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저게임
왜 흙수저는 세상을 뒤엎을 수 없었나
수저게임 참가자는 금수저 혹은 흙수저로 출발하여, 규칙에 따라 자산을 불리거나 생존을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이것은 월간잉여 편집장 최서윤씨가 기획한 보드게임 '수저게임' 참가단으로 참석한 후기입니다.
참가자는 총 10명, 카드를 뽑아 2명은 금수저로, 8명은 흙수저로 출발했습니다. 우린 두 판을 진행했는데, 흥미롭게도 아주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첫번째는 모두가 조금씩 평등해지고, 흙수저는 아무도 죽지 않았고 집을 산 흙수저도 있었으며 금수저는 세금을 좀 많이 냈으나 여전히 돈이 많았습니다. 두 번째는 흙수저 두 사람이 죽고 몇몇 사람들은 은수저가 되었으며 금수저는 엄청난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두 게임에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요?
1.게임의 시작
첫 번째 판, 카드를 뽑자 갈색 수저로 땀을 흘리며 열심히 밭을 일구고 있는 가난한 농부 흙수저의 그림이 나왔습니다. 난 흙수저로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흙수저는 칩 10개, 금수저는 칩 10개와 부동산 자산 2개를 갖고 있었습니다. 흙수저는 한 턴을 돌때마다 임대료 1칩씩을 소모하고 금수저는 임대료로 2칩 씩을 얻었습니다. 흙수저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는 투표권이었고, 머릿수가 많다는 사실 뿐이었습니다.
처음에 모든 참가자들은 대학이냐 취업이냐를 선택합니다. 취업자들은 한 턴당 임금 1칩씩 벌고, 대학은 1칩씩 등록금을 내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4턴 뒤엔 고졸자보다 더 비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2. 종부세
한 턴을 돌 때마다 누구나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발의된 법안은 종합부동산세였습니다. 부동산이 많은 금수저들에게 비싼 세금을 매기자는 것. 당연히 흙수저들의 숫자가 많았으므로 이 법안은 통과되었고 세금이 임대료만큼 비싸지자 금수저 중 한 명은 부동산을 은행에 팔았습니다.
세 번째 턴이 되자 규칙에 따라 금수저들은 서로 결탁해 흙수저 한 명을 감옥에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부세를 발의한 흙수저는 감옥에 갔고 그는 두 턴 동안 어떤 경제활동과 발언도 금지되었습니다. (게다가 감옥에서 나오면 취업난으로 임금도 못 받게 된다고 합니다.)
3. 무상등록금
세 번째 턴을 돌 때 대학 간 흙수저가 매 턴당 소모되는 등록금을 없애고자 무상 등록금 법안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대학간 흙수저의 수가 취업한 이의 수보다 적었으므로 과연 다수결로 이 법안이 성사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요. 그때 취업한 흙수저 한 명이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무상 등록금에 동의해 주면, 다음 법안 발의할 때 고졸도 대졸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임금을 받게 하는 법안에 동의해주세요. 어때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왜냐하면 저는 대학간 흙수저라 매번 임대료1칩, 등록금1칩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네 턴만 버티면 그 후로 2칩씩 벌 수 있을거라는 기대로 이를 선택한 것인데, 갑자기 고졸과 똑같은 임금을 받게 되면 뭐하러 비싼 등록금을 소모했나 하고 살짝 억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이미 등록금을 2칩이나 소모했기 때문에, 갑자기 그 투자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나도 흙수저였지만, 그 제안을 한 다른 흙수저가 영리하기도 하고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들도 결국 자신들한테 더 좋은 걸 제안하는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우리는 일단 동의했습니다. 당장에 등록금과 임대료가 너무 부담되기도 했고, 협력의 차원에서 시도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금수저들은 반대했고, 반대에 동참하는 보수적인 흙수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취업 흙수저들이 대학 흙수저들을 위해 찬성을 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턴 부터는 대학 등록금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3. 복지, 복지, 복지
