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여러 편에서 ‘계급장 뗀다’는 유의 얘기를 써놓으니 저와 절친한 주변분들(제 글을 유일하게 출간하기 전에 볼 수 있는 분들)이 묻더군요. “너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상사(선배)들을 다 ‘아랫사람’처럼 봤냐?” 갑자기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다가 제 글을 다시 쭉 읽어보니 충분히 이런 질문을 받을 만한 얘기를 써놓았구나 싶어지더군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대답했냐고요? 물론 “당연히, 아니지!”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제 입에서 대답이 바로 나오지는 않았다는 것. 상사나 선배들을 아랫사람으로 보지 않은 건 분명했지만, ‘당연히’ 그렇게 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도 100% 확신할 수 없더군요. 지금에 와서야 솔직담백하게 말할 수 있지만, 저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아랫사람, 정확히 말해서는 ‘잠재적인’ 아랫사람으로 봤던 것 같습니다. 저하고 같은 직장, 같은 직종에 몸담고 있는 선배와 상사들(동료들도 포함)을 우습게 봤다, 이겁니다.
이런 식이었다고나 할까요. “당신들이 여기서 몇 년이나 먼저 ‘뺑이쳤으니’ 나보다 일에 능숙한 건 당연한 거지. 나보다 못하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거 아냐? 몇 개월, 아니 좋아 딱 1년만 지나봐라. 판세는 바로 역전될 거라고. 그때까지만 당신들을 선배로 대접하지.” 말 그대로 그때까지만 그들의 솜씨와 노하우를 쪽쪽 빨아들여 기존에 제가 갖고 있던 잠재력과 실력에 덧붙이면 회사 안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될 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들을 지금의 자리를 잠깐 지키고 있는 임시 선배들로, 제 자신을 지금의 자리에 잠깐 머물고 있는 임시 후배로 여긴 셈입니다.
우리 한번 툭 까놓고 얘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지금 현재 옆에서 여러분에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으르렁거리며 여러분을 노려보고 있는 상사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 그렇진 않다고요? 정정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발전을 위해 등도 토닥토닥 거려주고 적절하고도 합리적인 비판을 해주면서도, 치사하지 않게 전수할 거 아낌없이 다 전수하는(상사의 마음은 거의 다 이럴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상사들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옆에 있는 상사들에 대한 솔직한 느낌을 말하면 됩니다.
으르렁대는 스타일이든 토닥거려주는 스타일이든, 아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표현이 입가에 맴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상사가 너무 멀게 느껴져서 가까이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너무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에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사의 실력을 진정한 ‘실력’으로 보기보다는 재직 연수에서 나오는 노련미나 노하우 정도로 가볍게 무시해버렸다는 거고, 따라서 상사와 저 사이에는 큰 갭이 없다고 여겼다는 거지요. 그러니 굳이 가까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까이 있을 때 배우지 못한, 아니 너무나 자만했던 나머지 배우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간과했던 사실은 상사란 존재가 실은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이었다는 겁니다. 단순히 멀리 하고 싶어도 매일매일 과제를 내주고 체크하니 멀리 하지도 못하겠고, 제 입지가 높아지는 게 그의 손에 달려있으니 멀리해서도 안 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그가 조직 안에서 제 자신이 이것저것 잘 적응하고 버텨내 성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성공하려면 어떻게 성공해야 하는지를 판가름하는 ‘바로미터’(물론 ‘열쇠’는 어디까지나,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지요)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사는 무조건 옳다’는 명제는 무조건 옳은 게 맞습니다. 결국 돌이켜보면 계급장을 떼고 한 판 붙기 전에 계급장이 뭔지, 그것을 왜 달아주는지를 알아야 했던 거지요.
[요리 가이드라인 #1] 자기 분야에서 오랫동안 노력해 온 사람이 쌓은 내공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는 몇 십 년의 세월 속에 쌓아온 힘이 있다. ―김경준(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CEO가 되고자 합니다. 다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그중 장점들을 골라내 거기에만 노력을 투자하지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CEO가 되기 위한 레이스에서 중도 포기하거나 다양한 이유들로 줄줄이 탈락하고 맙니다. 목적과 목표도 뚜렷하고,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곳도 명확하고, 방향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등잔 밑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너무 앞만 보면서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최고가 되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인 것까진 좋은데, 거기에만 너무 빠져 있는 나머지 가장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겁니다. 최고에 대한 정의(definition)를 제대로 내리지 않은 거지요.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최고이고, 최고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겁니다.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꿰맨 셈이니, 그다음부터는 도미노 효과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뻐꾸기가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던가요? 그러라고 하세요. 대단해보이긴 하지만 그다지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뻐꾸기를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뻐꾸기 옆에 가서 그 놈이 왜 우는지를 관찰해야 합니다. 우는 이유를 알면 울게 하는 어려움을 미리 덜 수 있으니까요. 물론, 진정 우는 걸 보고 싶다면 말이지요.
