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민족, 과거, 충동을 사랑한 네 남자의 격돌기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파묻힌 거인(The buried giant)’을 읽었다. 의외로 반전이 있고, 그 반전이 중요한 소설. 용과 요정(이 책에서는 도깨비라고 번역돼 있다), 마법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주제는 무거워서, 읽고나면 노벨상 수상자답다는 생각도 든다.
잘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별로 재미가 없을 수 있다. 난 소설의 세계관을 어느 정도 파악할 때까지는 읽어나가는 것을 힘들어 하는 편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주인공들이 ‘망각’이라는 증상을 갖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모험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소설 초반에 화자들이 과거를 기억 못하니 구체적으로 제시되는게 거의 없다. 안 읽히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2015년에 나온 이 책의 내용을 다룬 블로그 포스팅이나 기사가 별로 없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느낌들에서 힘들게 단서를 찾아가다 보면, 이 소설의 배경이 6세기 전후 아서왕 전설의 시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난 아서왕이란 이름은 알지만, 아서왕 전설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소설을 다 읽고 아서왕 전설을 찾아봤는데, 전설의 역사적 배경과 ‘가웨인 기사’ 같은 전설 속의 인물들에 대한 지식을 미리 알고 본다며 조금 도움이 될 법하다. 어쩌면 아서왕 전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벨상 수상자가 쓴 외전-스핀오프격의 흥미로운 텍스트일 수도 있다. (영화 동사서독을 본 뒤로 고수의 스핀오프-프리퀄은 내게도 언제나 로망.) 스포일러를 걱정하지 않는다면, 출간직후의 작가 인터뷰 요약본을 보고 읽는 것도 방법.
간단히 말하면 남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그러므로 지독하게 외로운 결말이 기다리고 있고, 그래서 노벨상답다.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 '액슬', 자신의 종족을 사랑하는 남자 '위스턴',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섬긴 군주를 사랑하는 남자 '가웨인', 그리고 단 한가지 대상을 향한 맹목적 충동(그 역시 남자의 사랑)에 휩쌓인 소년 '에드윈'이 얽힌 이야기. 주인공급 여성 비어트리스가 등장하지만 남주들만큼은 감정이입이 잘 되지 않았다.
첨부한 그림은 소설에 등장하는 ‘픽시(pixie)’라는 요정/도깨비들. 19세기 후반에 John D. Batten이 그린 것이라고 위키피디아에 소개돼 있다. 픽시는 영국 전통의 초자연적 존재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하고 있고, 떼를 지어 다니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 일행을 매우 위험한 상황까지 몰고 가면서, 그 뒤에도 무거운 고민을 안겨주는 존재다.
아래 인용은 픽시들과 주인공 ‘액슬’이 액슬의 아픈 아내 ‘비어트리스’ 를 놓고 다투는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 영화화한다면 가장 감동적인 부분일게다. 더 타임스는 이 책이 나온 뒤 반지의 제왕과 호빗 시리즈를 영화화한 피터 잭슨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주길 바란다는 서평을 실었다.
"이봐요,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니 그녀를 구할 치료법이 없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잖아요. 이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그 일들을 어떻게 당신이 감당할 수 있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속에서 몸을 뒤트는 걸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그저 귀에 따뜻한 말이나 들려주어야 하는 그날을 정말 맞고 싶은 건가요? 그녀를 넘겨주면 우리가 그녀의 고통을 편안하게 해줄 거에요. 그녀 전에도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닥쳐! 난 그녀를 넘겨주지 않을 거야!"(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