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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스포 있음

by 연두씨앗 김세정

"하나만 읽어도 되지만, 읽다 보면 끝까지 다 읽게 될 거예요. 다 재미있거든요."

책을 접하게 된 건 단순히 '추천'이었다. 잘 써진 소설을 배워보기 위해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어보라는 과제가 첫 시작이었다.

작가에게 나이가 중요한 지는 모르겠다. 나보다는 2살 어리지만, 소설가로서 사회로써는 선배가 되어버린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종이책의 느낌도 좋았다.


이 책에는 총 8편의 단편이 모여있었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주인공의 매력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그중 특히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잘 살겠습니다> <일의 기쁨과 슬픔>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3편이었다.



<잘 살겠습니다> 7~34P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돌리던 '나'에게 회사 입사 동기이지만 좀처럼 이해가 어려운 빛나언니가 연락해 오면서 시작한다. 오래전 내가 청첩장을 돌리면서 했던 생각들, 그쯤에 겪었던 고민들, 결혼을 앞둔 여성이라면 흔히 하는 고민들이었고, 조금은 냉정하고 철저한 '나'의 모습과 대조적인 '빛나언니'는 어찌 보면 답답하고 불편한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고 나서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 책을 읽은 언니가 예전에 내게 전화로 빛나 언니 이야기를 해줬던 게 생각이 났다. 언니는 빛나언니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 주변의 인물 중에 빛나언니와 비슷한 인물을 찾아보기도 했고, 혹시나 그 빛나언니 같은 사람이 자신이 아닌지도 걱정했었다. 나 역시 빛나언니 같은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었기에 당혹스러움과 애매한 그 상황에 매번 어리둥절했던 거 같다. 분명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악의도 없다. 그렇지만 결론 뭔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만나고 나면 기분이 묘하게 답답해지는 느낌이랄까?

어디에나 있을 듯한 빛나언니의 생생한 모습을 보며, 이 작가도 빛나언니 때문에 골치 좀 아팠구나 하고 혼자 상상을 해봤다. 세상의 많은 빛나언니들은 본인이 빛나언니라는 것을 모른다. 왜냐면 아무도 그들에게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이 생생하다는 느낌이 어떤 느낌인 지 알 수 있었다. 왠지 깐깐하고 예의를 따지는 '나'는 그저 빛나 언니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빛나언니는 주인공 '나'를 이리 놨다 저리 놨다 흔들어댄다. 머리가 찌근거린다. 지금은 내 곁을 떠나 '빛나언니'가 돌아와 인사하는 것처럼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의 기쁨과 슬픔> 35~64

가볍게 읽은 잘 살겠습니다와 달리 <일의 기쁨과 슬픔>은 시작이 어려웠다. 여느 회사원들이랑 맞아 맞아 맞장구칠만한 소재들이 곳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과 거리가 너무 멀었던 나에게는 외계어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요즘 직장이 이런가? 이 회사만 이런가? 회사 이야기라서 내가 집중을 못하나? 오며 가며 읽기엔 집중이 안 되는 느낌이었고, 제대로 읽기 시작한 것은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야 집중이 되었다. 처음엔 따분한 직장이야기가 실감 나서 나도 따분하고, 정말 작가는 이 일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숙제를 위한 독서가 진행되었고, 문제의 '거북이알'이 등장하면서였다. 골칫거리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베스트 손님인 '거북이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안나가 회사를 떠나면서 내 집중도도 높아졌다. 나도 거북이알이 궁금했다. 그녀의 존재가 나오면서 오래 묵은 먼지로 뿌연 유리창을 클린액으로 칙칙 뿌려 닦는 듯한 개운함을 선사했다. 쿨하고도 똑똑한 거북이알을 만나는 순간 나도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회사의 부당함에도 저리 똑똑하고 당차고 현명하게 맞서는 그녀의 똑똑함이 좋았다. 그녀와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판교의 모습은 소설의 초반과 달리 정겨웠다. 낯선 판교의 스마트한 회사원들의 딱딱한 자기 자랑이 아닌, 그 안에서 각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그냥 사람들의 공간이 된 기분이었다.

직장 생활 경험이 적거나 집에 있던 전업주부인 나의 경우 초반에 공감되는 부분이 적었던 것과 달리 워킹맘으로 직장 생활하는 언니의 경우는 앞부분의 살아있는 모습들이 모두 실감 나고 생생했다고 했다. 같은 책을 보아도 독자의 경험과 생각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65~99

