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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Dec 10. 2023

[2001] 내가 만약,  
문학평론가의 길을 걸었다면

옛날에 쓰던 메일 계정을 정리하다가 

2001년 하반기에 한 평론가로부터 받은 

메일들을 발견. 오옷!


핵심만 뽑아보자면 이러함.


"내 말을 명심하게. 

 문학은 교양 정도에서 만족하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문학의 애호가로, 

 문학의 좋은 패트런으로 남아있게. 

 자네가 만약 평론가가 된다면 

 나야 좋겠지만, 현실은 다른 것이야. 

 머리로만 평론을 할 수 없어. 

 내 말 알겠지?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게."


"육체가 문학에 있지 않으면 문학을 할 수 없어. 

 이 말은 문학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며, 

 문학으로 굶을 수도 있다는 뜻이야. 

 평론은 논리나 명징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야. 

 문학은 명예도 아니고, 숭고한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에 운명적으로 접어들어 하는 사람들의 

 하나의 직업일 뿐이야. 최종적으로 말하는데, 

 그래도 자네가 평론을 하고 싶다면 하게. 

 아무한테도 도움 받지 말고, 스스로 하게. 

 나에게 갑자기 메일 보내서 궁금한 것, 

 묻지도 말게. 자네는 벌써 자세가 틀렸어."


그 후 어떻게 됐냐고?


1년 후 나는 모교 철학대학원에 진학했고, 

같은 해 숙명여대에서 주최한 범대학문학상,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됐으며, 

3년 후 결국 신춘문예(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그런데 결과만 놓고 보자면, 

문학평론가로서의 활동은 거의 하질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지 않았다. 

저분으로부터 받은 몇 통의 메일들의 

내용 그대로 사실이 됐으니. 


한편으로는 이제 와서 진중하게 생각해보면, 

내가 만약 진짜로 문학평론가로서의 길을 걸었다면?

아우, 아찔하다(여러 가지 맥락에서).


이 부분과 관련해선 이분이 남긴 메일들 속의 

현실적인 부분들만 발췌, 조만간 따로 공유해봐야겠다.

이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꽤 도움이 될 듯.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으니.


덧. 그런데 후배 평론가들이 만약 나에게 

조언을 구해온다면, 나 역시 이분이 한 말 그대로 

똑같이 해줄 것 같긴 하다. 애정이 있으니

저렇게 말해주셨겠지. 애정이 없으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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