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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Dec 24. 2022

[2000] 천국에서 지옥으로, 다시 천국으로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담론


윤미는 웃음을 짓고 있다. 우리들의 시선에 수치심이라도 안기려는 듯. 윤미는 우리들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만든다. 그녀의 눈은 순식간에 우리를 타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 사진을 보기 전에, 더 구체적으로는 이 사진의 윤미를 인식하기 전에는 그녀의 엄마의 몸에 눈이 집중된 것이 사실이다. 사진을 감상하는 순간 그녀의 엄마의 가슴에 초점이 '저절로' 모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윤미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눈이 그녀의 엄마의 가슴을 향했건 향하지 않았건 그것은 크게 상관이 없다.) 그녀의 눈의 패턴이 만들어낸 선은 나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엄마의 가슴에 시선을 두게 만든 것이다.  

    

이 사진 자체가 수평이 아닌, 오히려 반대로 수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면, 나는 어쩌면 훨씬 편하게 윤미의 눈에 집중했을 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작가의 의도는 사장됐을 지도 모른다. 과연 그의 의도란 무엇인가?    

  

일단, 이 사진에서의 배경은 윤미와 그녀의 엄마 사이의 아늑한 공간적, 시간적 프레임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침대는 윤미와 엄마라는 한 테마의 초점을 뚜렷하게 만들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작가가 의도한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침대의 공간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잠자는 장소로서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인 행위를 나누는 장소로서의 공간이다. 여기에서 침대 위의 윤미의 엄마만 놓고 보았을 때, 그녀가 취하고 있는 자세, 옷차림, 옷의 상태 등을 고려한다면 전자의 아늑하고 은은한 잠자리로서의 침대보다는 오히려 후자가 연상될 정도로 나로 하여금 에로틱하고 은근한 외설적 상상력을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윤미를 집어넣음으로써 나의 외설적 상상력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사르트르의 열쇠구멍 에피소드에서처럼 주체인, '보는 자'로서의 나는, 순간 수치심 섞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녀의 엄마(제1의 타자이자 대상)에게 다가가서 나의 시선을 박아두려고 한 순간, 윤미(제2의 타자)에 의해 나는 다시 대상이 되어 버리게 되어, 나의 음험한 시선, 곧 나의 주체성은 그녀의 표정 속에 갇히게 된다. 윤미는 나의 전략을 미리 예상하고 있고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이 묘한 눈치를 주고 있는데, 그녀의 발을 통해 숨겨진 웃음 깃든 입표정이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윤미는 "나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다."를 무언의 표정과 행동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시선에 검열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가서, 왜 나의 시선은 그녀의 엄마의 가슴을 시발점으로 하여 그녀의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윤미의 두 눈의 연결된 선이 만들어내는 패턴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나의 두 눈의 방향이 윤미의 엄마의 가슴에 집중되도록 유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미의 두 눈은 나의 관심과 시선을 작가의 주제에 한 단계 접근하기 위해서 필요한 매개물인 그녀의 엄마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엄마의 가슴, 나아가 그녀의 몸의 배치 상태는 나에게 평온함과 더불어 나의 은밀한 전략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틈을 제공해주고는 있지만, 그러한 틈 내지는 내가 강조점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었던 부분은 윤미의 공간에 의해 방어되고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영역과 그녀의 엄마의 영역은 윤미의 영역에 의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독특한 점은 거기엔 영원한 단절감 내지는 분리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윤미가 나에게 심어주는 표정과 눈치는 스스로 나에 '무언가'를 전달해주고 있다. 윤미의 숨겨진 미소는 나의 공간과 그녀 사이에 놓여진 그녀의 엄마의 공간의 결합을 예고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윤미의 표정 같은 작가의 의도를 이루고 있는 중심 요소는 그 자체로써 디테일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나는 윤미(타자)를 통해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나의 수치심, 나의 공간, 나아가서 내 자신을 인식한다. 나는 사실 나의 존재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인식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식 밖의 사물일 뿐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나의 안에 갖지 못하고 나를 규정하기 위해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엄마의 영역은 내 자신을 규정하기 위한 첫 단추에 불과하다.      


나는 이 사진에서 작가가 드러내는 의도의 실체를 정의내리기 위해 윤미의 영역을 집어넣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영역에서 나는 시선의 대상으로 변하고, 이것이 나의 의식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특별한 순간에 나는 나의 전략을 수정해 윤미의 시선에서 드러나는 윤미의 전략과 화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윤미의 엄마라는 알려진 영역을 보여주어 함정을 파놓았다가,  순간에 윤미라는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드러내어 나에게 신선한 수치심을 안겨주는 방법을 시각화해 놓고 있다. 여기에서 나의 주체는 새로운 의식의 규정을 받게 되어 사진에 동의를 보내게 된다. 이와 더불어 작가가 사용한 기술적 측면의 방법에 대해 잠시 논한다면,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시각적 무의식' 예로   있을 것이다.  이유는,  사진이 대상의 모습을 시간적으로 정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그것이 잠시일지라도 말이다). 카메라에 찍힌 대상은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지해 있는',   세상에는 사진 속을 제외하고는 있을  없는 상태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냥 정지해 있지는 않다. 그것은 윤미가 보여주는, 눈의 초점에서 드러나는 운동성이 나의 시선의 운동성에 반영돼 나의 의식의 운동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라는 자아 개념을 수치심을 통한 타자와의 분리 과정을 거쳐 윤미라는  다른 타자를 통해 재정립해주고 있는 것이다. 윤미는 나로부터 타자를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게 속삭이듯이 그것을 되돌려주고 있다.


윤미는 천국이다.  



연대 법학과 재학(4학년 2학기) 때의 일.

교양 수업을 하나 들었는데,

수업명은 '사진 촬영과 감상'.

이 수업에서 강사가 과제로 내준 것이,

사진 하나를 선정해 단평을 쓰는 것.

당시 작성해서 제출한 글이 위의 글임.

그때 기분 좋게 만점(A+)을 받고

구석탱이 어딘가에 저장해뒀다가,

바로 그 다음 해인 2001년에

월간 『사진』이라는 잡지에 투고.

역시 기분 좋게, 바로 실리게 됨.

벌써 21년 전의 이야기.   


덧. 출처는 전몽각의 『윤미네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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