빛나언니와 거북이알을 만난 나는 장류진 작가에게 호감이 생겼다. 그래서 후쿠오카 가이드도 읽기 시작했다. 앞부분의 여성화자와 달리 후쿠오카 가이드의 화자는 남성이었다. 그것도 보기 드문 훌륭한 스펙과 괜찮은 외모를 지닌(?) 지훈이는 과거 호감을 가졌으나 결혼으로 인해 포기했던 회사 여직원 '지유'와 오랜만에 연락하게 되고 그녀의 초대로 후쿠오카로 떠난다. 지난해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었기에 왠지 뭔가 더 친근감이 들었다. 이 괜찮은 남자 지훈(?)은 자신이 꽤 매너 있고 괜찮은 남자이기 때문에 '지유'씨에게 선도 지키고 매너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공감을 못했던 것일까? 남자들은 실제로 이런 생각은 하는 걸까? 어찌 보면 결혼에 실패한 여자 '지유'씨는 예전에 지훈이 호감을 가졌던 완벽한 이상형(?)이면서도 그때보다 조건은 더 나빠진 상황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지훈 씨가 남편과 사별한 지유씨에게 세상의 야박한 잣대대신 젠틀한 접근을 하는 듯 하지만 어딘가 속은 뻔한 이질적인 모습. 그렇게 주인공에 이입도 못하고 어중간하게 따라가다가 지유씨가 훌쩍 떠나고 지훈씨는 속에다 꾹꾹 담아놨던 한 마디를 내뱉는다. '그렇지' 통쾌하다. 소설 초반부터 묘한 불편감은 어쩌면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었다. 불편한 지훈씨의 자기 자랑을 듣으며 굳이 궁금하지 않은 데이트를 쫓아다니는 느낌이랄까? 어찌 됐든 알쏭달쏭 헷갈리던 나와 달리 똑똑한 '지유'씨는 그런 지훈 씨를 쿨하게 보내버렸다. 마지막까지 이기적이고 우월감을 가진 지훈의 행동은 묘한 통쾌함을 주었다.


<다소 낮음>

인디가수 장우는 우연히 만든 '냉장고송'으로 대 히트를 친다. 그 뒤 유명엔터테인먼트사에서 연락이 오고 그도 탄탄대로 유명인사로 잘 나가나 했으나, 아티스트의 신념을 지닌 장우에게는 엔터시장과 타협하지 못한다. 그녀의 곁에서 지지하던 여자친구 유미는 그런 장우에 실망하고, 장우는 동물병원에서 데려온 강아지와 현실로 돌아온다. 아픈 강아지를 위해 수술비를 마련하려 다시 엔터테인먼트를 찾아가지만, 이미 시장의 흐름은 바뀐 뒤였고, 그는 강아지도 유미도 잃고, 윙윙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냉장고가 있는 원룸에 혼자 남는다. 유튜브 세상에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기회는 날아가버리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준 소설 같다.



<도움의 손길>

주인공은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딩크족 여성이다. 살림과 회사일이 버거운 그녀는 전문 '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일, 그리고 그 돈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통해, 정해지지 않은 모호한 갑과 을의 관계가 느껴졌다. 예전이라면 돈을 주는 고용인이 '갑'이고 일을 하는 사람이 '을'이었다면 요즘은 그렇지 않다. 일 잘하는 사람은 웃돈을 주고라도 서로 데려가는 상황이라 돈을 주면서도 이상한 눈치(?)를 보는 현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살림과 청소에 영 소질이 없는 가정주부인 나도 '청소도우미'에 대해 늘 고민이었다. 돈으로 남의 노동력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장점이었지만, 누군지 모르는 남에게 내 공간을 보여주고 관리하게끔 하는 것이 나는 영 불편했다. 그리고 내 삶의 첫 도우미였던 '산모도우미' 아줌마의 경우에도 주인공과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에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만족을 하면 '기대'를 하게 되고 '기대감'이 있다면 '실망'감도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게 일을 잘하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그녀의 배신감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은 흐려지고 선을 지키고 싶은 고용주인 '나'의 입장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지막 선까지 먼저 쿨하게 넘어서는 도우미이모님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선이라는 게 정확하게 정해진 게 아니라 더욱 애매모호하다. 돈을 주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 그럼에도 도움을 꼭 받을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괴로워진다.



<백 한 번째 이력서와 첫 번째 출근길>

계약직을 떠돌다가 처음으로 정규직으로 출근한 여자. 한여름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2000원. 얼음을 넣은 아이스커피는 2500원이 추가된다는 엄청난 논리를 아침부터 때려 맞고, 늦지 않게 출근하기 위해 택시를 탄다.(택시비 8000원) 회사 직원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잠시 걱정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이태리 남자는 너무 멋있다. 감상평 한 줄 : 이 여자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세상 쿨한 여자다


<새벽의 방문자들>

오피스텔에 새로 이사한 여자는 새벽에 나타나는 의문의 남자들을 보고 겁에 질린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 세 번 이어지는 건 뭔가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알고, 여자는 남자들이 자신의 집과 다른 곳(성매매업소)을 착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날마다 오는 두려운 방문자의 존재들이 그저 성매매를 하기 위해 찾는 남자라고 생각하자 두려움은 오히려 우월감(내가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다)으로 변한다. 여자는 결국 남자들이 매번 헷갈리는 건너편 같은 호수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 살고 있는 여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


<탐페레 공항>

취업 전 해외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날, 주인공은 우연히 들린 필린드에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나이 지긋한 노인과 만나 공항 근처를 돌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에게 핀란드를 소개해주고 싶은 남자는 여자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그녀에게 주소를 받는다. 워킹홀리데이가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여자는 핀란드에서 만난 남자에게 받은 편지를 보고 감격에 빠지지만, 답장을 하기엔 일상이 너무 바쁘다. 취업이 급한 여자는 어느덧 남자의 답장을 잊고 일상을 지내다가 우연히 남자의 편지를 발견하고, 그 편지에 있는 전화번호를 발견한다. 벌써 5~6년 전의 일이고 나이도 지긋했던 그가 없을지도 몰랐지만, 주인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고 그가 여전히 건강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늦었지만 그녀는 답장을 쓰기 위해 펜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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