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아주 세련되고 교양있는 자본주의 기생충
본 칼럼은 2020년 2월 17일자 Euronews 오피니언 섹션에 기고된 제 칼럼 <Oscar-winning film Parasite has exposed the parasitic lives we all live under capitalism>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s://www.euronews.com/2020/02/17/oscar-winning-film-parasite-has-exposed-the-parasitic-lives-under-capitalism-view
“아직도 기생충을 안 봤단 말이야?” “영화에 진짜 기생충이 나와?” “나 이번에만 기생충 세 번째 본다”
1년에 몇 번 사용하지도 않는 단어를 우리는 요즘 매일 같이 사용하고 있다. 기생충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전 세계 미디어의 관심을 받았던 적이 있었을까? 과거에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기생충’이라는 단어를 실제로 언제 사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휩쓸며 전 세계사람들로 하여금 한국영화를 재평가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한국은 Psy, BTS에 더해 ‘봉준호’라는 이름을 추가함으로써,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한층 강화시켰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영화에서는 두 가족을 기생충으로 묘사한다. 그 두 가족들은 모두 부유한 집의 가정부, 운전기사, 과외선생님으로 취업하여 고용주의 돈을 받아가며 삶을 근근이 이어나간다. 그들은 위조된 증명서와 거짓말로 고용주들의 믿음을 산다. 고용주가 집을 비운 사이, 그들은 마치 그 집이 자기 집인 마냥 자유로이 유흥을 즐긴다. 때로는 상대방의 뒷담화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한다. 관객들은 그러한 그들의 행태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틀 안에서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아첨의 ‘표본’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영화 말미에는 자본주의 강자의 뒤에서 칼을 꽂는 문자 그대로의 ‘stab in the back’ 또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전반적으로 그 두 가족은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두 가족의 행태들이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깨달았다. ‘기생충’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와 같이 요약된다. 첫째 “a person who exploits the hospitality of the rich and earns welcome by flattery (Merriam-Webster)”, 둘째 “a person who always relies on or benefits from other people and gives nothing back (Oxford Learner’s)”. 위 두 가지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일상과 묘하게 닮아있다. 특히 불현듯 주위의 많은 직장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하에 많은 직장인들은 그들의 땀과 노력, 시간을 그들이 속한 조직을 위해 바친다. 때로는 그 조직을 가족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 조직들은 ‘hierarchical organisation structure’를 통해 자본가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데 용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이윤 추구를 위한 위계’ 속에서 모든 직장인들은 매일 피라미드의 정점만을 바라본다. 상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한 “웃음 마스크”는 필수다. 때로는 손바닥과 발바닥을 이용한 아첨을 통해 상사들의 좋은 기분을 구매한다. 조직 내 한 명이라도 내 편을 더 만들기 위해 누군가의 뒷담화를 자신만의 고민상담으로 잘 포장한다. 이 모든 것은 ‘hierarchical organisation structure’ 하에서 승진과 더 많은 보수, 그리고 직업의 안정성을 이루어내기 위한 직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본능이다. 어디 이뿐만이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주어진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나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고마움을 잊어버리는 직장인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에게는 유연한 ‘인간관계’의 가치가 우월한 ‘인사고과’의 그것에 앞설리 없다.
자, 이제 영화 속 두 가족과 우리 주위 직장인들을 비교해 보자.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과 생존을 위해 아첨을 시도하고, 상대방의 뒷담화를 통해 자신의 유무형의 이익을 취득한다. 그리고 상대방의 호의를 영리하게 잘 활용하여 그 이익을 극대화한다. 물론 그것에 대한 return, 즉 보답은 없다. 묘한 공통점이 발견되지 않는가? 아, 물론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게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니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는 영화 속 두 가족처럼 반지하에 사는 기생충도 있고, 볕이 잘 드는 빌딩에 사는 기생충도 있는 것 같다. 사유재산권이 허용되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 사는 이상, 사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제도적 틀 속에서 생존을 하기 위한 기생충 역할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다. 영화 속 두 가족의 행태를 마냥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촘촘한 그물처럼 얽히고 설켜있는 이 세상은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세상은 점점 더 평평해지고 좁아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는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가 무척이나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물 안에서의 생존과 경쟁을 위해 우리 모두가 기생충 역할로부터 자유롭기는 매우 어렵다. 만일 그러한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의 기생충 역할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까? 나는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자본주의의 기생충’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뒷담화보다는 열린 대화를, 아첨보다는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다면 우리 모두가 한층 세련된 기생충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피라미드의 정점을 향해 스퍼트를 할 때 나를 도와준 주위 사람들에게도 감사의 표현을 잊지 말자.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 뿌린 대로 거둔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듯, 우리 모두는 일정 부분 기생충의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의 정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왕 기생충 역할을 버릴 수 없는 것이라면, 보다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 역할을 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우리 몸에서 생체 기능을 도와주는 ‘기생충’도 존재하듯, 세련되고 교양있는 ‘자본주의 기생충’은 유연한 인간관계의 기능을 도와주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