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리뷰_무라카미 하루키의 회고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은 작가(그리고 러너).
1949년에 태어난 하루키의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일 회고록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What I talk about when I talk about Running)라는 제목에서 눈치챌 수 있듯 이 책은 하루키의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다.
고등학생 시절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그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진득하게 좋아해 본 적이 없는 내게 팬이라는 말은 일종의 사치이자 과분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한창 술독에 빠지고 나서야 하루키가 바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전공 공부보다 록음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하루키가 재즈 마니아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루키가 마라톤을 수십 번 완주한 러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더 먼 훗날의 일이다. 내게 이 책을 선물한 회사 동기는 "이 책을 읽고도 러닝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넌 하루키를 지독히 불신하는 사람이거나 운동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이겠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뉴발란스 매장을 들러 아이보리색 러닝화를 골랐다.
하루키에게 러닝은 글쓰기와 마찬가지였다. 그가 서문에서 마라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요약한 것이라고 표현한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말은 글쓰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힘들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는 본인의 선택사항이다. 하루키는 멈추지 않고 꾸준히 달렸고, 그렇게 꾸준히 글을 썼다. 이 책의 상당 부분은 하루키의 러닝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키가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고, 트라이애슬론에 나가고, 심지어 100km를 달려야 하는 울트라마라톤에 출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초보 러너로서 러닝에 대한 하루키의 생각과 경험들도 흥미로웠지만, 역시나 작가 하루키가 내게는 더욱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다. 이 책은 작가 하루키를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관찰경이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 반 전후. 그는 진구 구장 외야석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보고 있었다. 1회 말 선두 타자인 데이브 힐튼이 좌측 방향으로 안타를 치고 2루에 안착한 순간, 하루키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한다.
"맑게 갠 하늘과 이제 막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새 잔디의 감촉과 배트의 경쾌한 소리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하늘에서 뭔가가 조용히 춤추듯 내려왔는데, 나는 그것을 확실히 받아들였던 것이다."(53p)
작가가 된 하루키는 모두가 알다시피 승승장구했다. 꾸준히 하루키를 찾는 독자가 늘어났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와 가게를 경영할 때의 방침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가게를 찾는 손님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상당히 좋은 가게다, 마음에 든다,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독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양을 쫓는 모험' 이후 하루키에게는 이런 충실한 독자가 제법 늘었고, 하루키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노르웨이의 숲'이 예상치 않게 많이 팔린 것은 하루키에게 오히려 일종의 도전과제였다.
하루키만큼이나 성공한 작가도 몇 없겠지만, 하루키만큼이나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키는 작가도 몇 없을 것이다. 하루키는 찰스 강변을 달리던 어느 이른 아침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찰스 강변을 내 페이스로 달리고 있노라면, 날씬하게 마른 작은 몸집에 하버드의 로고가 붙은 붉은 벽돌 셔츠를 입고 금발을 포니테일로 묶은 신제품의 아이팟을 듣는 여자애들에게 추월당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들은 '바람을 가릇듯 일직선으로 도로를 달려간다'. 추월당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하버드의 학생들이다. 그에 비하면 하루키는 스스로가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더미 같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많다고 고백한다.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거론되는 작가의 고백치고는 담백하다. 하루키는 하버드 학생들에게 앞자리르 내워주고 자신은 롤링 스톤스의 '베거스 뱅큇(Beggar's Banquet)'을 들으며 자기만의 페이스를 지킨다. 꾸준한 달리기는 하루키 스스로가 작가로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면역 시스템과 같다. 그래서 그는 꾸준히 달리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를 끊임없이 다뤄야 하는 하루키에게 러닝은 강력한 자기면역 시스템이다. 그에게는 하버드 학생들의 페이스와 상관없는 자기만의 페이스가 있고, 자기만의 해야 할 일이 있는 셈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하루키는 자신의 묘비명에 새길 문구를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말을 고르겠다고 책의 마지막 순간에 말하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그의 마라톤 기록은 조금씩 떨어지고 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달린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죽는 날까지 열여덟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서른을 넘기며 몸이 전 같지 않은 것을 느낀다. 하물며 1949년생인 하루키에게 시간이란 얼마나 야속한 존재일까. 하지만 하루키는 그마저도 조크로 넘긴다. 하루키는 자신의 트라이애슬론 레이스용 사이클에 브라이언 아담스의 히트곡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의 제목을 적어 놨다. 하지만 스스로 고백하듯 죽는 날까지 열여덟 살로 있으려면 열여덟 살에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이 나온지도 벌써 10년이 가까워진다. 20년이 지나기 전에 이 책을 접한 것에 대해 회사 동기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의 제목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사랑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에서 가져왔다. 이 또한 좋은 책이다.
-문장들
9p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간단하게 번역하면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가령 달리면서 '아아, 힘들다! 이젠 안 되겠다'라고 생각했다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 되겠다' 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64p
학교라는 데는 들어가서 무언가를 배운 후에는 나와야 하는 곳이다.
291p
수량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몇 장 정도의 레코드가 있느냐고 질문받으면, "무척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