자, 그럼 단추를 제대로 꿰어볼까요. 회사 안에서 누구를 1인자라고 부르나요? 물론 CEO입니다. 하지만 CEO만이 1인자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1인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목표와 목적은 분명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CEO인 것이지, 목적이 CEO인 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1인자입니다. 1인자가 되면 CEO가 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CEO가 되려고 처음부터 기를 쓰는 게 어려운 거지요. 역시, 대견해보이긴 하지만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여러분의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사람이 바로 1인자입니다. 사수든 팀장이든 한 기수 혹은 1년 위의 선배든 다 1인자들이지요. 인정하기 싫겠지만 자기보다 더 잘나가고 있는 동료들이 다 1인자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암묵적으로 자기보다 사실상 더 인정을 받고 있는 후배들이 다 1인자들입니다.
[요리 가이드라인 #2] 이 세상에 행해지는 해악의 절반은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들을 좋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한 끝없는 투쟁에 열중할 뿐이다. ―T. S. 엘리엇
이런 식으로 1인자에 대한 정의를 쭉 해나가다 보면 아주 단순한 진리가 하나 튀어나옵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울 게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우리에게는 1인자라는 것. 그 말은 결국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1인자라는 겁니다. 그것도 업무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만이 1인자라는 게 아닙니다. 업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청소하시는 분들 혹은 이 층 저 층 돌아다니면서 구두 닦는 분들도 다 1인자들입니다. 업무를 해나가는 스타일이나 방식을 봤을 때 우리는 거기에서도 뭔가를 느끼고 배울 수 있으니까요. 요컨대 적어도 회사 안에서 우리는 2등이고 2인자일 뿐입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말을 빙빙 돌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前 멤버였던 양현석이 이끌고 있는 YG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실에는 ‘가수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는 구호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양군의 입장은 “가수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에요. 가수는 계속 부족하고 목말라야 해요.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끝이거든요.”인데, 2인자가 갖춰야 하는 생각과 자세가 딱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 여기서 2인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볼까요? 2008년 초에 동아일보와 G마켓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당신이 생각하는 2인자’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거의 80%에 가까운 사람들이 2인자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나름의 영역을 개척하며 인정받는 창의적인 인물 : 60.9%
1인자를 만드는 사람 : 15.8%
가늘고 길게 활동하며 생명력을 유지하려는 인물 : 13.4%
만년 2등으로 남은 불운한 인물 : 8.4%
실력이 없는 인물 또는 패배자 : 1.5%
“설문은 설문일 뿐”이라며 여전히 2인자(혹은 2등)라는 말에 대해 찜찜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역사고 뭐고를 떠나서 회사에서 ‘팽’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엄습해오는 건 아닌지요? 이런 걱정을 하고 계신다면, 참 다행입니다. 겸허하게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여기건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건, 혹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1등에 대한 욕망이 활활 타오르건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그 불안감 속에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으니까요.
1962년, 미국. 미국의 렌터카 시장에서 압도적인 시장점유율 1위(시장의 70% 이상을 장악)를 달리고 있던 헤르츠(Hertz)의 뒤통수를 제대로 날린 사건이 있었지요. 자그마한 렌터카 회사 에이비스(Avis)가 도발적인 광고를 내걸었던 겁니다. 광고를 보면 이런 대담한 질문이 나옵니다. ‘에이비스는 렌터카 시장에서 고작 2등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선택해야 할까요?(AVIS is only NO.2 in rent a cars. So why go with us?)’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 에이비스는 평범하고 단순해보이지만, 결코 어리석지 않은 대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더 열심히 합니다.
We try harder.
