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 OO슈퍼
이 아파트는 1987년 준공되었고, 엄니와 나는 96년 부터 여기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서울로 올라간 뒤 엄니가 혼자 몇 년 사시곤 시골로 가시면서 6년 간 다른 이에게 세를 주고, 올 5월에 내가 다시 들어왔다.
준공된지 40년이 되어가는 지금, 아파트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 두어 번 외벽에 새로운 페인트가 칠해졌고, 아파트 이름도 새로 써졌다. 서점이 있는 전라감영/객사 인근으로 나가는 버스노선들도 많이 추가되었고. 아파트로부터 반경 500미터 안쪽으로는 편의점이 없는데, 이는 달라지는 것들 중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것 때문이기도 하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길에 집 앞 마트에 들렀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은 그곳. 물건을 사서 나오는 중에 주인아저씨께서 물으셨다.
"요즘 공부하고 있어요?"
뭐라고 답해야할지 조금 머뭇대니 아저씨께서, "아, 아니예요."
나는 3초 정도 후 "공부는 아니고, 가게 보고 있어요" 하고 답했다.
아마도 내가 출근하는 이들보다는 집에서 늦게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 그렇게 생각하셨나 보다. (공부 같은 건 해본 적이 없.. ㅎㅎ) 마트 자리에서는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모습과 나가는 모습,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사람 기다리는 모습까지 다 보이기 때문에. ㅎ
근데, "서점 하고 있고, 다른 일도 조금 하고 있어요." 라는 말을 하기엔 뭔가 좀 이상했나보다. "가게 보고 있어요" 라니.. 근사한 가게라도 하나 엄니로부터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진 않을지 싶기도 하네. ㅎㅎ
마트 아저씨께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저런 질문까지 하실 수 있는 이유는, 돌아오고 두 어 차례 마트에 가 다시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전에 살았는데 이번 달에 다시 들어왔어요" 말하니 주인 부부께서는 바로 다시 알아보시곤,
"그렇잖아도 어머니께서 며칠 전에 오셨더만요~" 하시며 반가운 답을 해주셨다.
우리 가족은 96년부터 살았지만, 아마도 예상컨데 아파트가 생긴 87년부터 이 마트는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정식 명칭은 여전히 OO슈퍼이니, 시작은 자연스럽게 슈퍼마켓이었을 것이고. 우리 가족이 처음 본 96년보다 약간 넓어진 것 같긴 한데, 규모는 크게 다르지 않다. 40여 년 동안 자릴 지키는 슈퍼라니.
내가 사는 이 아파트는 8동에 460세대다. 40여 년 동안 아파트에 살았던 모든 이들 중 슈퍼를 이용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건너편 주택들까지 아우르면 상권이 대략 6~700세대는 되지 않을까 싶다. 이곳이 40년을 버텨온 근간이기도 할 것이고, 또 그만큼 주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곳이어서 인근에 편의점이 생겼다가도 없어지고, 1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나도 편안한 마음이 들고요.
얼마 전에 쓰기로 한 소설 '오래된 아파트로 돌아왔다'를 2회차까지만 쓰고 신경쓸 게 많아졌다는 핑계로 진도가 더 안 나갔다. 그 소설 속에 반드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OO슈퍼. 퇴근길 아저씨에게 들은 한 마디 때문에 어딘가에 뭔가 하나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씻고 눕는데 괜시리 외로움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생전 잘 느끼지 못했던. 한 달에 한 두번씩 만나던 친구들로부터 이탈하고 나니 이젠 그런 시간조차 없어졌고, 오직 일로 만나는 사이들만 남은 것 같다. 종교나 어떤 인위적인 모임 같은 건 영 하고 싶지 않은데, 이 어려움을 어떻게 타파해갈까?
하지만 답은 참 간단해, "내 일을 잘 하자, 좋은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