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도경 Mar 16. 2018

뒷말와 구조요청

뒷말과 구조요청은 자존심과 용기의 차이다.

그대의 적은 손에 칼을 든 채
그대와 맞선 사람이 아니라
등 뒤에 칼을 숨기고
그대의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 파울료 코엘료, <아크라 문서>


제삼자는 쉽게 말할 수 있지요.


 사회란 올곧은 것이 언제나 대접받는 곳은 아니다. 여기서 올곧다는 건 앞과 뒤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앞에서 한 말이 뒤에서 달라지지 않는 것.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앞에선 좋게 말하지만, 뒤에서는 같은 일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음... 조금만 다르게 얘기해보자. '뒤에서는 나쁘게 말하더라도 앞에서는 좋게 말하는 사람' 상황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이런 사람이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흔히 뒷말이라고 얘기를 한다. 그냥 뒷말이라고 하기엔 상황이 껄끄럽긴 하다. 평소에도 딱히 좋은 관계는 아닌데 뒤에서 욕 몇 마디 더 한다고 달라지는 게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좋은 얘기라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고선 다른 사람에게는 쓸모없는 얘기를 한다고, 안 하고 싶은데 일거리를 만든다고 한다면? 과연 좋은 얘기를,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인가? 누군간 말할 것이다.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거지. 가족끼리도 싸우는데 일하다가 만나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항상 좋기만 할 수 있어. 들어보니 네가 그런 말이 나오게 했네. 그 정도 뒷담화는 이해해야지. 술 먹고 한 얘긴데 뭘 심각하게 생각해. 대충 넘겨." 이럴 수 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회사 사람 흉은 회사 사람에게 해야 제맛


 보통 뒷말이라는 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하기엔 쉽지 않다. 회사생활에서 있었던 일을 가족에게, 연인에게 말한다면 분명 그들은 내 편이다. 대체로 상황은 따지지 않고 내 편을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뒷말의 대상과 그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생활 얘기를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한다는 것에 부담도 될 것이다. 그래서 회사 사람 흉은 회사 사람에게 하기 마련이다.


 회사 사람의 뒷말. 보통 뒷말의 대상은 내 주위에 일로 얽혀있는 사람이다. 당연하게 회사니까 일 위주로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내 말을 듣지 않아서, 잘해준다고 하는데 뭐든 불만인 게 티가 나서, 내가 하는 일이 사사건건 참견해서, 나한테는 잘해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잘해줘서. 천차만별의 이유지만 어떤 식이든 일로 엮여 뒷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뒷말을 하지 않는다. 나와 친하거나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한다. 대체로 다른 팀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일이 엮이지 않았으니까.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이 된다.


 한참을 욕하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아 후련하다. 정말 어딘가에 속 시원히 말하고 싶었어.”, ”이 사람은 내 편이야. 내가 얼마나 짜증 나고 화났는지 들어주고 같이 그 사람 욕해주니까.”, “ ‘A’하고 이 사람은 너무 달라, 이 사람이랑 같이 일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또 ‘A’을 봐야 하네. 그냥 적당히 맞춰주고 나와서 욕이나 해야지” 흉을 들어준 사람은 무슨 생각이 들까. “그렇게 안 봤는데 ‘A’는 정말 별로네.”, “나도 앞으로 ‘A’와 부딪힐 일 있으면 조심해야겠어.” 이 사람은 ‘A’를 잘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잘 알게 됐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알게 됐냐고? 내가 ‘A’에 대해 얘기했으니까. ‘A’의 등에는 내가 꽂은 칼과 함께 칼이 한 자루 더 꽂혔다.


 ‘A’는 변하지 않는다. 왜 달라져야 하는지 모르니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나도 같은 일을 계속 겪고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가 ‘A’ 얘기를 한다. ‘A’가 달라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건 아니다. 그냥 내 편이 돼서 스트레스를 좀 들어달라는 얘기다. 같이 흉도 좀 봐주고, 가십거리 좀 나누자는 거다. 휴우, 스트레스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그리고 ‘A’의 등에는 더 많은 칼이 꽂히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냥 얘기 좀 했을 뿐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당연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상황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회 생활하다 보면 좀 흉도 보고 그럴 수 있는 거지 ‘A’가 너무 고지식하게 구는 거 아니냐고 한다. ‘A’는 뒷말 같은 거 안 하냐고 한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고 한다. 내가 무슨 그 사람 등에 칼을 꽂았냐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 그래도 이미 칼을 꽂혔다.



자존심이라 하지 말고 용기가 없었다 말해요.


 당신은 누군가에 칼을 꽂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럼 당신이 주위의 어느 누구보다 칼을 많이 꽂았을 것이다. 이건 확실하다. 자신이 남들에게 상처를 많이 준다는 사람 치고 정말 상처 많이 주는 사람 없고, 자신은 남에게 상처 안 준다는 사람만큼 남에게 상처 많이 주는 사람 없다.


 누구나 상처를 받고 상처를 준다. 앞에서 말하기가 쉽지 않기에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고 나서 속이 후련했는지 아니면 마음 한쪽이 불편하고 미안했는지 생각해보자. 내가 직접 해결하기 어려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지 그저 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얘기한 건지 한번 생각해보자. 다른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에게 가서 대화를 해보기도 하고, 우리 둘이 얘기가 잘 될 수 있도록 중재해주기도 하고, 업무라던가 무언가를 변경하기도 했는가 아니면 그냥 내 편을 들어주면서 같이 흉보기만 했는가. 과연 어떤 게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꼭 당사자와 바로 얘기할 필요는 없다. 문제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그건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내가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지만, 용기가 없다고 하면 분명 누군가는 도와준다. 그리고 상대도 자존심이 아니라 용기가 부족했다 얘기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용기없는 겁쟁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관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