렌터카 시장이 헤르츠와 에이비스 양강 체제로 새롭게 재편되는 역사적인 한마디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사실 에이비스는 당시에 2등 기업이 아니었다는 것. 1952년에 설립된 후 13년 내리 적자에 시달려온 기업으로서, 이 카피가 등장한 1962년에는 적자 규모가 자그마치 125만 달러에 육박하고 있었지요. 2등이기는커녕 당장 문 닫아야 할지도 모르는 비전 없는 회사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에이비스는 승부를 걸었던 겁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된 ‘We are number 2’ 캠페인이 바로 그것이지요. ‘지금은 1등이 아니지만, 1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더 좋은 서비스를 받아보라’ 이겁니다(비록 지금도 1등은 아닙니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레슨은 무척 단순하고 간단합니다. 1인자가 되고 싶다면 남보다 더 열심히 하면 됩니다. 남보다 더 열심히, 2인자에 충실하면 된다는 거지요. 다시 말해 2인자로서 더 열심히 1인자를, 그가 갖고 있는 마음과 자세를 본받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1인자가 되는 데 있어 이것보다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야구선수 양준혁이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전 홈런 20개에 타율 3할 정도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했었죠. 그런데 승엽이는 홈런 54개 친 다음 해 갑자기 폼을 바꾼다고 하더군요. 그 후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는 걸 보면서 깨달았죠. ‘열심히 했는데 왜 2인자일까’ 한탄하는 와중에도 1인자는 안주하지 않고 계속 연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만족하는 순간 바로 끝이에요. 도전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한 겁니다.”
[요리 가이드라인 #3] 지금 하는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좀 눈에 띄는 일을 했다고 해서 성취라고 착각하지도 마라. 그 안에서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저널리스트)
제일기획을 다니면서 저는 이러한 ‘2인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얻기까지 적지 않은 수업료를 치렀습니다. 제 ‘천적’, 다시 또 사수 이야기입니다. 누가 들으면 아주 원수라고 할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 때는 누구나 다 회사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 기대감 속에는 특히 자신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며 키워줄 사수에 대한 기대감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요. 저 또한 그랬습니다. 형이 없는 저는 마음속으로 이미 그를 형으로 찍었던 겁니다(지금 생각해봐도 참 웃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기대감은 첫날부터 바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다 그런 거야 아니겠지만, 보통 사수라고 하면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신입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지도하면서 자기만의 노하우를 빨리 전수해주려고 하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제 사수는 철저히 '올 바이 유어셀프(all by yourself)'주의였습니다. PD들은 메인 직장인 회사는 거의 잠깐 들르고, 대신 프로덕션에서 거의 살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정말 다양한 프로덕션들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는 담당자에게 저를 인사시키고 난 후 철저히 방치했습니다. 아니, 거의 ‘투명인간화’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아마 속으로 그는 “너도 나랑 같은 PD니까, 네가 스스로 알아서 쑥쑥 커야 한다. 나도 그때는 그랬어. 다 그렇게 크는 거야, 짜식.”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것도 부탁하지 말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제스처만 일관되게 매일매일 전달받았지요. 그게 제가 사수로부터 배운 것의 전부입니다.
미웠냐고요? 천만의 말씀. 더도 덜도 말고 한 대 패주고 싶었습니다. ’뭐 이런 사수가 다 있나’ 싶었지요. 저는 그냥 프로덕션 사람들에게 눈도장이나 찍고, 옆에서 일하는 거 지켜보고, 식사 시간 되면 같이 식사나 하고, 때때로 새벽에 퇴근하고 그랬습니다. 한 몇 주 지났을 때였나요? 사수가 저보고 “자, 이제 감 잡았지? OOO 프로덕션에 가서 뭐, 뭐 따와. 참, 간 김에 아예 거기서 다음 작업까지 다 마무리하고 와라. 지금까지 옆에서 잘 지켜봤을 테니, 아무 문제 없겠지?” 이것이 몇 달이 아니라, 몇 주 후의 일입니다. 사수가 저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나 싶더군요. 아주 불구덩이로 집어넣으려고 기를 쓰는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물론 사수가 부탁한 따오는 거며 작업하는 거며, 다 깽판 쳤습니다. 그리고 사수에게 제대로 박살났지요. 마음속으로 따지듯 외쳤습니다. ‘당신이 날 위해 해준 게 뭔데?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준 게 있다면 말해봐.’ 제 마음을 꿰뚫어봤는지 사수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결국, 네가 하나하나 다 알아내야 하는 거야. PD란 그건 거야. 모르면 똥오줌 가릴 거 없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야 해. 쪽팔리는 건 둘째 문제지. 그렇게 부딪치고 깨지면서 하나씩 터득해 나가야 하는 거야. 누가 봐도 넌 똑똑하지만, 똑똑함 갖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똑똑함이 밥 먹여주나? 그동안 너를 쭉 지켜봤지만, 너는 모든 걸 네 앞에 갖다놔 주길 바라는 건지, 아니면 너무 잘나서 PD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저절로 깨우칠 거라고 순진하게 믿는 건지 참 지독하게 소극적이더군. 처음엔 성향이려니 하고 넘어갔고, 다음엔 정말 똑똑하니 다 안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지. 헌데 그게 아니더라. 나 때는 말이야, 지금의 FM식 교육법보다 더 심했어. 사수가 내 간단한 질문들조차 받지 않았다고. 그는 왜 그랬을까? 과연 생각이 없어서였을까?”