흙수저들은 약속했던대로 8명의 표결권을 행사하며 고졸 대졸 동일임금의 법안도 통과시켰고, 금수저들이 낸 종부세로 주택을 구입해 네 명당 한 주택씩 배급하는 무상주택배급안도 통과시켰습니다. 그래서 본래 무주택자들은 질병에 걸려 한 턴당 한 칩씩 더 소모하게 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게 되었고 임대료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4.행복한 결말
10턴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흙수저들 두 명이 감옥에 다녀왔으나 그 사이 최저임금 상승법을 통과시켜 3칩씩 임금을 받게 된 흙수저들은 부족하지 않은 칩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다녀온 흙수저도 죽지 않았고 몇몇 흙수저는 집을 샀고, 집도 사고 재산도 불리고 싶었던 보수적인 흙수저 A씨는 다른 흙수저 한 명과 결혼을 하여 힘을 합쳐 결국 은수저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금수저 두 명은 몇 턴 동안 종부세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법에 따라 집도 사고팔고 하면서 재산을 유지했습니다. 모두가 만족했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부족하지 않았고 금수저들은 여전히 부자였습니다. 국고가 바닥나지 않았느냐구요? 물론 국고의 칩은 한계는 있었으나 모두가 생존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5.두 번째 게임, 경제민주화로 시작
두 번째 게임이 진행되기 전에 우리는 몇몇 규칙을 변경했습니다.
첫째, 흙수저들은 흙수저 모두가 생존하게 한다.
그게 실패하면 본인이 은수저로 신분상승을 해야만 살아남는다.
둘째, 흙수저들끼리 경쟁해서 가장 재산이 많은 흙수저는 중간에 은수저가 될 수 있다.
셋째,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만 법안을 발의할 수 있다.
넷째, 금수저보다 흙수저들의 법안 발의가 더 어려워지도록 한다.
맨 처음 통과된 법안은 집 두개 이상 가진 금수저들에게 매 턴당 세금 3칩씩 걷어서 흙수저들에게 복지금을 반 칩씩 지급하자는 법안이었습니다. 그 상태라면 들어오는 돈보다 복지로 나가는 돈이 많아지므로 국고가 바닥날 것이라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 표 차이로 법안은 통과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고가 바닥났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6.날치기 통과
두 번째 게임에서는 첫번째 게임에서 보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이라이트는 흙수저들의 연대가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대학간 흙수저 한 사람에 의해 날치기 법안이 통과되었는데, 그 법안은 대학다니는 사람들에게만 장학금을 3칩씩 지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학다니는 흙수저는 고작 두 명 뿐이었습니다. 즉 흙수저들 중 단 두 사람에게만 유리한 법안이었던 것입니다.
대학다니는 흙수저가 취업한 흙수저보다 돈을 더 많이 받게 되자 몇몇 흙수저들은 억울해했고 몇몇 흙수저들은 본인들의 생존을 위해 뒤늦게 대학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됩니다. 여전히 취업으로 남은 흙수저는 나와 다른 흙수저 둘이었는데, 갑자기 소수가 되자 취업자들을 위한 법안을 발의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7.카오스의 시작
몇 턴이 지나자 흙수저의 재산들 간에 미묘한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대로 가장 재산이 많아진 흙수저는 은수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삼성 샐러리맨같은 느낌의 남자가 깔끔한 양복을 입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서 있는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림 속 남자는 그닥 행복해보이진 않았습니다.
장학금으로 돈이 좀 생긴 어떤 흙수저들은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은수저가 된 흙수저들은 금수저들의 법안을 옹호하기도 했고, 집을 산 흙수저들은 부동산세에 대해선 더이상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흙수저는 감옥에 갑니다.
그 사이 어느 금수저는 로또에 당첨되어 더 많은 재산과 집 5개를 갖게 되었습니다.
