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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Feb 26. 2024

[오이] 명셰프 소개

이와타 사토루(岩田聰) | 前 닌텐도 대표이사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모르긴 몰라도 이번 편만큼 여러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편도 없을 겁니다. 경청이란 단어만 거의 서른 번이 넘게 등장하는데 거슬리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요. 죽어라 ‘경청해라’ ‘열심히 들어라’ ‘주의 깊게 들어라’를 외쳐대는데 지겹고 짜증나서라도 한 번 들어줘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한 걸로 치면 제가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기껏 다 쓰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들쑤셔놓더군요. 요는 ‘사람들이 과연 공감을 할까’였습니다.    

  

실제로 어떤가요, 여러분은? 이번 편을 읽고 나서 순순히 고개가 끄덕여지던가요? 아니면 뭔가 2% 부족한 듯 찝찝하고 씁쓸한 기분이 들던가요? 여러분이 후자를 선택한다고 해도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부터가 그럴 것 같으니까요.    

  

아마 경청의 근본적인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중심적(이기적이란 말이 아닙니다)’이라는 거지요.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고 주변을 이해하면서 일을 풀어나가려 합니다. 결국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입(口)이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경청이란 뭔가요? 입은 꾹 닫는 대신 귀를 활짝 여는 겁니다. 여기에서 주인공의 자리가 뒤바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제는 남이 주연(主演)의 자리를 꿰차게 된다는 거지요. 찝찝하고 씁쓸한 기분의 정체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는 한, 그리고 이것을 자기만의 기준으로 정의해 극복하지 않는 한 경청에 대한 어떠한 조언도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공(미래)과 경청과 자신의 성격(성향), 이렇게 셋을 자기 앞에 끌어놓고 삼자대면을 시키는 겁니다.      


이런 질문들이 서로 간에 오고 가겠지요. “니 성격 갖고 성공할 수 있겠냐?” “성공하고 싶어? 그럼 경청이나 하셔.” “경청이 꼭 성공에 필요한 거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경청하려면 성격이 어때야 하는 거냐? 말해봐.” “성격이 안 좋으면 경청하기 힘드냐? 경청을 하다가 오히려 성격이 버려지는 거 아냐? 닭이냐 달갈이냐?” “경청 없이 성공 없다고? 그게 맞는 말이냐?” “일단 성공을 해야 마음이 좀 여유로워져서 경청도 할 수 있는 거 아냐?” 성격이 좋아야만 경청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거냐?    


“비슷비슷한 질문들이네 뭐.” 네.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입니다. 맥락은 딱 하나입니다. 성격(성향)과 경청과 성공(미래)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것. 서로 떨어뜨려 놓으려야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 


자신의 성격이란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경청을 할 수가 없고, 경청이란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성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격이 이상하고 괴팍하고 나빠도 잘만 경청할 수 있다, 뭐.” 아, 위선적이고 가식적으로 듣는 척하면서 자신의 성격을 감추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게 과연 잘 될까요? 얼마만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 것 같나요? 또,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정도로 바보처럼 속아줄까요? “성공하려면 경청하라고? 경청을 뛰어넘을 정도로 말을 끝내주게 잘하면 성공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이거 어쩐다. 걱정이 되는걸요? 말을 끝내주게 잘하는 건 정말 박수칠 만한 일인데, 그 박수를 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어떡하나요?     

 

“어이, 작가 양반. 성격이고 경청이고 뭐고 다 갖다 대보셔. 실력만 있으면 그런 거? 다 눈 감아줘. 그러니 헛소리 좀 작작하라고.” 이 분은 한 술 더 뜨는군요. 자기중심적인 게 아니라 아예 이기적으로 나가기로 작정한 분 같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다 용서된다고요? ‘얼굴이 예쁘면 다 용서된다’는 말이야 숱하게 많이 들어봤지만, ‘실력이 있으면 다 용서된다’는 말은 지금껏 누구로부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라. 그럴 것 같지요? 그러나 설령 여러분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천재라고 해도, 여러분의 회사가 구멍가게 수준이라고 해도, 앞으로 세상이 얼만큼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습니다. 왜냐? 일이란 게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전제로 돌아가고 굴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력이라는 것도 상대방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성공이란 결국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자, 이제 조금 정리가 되지요?     

 

성공은 마음이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을 정도의 연륜이 쌓인 건 아닙니다만, 성공은 다름 아닌 마음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건 당연한 거고, 무엇보다도 ‘상대방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식상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 자신이 성공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가짐보다도 남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마음가짐, 즉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주느냐가 100만 배 더 중요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날고 긴다 해도 거기에 동조해주고 동의해주고 공감해주면서 웃음으로 화답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놓고 보면 성공은 두 개의 마음이 합쳐진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 = 성공에 대한 나의 마음 + 나에 대한 남의 마음    

 

나에 대한 남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그걸 얻기 위해서도 우리는 경청을 해야 합니다. 건성으로 듣는(hear) 대신 좀 더 귀를 기울이면서 들어야(listen) 합니다. 듣는 척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완전히 올-인해서 들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게 결코 찝찝하고 씁쓸한 얘기일 수가 없는 게, 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성공을 하고 싶으세요? 일단 (자신을 위해서) 들으세요.” 이제야 눈이 번쩍 떠지지요?     


