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킵고잉 Dec 18. 2023

9일동안의 교토 (6) - 반전의 문신남

교토의 동네 맥주, 그리고 목욕탕 우메유 사우나

갑자기 작년 겨울, 교토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써본다.

작년 겨울, 교토에서 혼자 놀고 있을 때 친구S가 교토로 왔다. 친구는 번역을 하는 프리랜서. 어디에서나 일 할 수 있다는 것이 프리랜서의 장점 아니냐며, 숙소가 무료로 제공된다는 나의 꾐에 넘어가 현해탄을 넘었다.  

프리랜서에게 일할 곳을 제공해주고자 했지만, 일본은 왜이런겨? 이 많은 카페 천국에서 대부분의 카페가 우아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디저트를 먹는 멋진 공간일 뿐, 노트북을 펼쳐두고 몇 시간씩 눈을 부라리며 일을 할만한 곳은 없어보였다. 

할 수 없이 찾아낸 곳이 백화점 지하 1층의 구석 빵집.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고 일을 하려고 했지만 너무 졸려서 구석에서 야간자율학습 시간의 고3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포기.

친구와의 회포를 풀고자 저녁에 근처 맥주집을 찾아갔다. 
"스미마셍~ 후루 부킹 (풀 부킹)" 소리에 익숙한 우리는 아예 서서도 먹을 수 있는 맥주집으로 갔다. 가모강 근처의 '교토비어랩 (Kyoto Beer Lab)'. 캐주얼하고 글로벌한 분위기의 로컬 맥주집이다. 


교토 비어랩 (구글)



사람이 많아 간신히 바 자리에 끼어 앉았다. 


외국인의 특권답게, 맥주 한 잔 마시며 신나게 한국말로 떠들기 시작했는데. 한참 친구와 회포를 풀다 보니, 우리 옆자리에 머리를 빡빡 민 덩치 큰 외국인이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팔뚝 가득 문신을 한, 그래서 평소라면 조금 무서워서 자리를 피할 것 같이 생긴 외국인. 



문신의 빡빡남이 우리를 자꾸 쳐다본다. 


왤케 우리를 자꾸 쳐다볼까... (반했나?)



- 친구: 외국인이 자꾸 쳐다본다 야.


- 나: 반했구만, 반했어...


- 친구: 저 외국인, 나이들어 보이지만, 알고보면 엄청 어린 애일걸. 


- 나: 근데 심심한가 보네. 니가 옆에 있으니까 말 걸어봐. 또 아냐, 이러다 인연이 되어서 너랑 결혼이라도 할지! 음하하하!!! (막말 죄송..)


- 친구: 나 MBTI 극 I 잖아... 난 말 못해... 


- 나: 말 못하긴 문신남도 마찬가지야. 딱 보니 문신만 했지, 극I인거 같은데 극 I 둘이 교토 술집에서 처음 만나 막 사귄다, 너???


- 친구: 아냐, 저 외국인은 너를 좋아하는 거야~


- 나: 아잉, 몰라 몰라~~ ㅋㅋㅋㅋ 



이렇게 찧고 까불고 어화둥둥 말도 안되는 얘기를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러다 길게 눈이 마주쳤다. 


나도 어제까지는 혼자 교자에 맥주를 마시던 여행객이었다는 것이 떠오른다. 그래, 혼자 온 여행객은 친구가 필요하지...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나: 고.. 곰방와...!

그러자 문신남이 유창하게 한.국.말.로. 말했다. 



문신남: "그 앞에 메뉴판 좀 주세요."


나: !!!!????  (지금 내가 들은 게 한국말인가...?) 


.


.


.



그랬다.


캐나다인 랜디는 한국 청주에서 5년째 살고있을 뿐이었고, 한국에서 교토로 여행을 온 것 뿐이고, 어쩌다 한국사람 옆에 앉아서 멀리 있는 메뉴판을 건네받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조용히 들어야 했을 뿐이고......



팔에 문신이 가득한데 샤이하고,
캐나다인인데 한국 청주에 사는 반전의 랜디.


청주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랜디는, 한국의 남중생들에게 지쳐있었다. 허허허

핸드폰, 게임 밖에 모르는 학생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은 듯 했다. 한국인 중딩을 대변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것도 포함해 대신 사과드린다.



맥주 한잔 하고 나오니 알딸딸하다.


가모강 근처의 작은 지류, 조그만 실개천을 따라 걷다보니 동네 목욕탕 우메유 사우나가 나온다. 안그래도 호텔 샤워실이 춥던데. 그리고 연말이잖아? 시원~하게 때 한 번 벗겨줘야지. 드가자~!!! 하고 우메나 사우나로 들어간다.


어느 나라나 새해 직전에는 목욕을 하나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목욕탕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목욕탕 입장료는 490엔, 수건은 200엔. 목욕 한 판 하고 나와도 7천원 정도. 이젠 일본이 한국 물가와 비교해도 더 싼 수준에 이르렀다.
 


우메유 사우나
오래된 신발장, 나무 열쇠가 멋있다. 


목욕하고 나오니 아주 시원한 게 좋다.


조용한 교토의 밤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생각나 써보는 작년 겨울, 교토 맥주와 목욕의 추억.
우메유 목욕탕은 올해 연말에도 사람으로 미어터지겠지, 아마도. 

매거진의 이전글 혼돈의 도가니속으로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