사수는 제 생각을 완전히 읽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었지만 질문하는 건 쪽팔렸고, 사수에게 물어보는 건 무서웠습니다. 모르면, 방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는데 저는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곱게 자란 도련님 티를 팍팍 냈던 거지요. 1인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2인자의 과정을 겪고 싶지는 않았던 겁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회사에서 잘 나가는 PD중 한 사람이었던 사수의 말과 행동만 유심히 보고 따라했더라도 이런 낭패를 맛보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다치기 싫어, 감정적인 손해는 티끌만큼도 입고 싶지 않아 복지부동의 길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저와 같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저처럼 이미 1인자가 된 듯한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2인자에게는 분명 2인자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최고가 아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과감히 버린 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왕년에 한 가닥 했고 동네에서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아무도 관심 없습니다) 떠들고 다닐 시간에 그는 자신의 현재 실력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하나라도 더 배우는 데 투자해야 합니다. 셜록 홈스와 같은 명탐정이 되고 싶다면 최소한 홈스처럼 비슷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1인자가 갖고 있는 그만의 탁월함을 흡수해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실력과 전략적으로 통합해나가야 한다는 거지요.
욕심은 셜록 홈스에 가 있으면서 행동은 닥터 왓슨처럼 하는 것, 이게 바로 많은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일전에 조선일보에서 소개한 ‘성공하는 2인자를 위한 20계명’ 중 몇 가지 조언들이 이런 실수를 예방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제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번 잘 살펴보세요.
ㆍ 1인자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정확히 파악하라. 2인자의 기본 중 기본이다.
ㆍ 1인자가 좋아하는 화법을 발굴한 후 간결하고 명쾌하게 커뮤니케이션하라.
2인자의 중언부언은 1인자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단점으로 여겨진다.
ㆍ 직함을 욕심내지 말고 일을 욕심내라.
ㆍ 1인자에 대해 애정을 갖도록 노력하라. 업무의 효율에도, 정신 건강에도 그게 좋다.
ㆍ 웅변하지 말고 조정하라. '웅변하는 2인자'는 역할 파악 혹은 업무 파악을
제대로 못했다는 인상을 주기 십상.
ㆍ 준비하고 준비하고, 그리고 또 대비하라. 듣고 듣고, 그리고 또 경청하라.
생각해보면 저는 사내에서는 나름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그 능력이 그다지 오래 가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남의 말이나 행동에 집중하고, 그로부터 뭔가를 배우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제가 갖고 있는 자질이나 소질, 능력 등을 믿고 거기에만 의존해왔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인자로 우뚝 서고 싶지만 절대로 고생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하고, 1등이 되고 싶지만 잠시라도 2등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공짜 점심’을 바라는 얌체 회사원이었던 거지요.
[요리 가이드라인 #4] 최고를 열망하는 사람에게 2등은 결코 불명예가 아니다. ―키케로
어찌 보면 2인자라는 자리는 실력과는 큰 상관이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2인자라는 자리는 실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임시직’인데도, 그 잠깐의 시험 기간을 참지 못하고 박차고 나가버리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벌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비록 실력은 출중하지만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그것을 좀 더 적당하고 적절한 모양새로 깎고 자르지 않아 그대로 낙오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감이나 우월감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그건 그냥 자기 자신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주는 자존심일 뿐입니다. 자신은 사실 1인자가 될 만한 역량과 자세와 태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걸 증명해줄 뿐이지요. 진정한 자존심, 다시 말해 자존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러기엔 정말로 너무나 자존심 상하기 때문입니다.