여기에서 잠깐. 경청에 대해 중간점검도 할 겸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아마 대부분 질문은 쉽지만, 대답은 쉽지 않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구한 날 질문이야 질문이긴. 열심히 들으면 되잖아. 앞으로 잘할 테니 이제 좀 내버려 두이소.” 열심히 듣는 건 좋은데,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확인 및 공유 차원에서 묻고자 합니다. 경청의 본질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면 뭐가 적합할까요?  

    

경청은 □□이다. 

   

결정적인 힌트 하나 드리겠습니다. “말로서는 사람을 □□할 수 없다.” 혹시 감이 오시나요? 정답은 설득입니다.   

   

말(누가 듣더라도 대단하다고 할 만한 말)은 당장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희한하게도 오래 가지 않는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다들 경험상 이걸 알고 있으면서도 포기하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마약과도 같은 거지요. 뿅 가게 해주긴 하는데 몸은 망가뜨려놓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그만두지도 못하는 그런 악순환이라고나 할까요. 화려하고 멋진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질투와 부러움을 선사하긴 하지만,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인식과 평판을 천천히 갉아먹고, 이걸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는 거지요. 그러고 보면 말이란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99%의 사람들이 말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뭐, 잘 됐습니다. 기왕 포기 못하는 거 이판사판으로 한 번 활용해보도록 합시다. 그래도 여러분을 도와줄 가이드가 한 분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 닌텐도의 前 수장인 이와타 사토루를 붙여드릴까 합니다. 

    

이와타 사토루는 사내에서 두 가지 경청을 실천하는 CEO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주의 깊게 듣는 경청(傾聽)이고, 다른 하나는 공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청하는 경청(敬請)입니다. 분명히 말을(속이 다 시원하지요) 하긴 하되,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낮춰 정중하게 ‘청한다’는 거지요. 그건 질문일 수도 있고 확인일 수도 있고, 말 그대로 부탁일 수도 있습니다. 보면 하나같이 다 상대방의 피드백을 들어보겠다는 대전제를 깔아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드리기 위해 어쩌면 그토록 뜸을 들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청을 귀에 한정시켜 이해하면 할수록 그건 정말 피곤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지금 이 짓을 하고 있나.” 식으로 다소 과격하게 말할 분들도 있겠고 “누구를 위해서 경청을 하는 거지(For whom the ear opens)? 식으로 지적(知的)으로 접근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듣기만 잘 하면 정말 성공할 수 있는 거야? 큰 소리 떵떵 쳐대는데, 보장할 수 있어?라고 재확인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여러분 스스로를 위한 것이니 경청을 한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고, 성공에 대해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경청의 방식만 나름대로의 기준을 갖고 제대로 정립해두면 됩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면 주의를 기울여가면서 듣고(傾聽), 거기에 더해 그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들으며(敬聽), 그에 대해서 할 말이 있으면 공손하게 자신의 입장을 청해(敬請) 또 들으세요. 순서가 맘에 안 든다고요? 그럼 거꾸로 하면 됩니다. 할 말이 있나요? 그럼 공손하게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주장을 청(敬請)하세요. 그리고 남의 피드백을 주의를 기울여가면서 듣되(傾聽), 그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들으면(敬聽) 됩니다.    

  

피드백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요? 그럼 이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하면 됩니다. 좋으나 싫으나 될 때까지 이 단계들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밟아나가면 됩니다. 무리하게 건너뛰려다 굴러 떨어지거나, 발을 헛디뎌 나뒹굴 수도 있을 겁니다. 만사가 귀찮은 나머지 단계를 밟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아, 더 이상 안 되겠어. 난 기권! 배 째!”라고 하면서 포기해버리고 내려갈 수도 있겠지요.   

    

세상은 공평합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냥 마음 편히 잊어버리세요. 아무도 말릴 사람은 없으니까요. 판단도 선택도 다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다니는 책임 또한 다 여러분의 몫입니다. 권리라고 생각하면 권리일 테고, 의무라고 생각하면 의무일 겁니다. 전 그저 여러분이 이 과정을 겪어나가는 동안 딱 한 가지만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온전히 우리의 편인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아니 상대방 이전에 바로 우리의 귀라는 사실을요. 물론, 입은 보너스입니다. 



直接!

―이와타 사토루의 캐치프레이즈 & 상징     


“우리는 소니나 마이크로소프트와 경쟁하지 않는다.

우리는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과 싸운다.”

―Fortune, 2007년 6월     


『닥터쿡, 직장을 요리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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