8.생존의 위협
그리고 집이 없는 사람들이 죽기로 약속되어있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무주택자들은 질병으로 4턴이후 매 턴마다 병원비를 지불하게 되어 있었고, 여덟 턴이 지나면 질병으로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 흙수저가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보급하자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집의 개수는 10개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금수저 한 사람이 집을 5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집이 모자라 그 법안은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취업한 흙수저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받는 장학금 혜택도 못받고 질병과 임대료로 돈이 계속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생존이 절박해졌습니다. 그 사이 이미 흙수저들은 대학생, 취업자 그리고 주택자, 무주택자 등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모든 흙수저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어떤 법안의 동의도 이끌어내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이 "북한이 도발하여 모든 흙수저들이 빨갱이가 되어 감옥에 가게 된다" 라는 랜덤 카드가 나왔습니다. 모두 감옥에 가고 금수저와 은수저만 남았는데 그들은 영리하게도 모든 무주택자들의 투표권을 없애자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미 집을 산 흙수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9.부동산 폭락
마지막 랜덤카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부동산 가격 폭락이었습니다. 모든 집이 반값이 되었습니다.
이때 집이 5개였던 금수저의 부동산을 은행이 싸게 사서 시장에 내놓게 됩니다. 그 금수저는 매 턴마다 3칩씩 세금으로 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주 부유했습니다.
나는 그 타이밍을 타고 잽싸게 집을 싸게 샀습니다. 투표권이라도 가지려고 했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절박하게 중산층의 막차를 탔습니다.
옆의 한 흙수저가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10칩을 주고 집을 샀는데, 5칩으로 집을 샀군요, 부러워요.
10, 두 사람이 죽다.
여전히 집의 숫자는 모자랐으므로 집을 사지 못한 흙수저 두 사람은 8턴이 지나자 죽었습니다. 그 중엔 애초에 부유세를 걷어 흙수저들에게 나눠주자는 법안을 발의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발의한 법안의 혜택을 보아 왔던 나는 마지막에 혼자 집을 샀고 살아남아 은수저가 되었습니다.
막판에 생존 안정권에 들어간 흙수저와 더 부유해진 금수저들은 더 이상 법안 발의에 대한 의욕을 잃었고 무료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구 도박할 수 있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고, 결국 가위바위보로 한사람에게 재산을 몰빵하자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결국 마지막엔 한 사람이 재산을 다 갖고 끝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재산을 엄청 불리고 모든걸 다 가졌는데, 다른사람은 다 죽고 나만 살아남았어요. 슬퍼요. 이건 슬픈 게임이야.
11.그리고....
흙수저 두 사람이 죽어 사라질 때 나는 후회했습니다. 주택을 혼자 사지 않고 같이 사서 같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왜 두 사람을 죽지 않게 하는 법안은 발의할 수 없었을까. 모든 게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자 나는 얍삽한 기회주의자가되어 내가 살아남고자 집을 샀습니다. 남들이 먼저 사버리면 내가 죽기 때문이었죠.
공정한 규칙을 위해 법안을 열심히 발의했던 흙수저는 감옥에 가 있다가 죽었습니다.
제게 남은 사실은 은수저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아니었고 부동산 폭락의 기회를 잘 살려 집을 싸게 산 기지를 발휘했다는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제게 남은 사실은 죽을 위험에 처한 흙수저들의 위기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얼마든지 기회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흙수저가 발의했던 그 법안의 혜택을 보았던 그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연대하는 건사람들이 착해져서가 아니라 비슷하게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아져서라는 걸,
그리고 만약 이 세상에 살 만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만 된다면
죽어가는 20%에 대해선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마치 세월호에서 헬기를 타고 혼자 생존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을 버리고 내 말만 잘 듣고 따라오면 너는 제일 먼저 구명정에 태워주겠다는 말은 듣고 쫓아간 선원이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사실은 제 뒤통수를 쳤습니다.
이것은 수저게임 체험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규칙은 훨씬 복잡했으나, 간단한 설명과 극적인 표현을 위해 진행과정을 생략하거나 대화를 약간 편집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으로 현실경제처럼 대출, 인플레, 그리고 기업의 이윤추구가 서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임금상승이 기업에 가져올 영향 등은 고려되지 않았으니 참고 바랍니다. 또한 여기 설명된 규칙들은 체험판에 한정된 것으로 상용화될 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