LG생활건강에 재직할 당시의 제 사수가 떠오릅니다. 제일기획 때의 사수처럼 그도 능력은 사내에서 다들 알아주는 수준이었지만, 제일기획 때의 사수와 달랐던 점은 그가 그래도 좀 더 ‘인간적’이었다는 겁니다. 말수는 마찬가지로 거의 없었지만 적어도 너무 막힐 때,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는 제가 갖고 있는 궁금증들을 받아줘, 그에 대한 친절하고도 자세한 설명을 제공해주었지요. 저를 완전히 방치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헌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니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더군요. 과연 누구의 방식이 옳았던 걸까? 제일기획 사수의 방식, 아니면 LG생활건강 사수의 방식? 기본적으로 나의 능력이 일정하고도 일관된 수준으로 계속 커왔다는 가정 하에 양쪽 상황을 떠올려봤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던 제일기획 사수 밑에서 묵묵하게 컸다면 나는 지금쯤 1인자가 되어 있을까? 같은 관점에서, 나의 어려움들을 밀고 당기듯 시의적절하게 조금씩 완화해준 LG생활건강 사수 밑에서 묵묵하게 컸다면 어땠을까? 의심의 여지없이 1인자가 되어 있을까?
만약 제가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후자에 거의 몰표를 던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나온 지금은 공평하게 ‘1인자가 되어 있다’에 50%, ‘1인자가 되어 있지 않다’에 50%를 주겠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1인자가 되는 게 결코 사수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랫사람의 성장 여부(자기의 힘으로 노력해서 성장하는 건 제외)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호흡과 궁합과 팀워크에 달려있는 것도 맞는 얘기지만, 더 정확하고도 중요한 사실은 그의 성장 여부가 다름 아닌 아랫사람 본인이 사수라는 사람의 역할과 비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사수의 교육‧훈련 방식을 소박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에 달려있다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수를 탓할 것도, 그를 문제시할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모든 문제도, 그리고 그에 대한 해답도 다 자기 자신에게 있는 거지요.
완전히 다른 분야의 얘기이긴 합니다만, 2004년에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기까지 햇수로 3년을 준비해온 제가 결국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그 기간 동안 2인자의 자세에 충실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완전히 올인했기 때문입니다. 평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대가들 포함)이든 자질과 재능을 보이는 사람이든 열정을 가진 사람이든 관심 정도만 갖고 있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저는 이 모든 사람들이 소유한 장점(심지어는 단점까지)들을 받아들여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드는 데 만전을 기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였기 때문인지, 제 자신을 1인자라고 생각했던 적은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로지 배우고 또 배워 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다는 욕심뿐이었지요.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1인자들이 제가 사랑해야 하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인 같은 존재였다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1인자들과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힘든 고역입니다. 그들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람인 이상 한편으로는 그들을 향한 질투와 시기, 증오 등 원인 모를 묘한 복잡한 감정들 또한 갖게 되는 게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들과 사랑에 빠지는 게 힘들다면 최소한 그들을 좋아하려고 노력은 해봐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 자세 그대로 그들에게 관심을 쏟으면 된다는 겁니다. 인간성이 ‘개판’이든 말든 그가 지금 여러분보다 앞서나간다는 사실만 명심한다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무리 내가 지금 2인자라지만 어떻게 그런 인간을… 내 목을 비튼다 해도, 그건 싫다.” 그런가요?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요? 불가능한 게 아니라 가능하긴 하지만 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
어쩌면 다음의 얘기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하나의 자그마한 방향 전환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개그맨 박명수에 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2인자 컨셉을 지향하는 박명수는 2인자 정신에 투철한 걸로 정평이 나 있지요. 실제로 1인자가 될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지 못해서든 의도적으로 일부러 2인자를 추구하는 것이든 간에 그는 2인자로서 자신의 몫에 100% 충실한 개그맨입니다. 그런 그가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후배 개그맨이 “박명수는 유재석 없으면 쓰레기”라는 막말로 웃음을 유도했을 때 그냥 한번 웃고 말았다고 합니다. 충분히 뚜껑이 열리고도 남을 만한 일이지만, 나중에 편집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2인자라는 사실 자체가 허접하고 못난 게 아닙니다. 2인자이기 때문에 2인자 티 팍팍 내면서 그야말로 2인자의 말과 행동을 보여주는 게 정말 허접하고 못난 거지요. 자신이 지금 1인자가 아니고 2인자라면, 떳떳하고 당당하면서도 겸허하게 2인자임을 인정하고 1인자에게 한 걸음 다가가보세요. 자신이 진정 2인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와의 거리가 그렇게 멀게 느껴지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명셰프의 30초 요리팁 | 신은희 닐슨컴퍼니코리아 대표
“회사를 다니다 보면 좋은 상황도 있고 나쁜 상황도 있어요. 좋은 상황만 있다면 나약한 조직원이 될 겁니다. 나쁜 상황을 겪어야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근육’이 생기죠. 근육을 키워야 오래 버틸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