멈춘 글만 수십 개 머릿속에 기획한 동화만 몇 개지만 제대로 할 시간이 없다.

 

 요즘 계속 작은 일에 불쑥불쑥 화가 난다.

그런데 가끔 궁금하다. 화가 나는 게 모두 내 잘못일까? 내가 잘못한 걸까? 나만 바꾸면 괜찮은 걸까?

화가 날 수도 있다.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게 다르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점에서 화를 낼 수도 있다.


릴랙스 하고 싶은 가을날에 여름의 마지막 불꽃처럼 화가 타오른다.


---------------------------------------

퇴근 후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가지고 있는 도서가 예약도서라 무인반납기에서 반납을 할 수 없어 부탁을 했으며, 대출 예약이 평일 중에 찾아가야 하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라 내가 도서관에 갈 일이 있으면 부탁한 거라고.. 굳이 급한 것도 아니고, 굳이 나한테 꼭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던 거 같다고 말이다.

 전화를 받고 마음이 릴랙스 됐다. 그래, 거절해도 되는 부탁이 맞았구나. 부탁을 꼭 다 들어줄 필요는 없는데 부탁을 들으면 나는 늘 부담스럽게 그 부탁을 다 해주려고 한다. 물론 대부분 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먼저 해주겠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간혹 하기 싫은 것들은 나도 피하고 싶다. 도서관에 갈 거였으면서 왜 그 심부름이 그렇게 하기 싫었던 걸까.

 그건 아마 내 내면아이가 뭔가 꽁했던 것 같다.


저녁시간, 굳이 굳이 가정주부의 연봉을 검색해 봤다.

 

 아무것도 안 하고 노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엄청 쉬워서 누워서 떡 먹듯이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가정주부도 골치 아프고 스트레스받는 일도 많고, 육체적으로 힘들 때도 많다. 아마 가장 힘든 건 사회적 시선이다.

 가정주부 = 노는 여자라는 인식말이다.

"집에 있을 때, 시간 날 때, 낮에 잠깐, "

 겉보기엔 한가한 시간일지라도 주부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의 계획이 있고 일과가 있다. 그런데 종종 일을 하지 않고 집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부의 시간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밖에 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꿈과 일을 포기하고, 매일 반복되고 끝도 없는 뫼비우스띠 같은 집안에서 아이를 기르고, 가사를 담당하는 것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가정주부로 산다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쉽고 편하게 살려고 선택한 길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빠 보이지 않는다고 한가한 것은 아니다.

 쉽게 보지 말자

 당연하게 생각 말자

 존중해 주고 이해해 주자

엄마도, 주부도 사람이다.


ps. 5000원은 왕복 택배비다. 택배비 때문에 반품을 포기한 적도 있다. 배달비 때문에 외식을 포기하기도 한다. ’동네 떡볶이 배달비도 3000~5000원인데... ‘ 심부름하기 싫어서 왕복택배비 부른 건 (안)비밀~

 



 

작가의 이전글 [부부의 대화] "X차가 된 거 같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